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9화
저택으로 돌아와 소라의 허리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때 바깥에서 백 장군이 왔다는 하인의 외침이 들렸다. 서둘러 나가보니 백장간은 이미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역시나,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군주, 오늘 두 승상댁 공자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고요?”
유언비어는 정말 빨리 퍼지는 법이다. 순간 은근한 기대가 일었지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게 왜요?”
그는 왠지 날 한심하게 여기는 듯했다.
“군주, 출가도 하지 않은 여인이 어찌 사내와 함께 밖에서 식사를 한단 말입니까? 남들 눈에 어찌 보였겠습니까?”
나도 할 말은 많았다. 난 그에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장군이 두씨 아가씨를 초대해 뱃놀이를 하는 건 되고, 제가 공자와 식사하는 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는 말문이 막히는지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니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동월은 개방적인 풍조가 강하니 미혼 남녀가 함께 밥을 먹는 것쯤은 큰 문제가 아니지요. 하지만.”
그가 말을 끊더니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리 많은 이들 앞에서 친밀한 행동까지 해선 안 되었습니다.”
이제야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군께선 그 일이 신경 쓰이세요?”
그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후 마마를 생각하셔야지요.”
이것 봐라. 또 이렇게 회피하다니. 그 일이 신경 쓰였다면 패기 있게 말해야지. ‘그래, 이곳에 뛰어올 정도로 신경 쓰이니 앞으로는 어떤 사내와도 만나지 말라’고 말이다. 체면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숙이고 들어갈 마음이 생길 텐데. 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고집스러운 옆얼굴만 보여 주었다. 그가 한숨을 쉬더니, 태도를 바꾸어 나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군주, 군주는 아직 어리니 군주를 가르치는 것도 이 오라버니의 책임…….”
“그만 좀 하세요. 듣기 싫어요.”
귀를 감쌌다. 저 오라버니란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났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군주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럴 땐 제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자꾸만 혀끝에 물렸다. 이대로 그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테지.
“군주, 군주와 황후는 의자매지만 성격은 친자매처럼 비슷합니다. 전 황후가 아주 어릴 때 집을 떠났고, 돌아와 보니 황후는 이미 시집을 간 뒤였죠. 하여 떠나 있는 동안, 황후를 돌봐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킨 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전 황후께서 군주를 이곳에 보내 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똑 부러지고 마음씨 착한 군주를 볼 때마다 황후가 생각나, 군주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쭉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간 잘해 주었던 게 내가 황후 언니를 닮아서였다니. 그는 정말 날 여동생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난 그의 여동생으로 남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의 부인이 되고 싶었다…….
“제가 성격을 바꾸면 절 여동생으로 여기지 않으실 거예요?”
이번엔 그가 멍한 시선을 던졌다.
“성격이 바꾼다고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장군께서는 어떤 성격을 좋아하시는데요?”
“지금 군주의 성격도 좋습니다.”
“제 이런 성격을 좋아하신다고요?”
“예.”
망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내 성격이 좋다면서도 날 여동생으로 여기다니. 우리 둘의 사이에 남매라는 선을 확실하게 그어 주었다. 여기서 내가 성격을 바꾼다면 더는 날 좋아하지 않을 테니 악순환의 굴레였다……. 결국 나는 혀끝에 물렸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제가 군주도 아니고 황후 언니의 의매도 아니라면… 장군께서 절 좋아했을까요?”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놀란 눈치였다. 그의 얼굴 안쪽부터, 붉은 빛으로 천천히 물들더니 귀와 목까지 불그스름해졌다. 얼굴이 붉어져도 이렇게 멋있는 사내가 또 있을까. 곧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군주. 현실을 직시하세요. 만약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래도 만약 그랬다면요?”
뜻을 굽히지 않는 내게, 그는 침묵만을 내밀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에 달린 추는 천천히 커져, 아래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는 내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가 모르는 것도 있었다. 때로는 침묵도 상처가 되었다.
절로 이가 꽉 다물렸다. 쓰고도 아릿한 마음이 마구 솟구쳤고, 나는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급히 발걸음을 돌리자, 곧장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군주, 뛰지 마세요. 넘어집니다.”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내달렸다. 발길이 닿는 대로 뛰다 보니, 어느새 저택 밖이었다. 그는 내가 넘어질까 봐 걱정되었는지 멀찍이에서 소리칠 뿐이었다.
“군주. 뛰지 마십시오. 멈추세요!”
