제641화
며칠 동안 백장간은 매일 시간을 내어 말 타는 법을 알려 주었다. 말을 제법 타게 되니, 그는 난이도를 올렸다. 호숫가 옆 커다란 나무에 과녁이 걸렸고, 나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야 했다. 물론 내게는 너무 어려운 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살은 전부 호수에 빠져 버렸다.
저택의 하인들은 매일 그물망을 들고 와 호수 속에서 화살을 건져 올렸다. 깨끗하게 씻은 화살은 나에게 돌아왔고, 그러길 며칠간 반복한 끝에 난 마침내 과녁에 화살을 꽂을 수 있었다. 운이 좋긴 했지만 어쨌든 맞힌 건 맞힌 것이니까.
과녁에 꽂힌 화살을 바라보니 벅찰 정도로 기쁨이 밀려왔다. 백장간은 성공하면 밥을 사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와 정식으로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어디 그와만 처음일까? 저녁을 밖에서 사 먹는 건 내겐 드문 일이었다. 등불이 수 놓인 밤 풍경을 볼 생각에 잔뜩 흥분한 나는 가마가 아닌 말을 타겠다고 떼썼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던 백장간은 결국 허락해 주었다.
우린 따스한 봄날 저녁에 말을 타고 거리를 거닐었다. 마침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난 꿈에 잠긴 사람처럼 웃고 또 웃었다. 말을 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계속 웃음이 났다.
백장간은 평소처럼 날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것도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종종 내 앞에 반찬을 덜어주고 과음하지 않도록 끊어 주기도 했다. 이따금 그는 턱을 괸 채 가만히 날 응시했다. 난 부드러운 그의 눈빛에 취해 헤어날 수 없었다. 그가 다정히 바라보는 상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건 아닐까.
황후 언니에게 듣기론, 그는 지금껏 누굴 흠모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군에 있었을 땐 주변에 남자들뿐이었고, 대장군이 되어 도성에 돌아온 뒤로도 늘 혼자였다고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여인과도 얽힌 적 없는 청렴결백한 사내였다.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전부 맛보았지만, 사실 뚜렷하게 기억나는 맛은 없었다. 그가 준 음식을 입에 넣느라 바빴을 뿐, 맛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입으로 음식을 먹고 눈으로 그를 음미했다. 오늘 저녁은 진정으로 완벽한 식사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훌륭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취기가 조금 올랐다. 소라가 날 부축하려 했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니 곧장 뒤로 물러섰다. 백장간은 내 모습을 빤히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가 내 팔을 붙잡더니 나긋하게 말했다.
“군주, 천천히 가세요. 넘어집니다.”
난 그에게 몸을 기댄 채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장군이 있는데 제가 어찌 넘어지겠어요.”
그가 점점 내게 넘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우리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룰 날도 머지않을 터였다.
식당을 나온 뒤, 그는 내가 탈 가마를 부르려 했다. 난 끝까지 말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날 안은 채 말에 올라탔다. 넓고 탄탄한 품에 기댄 나는 힘을 풀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깊이.
* * *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로, 백장간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긴 듯했다. 그는 날 피하는 대신, 멀리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 모습은 한 송이 꽃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딱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그의 눈빛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것.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온 나에게 총애 가득한 그의 눈빛은 끊을 수 없는 독약과도 같았다.
우리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고 난 그의 앞에서 점점 더 편하게 굴었다. 그가 날 내버려 두는 건 내가 귀엽고 깜찍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두 시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한 시녀가 조잘거렸다.
“장군께서 군주께 정말 잘해 주시는 것 같아.”
다른 시녀가 거들었다.
“그러니까. 군주를 그렇게 아껴 주시다니. 날이 갈수록 정말 친남매 같으시다니까.”
순간 찬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듯했다. 저들의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우리 둘 사이에 오가는 것은 남녀 간의 정이거늘.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는 오라버니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와 백장간의 사이는 종이 한 장으로 가로막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까웠지만, 하인들은 다들 친남매처럼 여겼다. 마음이 너무도 괴로워, 소라에게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소라는 턱을 괴고 탁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장군께서 군주를 대하시는 태도가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남녀의 정인지 남매의 정인지는 저도 헷갈립니다. 어떤 땐 군주께 상냥하고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게 정말 오라버니 같기도 하고, 어떤 땐 군주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소라의 말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어쨌든 소라도 그의 애정 어린 눈빛을 알아차린 게 아닌가? 난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네가 보기엔 장군께서 내게 고백을 하실까?”
소라가 고개를 저으며 단칼에 잘라 말했다.
“아뇨.”
“어째서?”
“직감이 그렇습니다.”
난 코웃음을 쳤다.
“네 직감이 잘 맞아?”
“정확합니다.”
소라가 말했다.
“예전에 큰비가 내렸을 때, 웬 거지가 담벼락에 웅크리고 바들바들 떠는 걸 본 적 있습니다. 왠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지요.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
저 방정맞은 주둥이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나 그 후로 소라의 직감에 신경을 쓸 틈도 없었다. 두씨 집안 아가씨가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백장간이 집을 비웠기 때문에 관리인은 곧장 그녀의 응대를 내게 맡겼다. 난 그녀가 더는 눈에 거슬리지 않았던 터라, 함께 호수를 거닐었다.
