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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40)화 (639/1,192)

제640화

두 사람은 동시에 벼락을 맞은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참 뒤에야 백장간이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열었다.

“허튼소리!”

마부는 손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웃음만 보였다.

“전하,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아니지.”

백장간이 대신 대꾸했다.

“아뇨. 진짜예요.”

“안 됩니다.”

“어째서요?”

“저자는 부인이 있잖습니까.”

“첩으로 들어가면 되잖아요.”

“안 됩니다.”

“어째서요?”

“군주는 신분이 낮은 자에게 시집갈 수 없습니다.”

“전 애당초 군주도 아니었는걸요.”

난 고개를 치켜세우고 당당하게 말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내한테 시집가고 싶어요!”

마부는 부끄러운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백장간은 벼락을 한 번 더 맞은 듯 얼빠진 표정이었다.

“저자가 좋습니까?”

“네. 고백도 했었어요. 이웃들도 다 아는 사실이고요. 못 믿으시겠으면 가서 물어보세요.”

백장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부를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저자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비록 키가 조금 작고, 뚱뚱하고, 머리가 크고, 인물이 훤하지 못하고, 수입도 좀 적고…….”

이번엔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백 장군이 남을 이렇게 잘 깎아내릴 줄은 몰랐다. 마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웅얼거렸다.

“수입이 그리 적은 것은 아닙니다.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지요.”

난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할 땐 고개를 들고 크게 말해야죠. 다시 말해 보세요.”

그제야 마부는 큼직한 얼굴을 치켜세우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제 수입도 나름 괜찮습니다.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그의 나아진 모습에 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앞으론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도록 해요. 겁먹지 말고요.”

백장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감히 군주를 첩으로 들이겠다?”

마부는 한참 동안 입술을 옴짝거리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처를 내쫓겠습니다.”

용기 있는 발언이었지만, 난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공사 일로 옛집에 들렀을 때, 그의 아내가 얼마나 사나운 성격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 백장간이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처를 내쫓는다 한들, 배불리 먹이기만 하면 다인가? 군주를 잘 돌볼 수 있냔 말이다. 군주가 무얼 입는지, 머리에는 무얼 꽂아야 하는지 아느냐? 넌 군주의 연지와 분도 대주지 못할 것이다! 쌀뜨물로 군주의 얼굴을 씻겨 주려고 하는 것이냐?”

마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나 시무룩해졌는지 얼굴이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 지켜보고 있자니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심한 억압을 받아왔으니 비굴한 태도를 고칠 순 없으리라. 백장간은 이제 내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듯한 상대를 찾아야 할 겁니다. 키도 크고, 늘씬하고, 품위 있고, 늠름한 자로 말이에요. 가장 중요한 건 군주의 신분에 걸맞은 자여야 합니다.”

그의 말은 내 마음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군주라는 신분에 걸맞은 자는 백장간 본인 아니던가! 나는 은근슬쩍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 그 사람이 누군데요?”

“이 일은 내게 맡기세요.”

난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말한 사마 대인의 공자, 위지 대인의 공자, 진국공의 장손, 예친왕 집안의 자들은 아니겠지요?”

“군주가 싫다면 저도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그자들 말고 또 누가 있는데요?”

그는 일부러 내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있습니다. 조만간 만나게 해 드리지요.”

그의 말은 내 가슴속에 희망을 피워 올렸다. 그뿐일까, 희망은 점점 커지는 듯했다! 나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해 주셔요. 절 속이시는 건 아니시죠?”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언제 군주를 속인 적 있습니까? 군주는 아직 어리니 몇 년 뒤에 혼인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안 어려요. 황후 언니는 저보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고요. 서두르지 않으면 저도 노처녀가 될 거예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백장간에게 시집을 간다면 황후 언니는 나를 올케언니라고 불러야 하나? 구체적인 망상까지 피어올랐다.

“그만 돌아가야 하니 어서 타세요.”

“네!”

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앞까지 걸어간 나는 다시 울상을 지었다.

“아직 말 타는 법을 안 알려 주셨잖아요.”

그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아, 말 타는 법부터 알려 줘야겠군요.”

그는 내 허리를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려 말 위에 태웠다. 그리곤 내 뒤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기대니, 뻣뻣하게 굳은 몸이 느껴졌다. 하지만 날 밀어내는 대신,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피곤합니까?”

“네. 그렇게 오랫동안 도망쳤는데 안 피곤하겠어요?”

백장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더니 내 머리에 꿀밤을 주었다.

“고작 몇 마디 했다고 그리 도망치다니. 참 대단합니다.”