멈추면 웃음거리만 되지 않겠는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와 내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음을……. 단숨에 큰길까지 달려갔다. 쉼 없이 내달리는데 공교롭게도 마부와 마주쳤다. 난 급히 그를 불렀다.
“이봐요, 잠시만요. 저 좀 태워 주세요.”
마부는 곧바로 날 마차에 태워 주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난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가요, 어서요. 누가 절 잡으러 쫓아오니까요.”
마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가 감히 군주 전하를 잡는단 말입니까?”
“어서 가라니까요!”
설명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호통을 쳤고, 마부는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백장간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당장 멈추거라!”
마부는 뒤를 돌아보더니 겁을 내며 말했다.
“군주, 백 장군이십니다.”
난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그게 왜요, 무서워요?”
마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는 고개를 젓더니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대문 앞에 서 있던 백장간의 모습이 빠르게 흐릿해졌다. 마차를 타고 도망치긴 했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묵묵히 마차를 몰던 마부가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군주, 백 장군님과 다투셨습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난 그를 흘겨보았다.
“남 일에 신경 끄시죠.”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군주, 어디로 가실 겁니까?”
“옛집으로 갈 거니까 마을 골목으로 가 주세요.”
그때, 뒤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마부가 흠칫 놀라더니,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군주, 백 장군께서 쫓아오십니다!”
뜻밖에도, 백장간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점점 조급해졌다.
“빨리, 더 빨리 달려요. 잡히면 안 돼요!”
“군주가 아니십니까. 백 장군께서도 감히 군주 전하를…….”
“절 죽일 거라고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 말에 깜짝 놀랐는지, 마부는 채찍을 휘두르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계속 마음을 억누르고 참다간 정말 백장간 때문에 화병이 나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마부가 제법 거리를 벌린 듯했지만, 백장간의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마부가 나를 바라보았다.
“군주, 앞으로 오십시오.”
그의 의중을 알 순 없었지만, 적어도 날 해칠 사람은 아닐 터였다. 난 천천히 끌채 위를 기어 그에게 다가갔다. 마부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조금 어두웠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주, 제 허리를 잡으십시오.”
“…….”
“어서요.”
강한 어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마부는 손을 더듬어 마차와 연결되어 있던 고리를 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랴!”
커다란 마차는 그의 재빠른 손동작 몇 번에 분리되었고, 순식간에 뒤로 굴러갔다. 마부는 뜻밖에도 숨은 고수였나 보다!
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비범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사람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부에게 한 고백도 그리 흑역사는 아닌 듯했다.
마차가 분리되니 말은 더 가볍고 빠르게 지면을 박찼다. 백장간은 굴러오는 마차를 피해야 하니 자연히 속도를 줄일 테고, 덕분의 우리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기세등등해진 난 뒤를 돌아보고 그를 약 올리듯 손을 흔들었다. 그는 열이 받았는지 곧장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붕새가 날아오르는 모양처럼 그가 하늘을 날아 내게 달려들었다. 맙소사!
“더 빨리요!”
아무리 비범한 마부라도,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그는 백장간이 날 끌어내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붕새에게 붙잡힌 힘없는 병아리와 같았겠지.
백장간은 안정적으로 착지했으나, 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백장간이 서둘러 날 안아 올렸다. 하지만 동시에 팔을 길게 뻗어 날 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정말 교활한 여우가 따로 없었다. 팔다리가 짧으니, 그를 때리고 싶어도 때릴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내려놔요!”
그가 순순히 나를 땅 위에 세워 놓았다. 겨우 발을 땅에 디딘 난 긴 한숨을 쉬고 그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백장간도 화를 냈다.
“그건 내가 할 말입니다. 도망은 왜 칩니까? 내가 때리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혼을 냈어요?”
“내가 도망치든 말든, 장군이 왜 쫓아와요?”
“난 군주의 오라버니니까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오라버니는 개뿔!”
“군주는 폭언을 해선 안 됩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전 황후 언니보다 거친 성격이에요. 언니는 승상 저택에서 자랐지만 전 마을 골목에서 자랐거든요. 욕을 하는 것도 뒹굴면서 싸우는 것도 하나도 거리낄 게 없어요!”
내가 강하게 나가니, 백장간이 한결 나긋해진 목소리를 냈다.
“우리 싸우지 맙시다, 군주. 그만 이 오라비와 같이 돌아갑시다.”
“난 안 가요.”
말끝마다 오라버니! 부아가 치민 나는 멍하니 지켜보던 마부를 가리켰다.
“저자한테 시집갈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