“연잎 구경하는 걸 좋아하셨지요? 예전보다 많이 컸습니다. 이제 꽃대도 다 올라왔지요. 꽃이 피면 연밥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두씨 아가씨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매일 저택에만 계시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백장간이 있는데 답답하긴. 난 그녀를 떠보며 물었다.
“장군을 찾아오신 겁니까?”
“아뇨. 그저 잠시 놀러 온 것뿐입니다.”
두씨 아가씨는 어여쁘게 웃었다.
“장군께선 언제 돌아오십니까?”
“…….”
이리 대놓고 물어보면서 아니긴.
“장군의 일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
내 말에 아가씨는 왠지 모르게 기뻐하는 눈치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나무에 걸린 과녁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난 눈썹을 치켜세우며 활짝 웃었다.
“제가 활쏘기 연습을 할 때 쓰는 과녁이에요. 아가씨도 활을 쏠 줄 아세요?”
난 그녀와 실력을 견주고 싶었다. 수영이나 신발 만드는 실력을 겨룰 수는 없지만, 말타기나 활쏘기는 그래도 제법 체면치레가 되니 가능할 것이다. 두씨 아가씨는 손을 내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가르쳐 주긴 했지만 제가 너무 부족하여 잘 쏘지 못합니다.”
“그래도 쏠 줄 아신다니 재미 삼아 함께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장군께서도 금방 돌아오진 않으실 테니 시간도 때울 겸요.”
백장간을 미끼로 삼으니, 역시 두씨 아가씨는 내 제안에 응했다. 난 하인에게 활 두 개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전부 백장간이 날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 준 작고 가벼운 활이었다. 활대에는 꽃무늬 조각을 새기고, 보석까지 박혀 있었다. 두씨 아가씨는 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예쁩니다. 장군께서 주신 겁니까?”
“네. 제게 맞는 활을 만들어 주셨어요.”
“장군께서 정말 잘해 주시네요.”
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백장간은 나에게 이렇게나 잘해 준단다. 그러나 웃기엔 너무 일렀다. 그녀의 화살은 쏘는 족족 과녁의 중심 근처에 꽂혔지만, 내 화살은 중심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꽂혔다. 그녀는 만개한 꽃처럼 웃었고 내 입가에 피었던 꽃은 시든지 오래였다. 한 차례의 활쏘기 끝에, 난 내 실력이 한참 뒤떨어진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아가씨가 활을 이렇게 잘 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저 오라버니가 가르쳐 준 대로 한 것뿐입니다.”
두씨 아가씨는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께서도 장군께 배운 것이지요? 역시, 세상의 모든 남매들은 다 이렇게 사이가 좋은가 봅니다.”
하, 퉤! 너흰 친남매일지 몰라도 우린 아니거든.
“오라버니가 제게 말 타는 법도 알려 주셨지요.”
두씨 아가씨가 말했다.
“장군께서도 군주께 가르쳐 주셨습니까?”
“물론이지요.”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절 앞에 앉히시고 손을 꼭 잡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삐를 어떻게 당겨야 하는지 말이에요.”
두씨 아가씨의 얼굴이 곧장 굳어졌다.
“하하, 장군께서는 정말 좋은 오라버니시군요.”
나와 백장간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걸 다시 떠올린 듯했다. 친남매가 아닌데 같이 말에 올라타다니! 감정이 얼마나 깊어 보일까.
“네. 제게 아주 아주 잘해 주신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 멀리 성큼성큼 걸어오는 백장간이 보였다. 요즘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보러 후원을 찾았다. 날 보고 난 뒤에야 처소로 향할 정도였다.
두씨 아가씨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장군.”
백장간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께서 와 계셨군요.”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내 앞까지 걸어왔다. 그 모습에 두씨 아가씨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빨개지길 반복했다.
“어찌 땀이 잔뜩 난 겁니까?”
날 걱정하는 백장간의 목소리에는 총애가 가득했다. 그뿐인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곁눈질로 두씨 아가씨를 보니, 그녀의 안색은 이제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백장간이 물었다. 난 과녁을 가리켰다.
“활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저보다 훨씬 잘하시더라고요.”
두씨 아가씨가 곧장 대꾸했다.
“아닙니다. 군주께서 봐주셨습니다.”
백장간은 내 목소리에서 서글픈 감정을 느꼈는지 위로를 건넸다.
“배운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조금 더 지나면 군주가 이길 겁니다.”
그 말은 두씨 아가씨의 얼굴에서 빛을 앗아갔다……. 난 속으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두씨 아가씨를 낮추면서까지 내 체면을 차려 주다니! 그는 내 단점까지도 감싸 주는 사람이었다.
두씨 아가씨는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목이 빠지게 백장간을 기다렸겠지만, 그는 오자마자 그녀의 마음을 부숴 버렸다. 지난번 고상하고 상냥했던 백장간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여동생을 지키는 데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장군, 군주.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