세상은 다시 달콤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내게 병도 주고 약도 주는 사람이 분명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멍청하게 서 있던 마부가 날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군주, 저는요?”

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서 돌아가요. 부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제 안부도 좀 전해 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백장간이 채찍을 휘둘렀다. 앞발을 높게 들어 올린 말은 빠르게 달려 나갔고, 내 목소리는 바람결에 흩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마부는 말을 끌며 아까 버려 두고 온 마차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쩐지 서글픈 모습이었다. 내가 떠나서 슬픈 것인지, 마차 때문에 부인에게 혼이 날까 봐 괴로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백장간의 손이 내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길고 깨끗한 손가락이 얼굴에 닿으니, 취할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오늘은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 * *

우리는 대치를 끝냈다. 그 뒤로 언제 서로 얼굴을 붉혔는지 모를 만큼 화기애애해졌다. 예전보다 그가 좀 더 잘해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저택에 돌아온 다음 날, 그는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 밤색 털의 자그마한 말을 데려왔다. 그리곤 친절하게 말 타는 법을 알려 주었다. 말은 내 키에 딱 맞아 발에 힘을 주면 쉽게 올라탈 수 있었다.

백 장군은 혹여 내가 넘어질까 싶은지 계속 부축을 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첫발에 힘을 싣지 못해 그의 손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전처럼 벌에 쏘인 듯 손을 떼는 대신, 날 일으켜 말 위에 태워 주었다.

슬쩍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낯이 뜨거워진 난 고개를 숙여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소라는 얼굴을 돌린 채 어깨만 들썩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소라의 얼굴은 자줏빛이리라.

백장간은 옆에서 말을 끌며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고삐를 넘겼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면 됩니다.”

사실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말을 타는 건 익숙하지 않았고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대처할 방법을 몰랐으니까. 내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는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겁먹지 마세요. 내가 있으니까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예전엔 황후 언니가 내 기둥이었다.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땐 언제나 언니를 찾았다. 물론 백장간에 대한 일은 빼고.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내 마음속 기둥이 백장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금세 마음이 안정되었고, 크고 너른 산에 감싸인 듯했다. 의지할 수 있다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그리고 이 감정이 사라지지 않길,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다.

호숫가 주변을 천천히 도는 동안 백장간은 내 옆을 걸었다. 하늘거리는 하얀 옷자락이 그의 훤칠한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은 그의 몸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금빛 나비가 그의 어깨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을까, 그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길을 보고 가야지요.”

나는 흠칫 놀라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말을 몰았을까, 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그가 불쑥 제안했다.

“한번 달려 보세요.”

덜컥 걱정이 앞섰다.

“그럼 장군은요?”

그는 손을 뒤로 뻗었다. 줄곧 말을 끌고 우리 뒤를 따르던 하인이 고삐를 넘겼다. 그가 빠르게 말에 올라탔다.

“걱정 마세요. 계속 따라갈 테니까.”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난 고삐를 내리치며 “이랴!”하고 외쳤다. 말은 곧장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말이 힘차게 달리는 반동에 좀처럼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백장간이 다가와 손을 뻗더니 말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말은 순순히 멈춰 섰다. 반쯤 혼이 나가 앉아 있는데, 그가 휴식을 권했다.

“군주, 잠시 내려서 쉬어야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꾀를 부린 게 아니라 정말 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난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장군, 다리에 쥐가 났어요.”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안아 땅에 내려 주었다. 소라가 후다닥 달려와 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잠시 뒤, 편안해진 다리를 움직여 일어나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달릴 땐 다리에 힘을 실어 말의 배를 조여야 합니다. 안 그럼 떨어질 테니까요.”

난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리 달리다니, 성격도 참 급합니다.”

부끄러워 진땀이 났다. 그의 앞에서 잘해 보고 싶었는데, 결국 추태만 부린 꼴이 되었다.

오후 내내 연습한 덕에 난 점점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말과의 호흡도 아주 좋았다. 온순한 말은 달리라고 소리치면 빠르게 달려 나갔고 멈추라고 하면 곧장 멈춰 섰다. 휴식 시간엔 말에게 콩깻묵을 먹여 주었다. 축축한 혀로 내 손을 핥을 때마다 간지러우면서도 재미있었다.

갈기를 정리해 주니 말은 기분이 좋은지 머리를 내 어깨에 문질렀다. 말과 장난치고 놀고 있는데, 백장간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따스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곧장 시선을 돌렸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정말 바보 같았다.

난 결국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튼 채 내내 옆모습만을 보였지만,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도 웃고 있는 듯했다.

마음속에 물길이 나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형용할 수 없이 시원하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그의 눈빛 하나. 그것만으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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