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38)화 (637/1,192)

제638화

종업원은 우리를 별실로 안내했다. 사실 조금 부끄러웠다. 늘 먹을 줄만 알지 음식 이름은 하나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라가 눈치 빠르게 주문을 맡았다. 종업원이 자리를 뜨자 소라에게 물었다.

“호수와 맞닿은 별실이라는 건 무슨 의미야?”

소라가 명쾌하게 말했다.

“예쁜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 다른 별실보다 비싸단 말이지요.”

난 그제야 의미를 깨달았다.

창가에 기대 풍경을 바라보니, 호숫가에는 버드나무가 한들거렸다. 푸른 잎이 그늘을 만들어 멀리서 보면 초록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했다. 호수는 맑고 깨끗했으며, 햇살을 머금은 금빛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다.

더 멀리 보이는 풍경을 빼곡히 피어난 연꽃이 메우고 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연꽃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두씨 아가씨는 그 후로 어찌 되었을까? 아마 날 죽도록 증오하고 있겠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문득 사방이 너무 조용했다. 방 안을 둘러보니 소라는 보이지 않고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복도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밖으로 나가 보려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딘가 낯이 익은 사내였다. 소라는 사내 옆에 서서 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난 늘 백장간만 마음에 담아 두었기에, 다른 사내들은 빨리 잊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 사내 또한 내 기억에서 사라진 이였나 보다.

“군주,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그는 허리를 숙이고 읍하며 내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가 허리를 펴고 그윽한 눈매로 날 바라보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야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아, 두 공자셨군요.”

난 허리를 꼿꼿이 펴고 군주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키가 너무 커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리 공교로울 데가.”

“그러게 말입니다.”

그가 따스한 미소를 보냈다.

“군주와 제가 아주 깊은 인연인가 봅니다.”

“공자께서도 식사를 하러 오셨나요?”

“예,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왔습니다.”

“아, 그럼 어서 가 보세요. 친구들이 기다리겠어요.”

“……하하, 괜찮습니다. 이리 어렵사리 군주를 뵈었으니.”

그가 고개를 돌려 소라를 바라보았다. 소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조용히 말했다.

“군주와 잠시 나눌 말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군주와 단둘이 나눌 수 있겠소?”

“괜찮아요. 내 사람이니까.”

두형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금세 눈가에 기쁨이 번졌다.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한 말이라고 오해한 듯했다. 내 말은 소라는 내 사람이니까 함께 들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나는 가장 비밀스러운 것까지 소라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니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두형 같은 자와의 대화를 위해 굳이 그녀를 내보낼 필요가 없었다.

“군주.”

그는 날 부르자마자 얼굴을 붉혔다.

“군주께선 그간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혼자 지레짐작으로 이런 지경까지 와버렸단 말인가? 저자가 나에게 무슨 존재이길래, 내가 왜 저자를 보고 싶어 해야 한단 말인가?

“전 공자와 안면만 텄을 뿐인데 어찌 보고 싶었겠습니까.”

내가 창밖을 가리켰다.

“단순히 얼굴만 아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다 보고 싶어 해야 합니까?”

두형은 내 공격에도 껄껄 웃었다.

“제가 그 사람들과 같겠습니까? 전 군주와…….”

그는 소라를 힐끔 보더니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모호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용없었다. 그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소라는 내 가장 큰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백장간 외에 어떤 사내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건, 소라가 잘 알았다.

두형은 제법 눈치가 있는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문을 닫은 소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을 뗐다.

“군주, 두 공자의 행동을 보아하니 의도가 너무 뻔합니다. 혹…….”

“나도 알아.”

난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가 똑똑하진 않아도 바보는 아니거든. 지난번 두부에서 대놓고 날 함정에 빠뜨린 거야. 내 소매를 찢고 옷깃까지 잡아당겼는데, 사람들까지 때맞춰 나타났잖아. 게다가 곧장 날 책임지겠다고 하고 말이야. 그때 내가 맞서지 않았던 건 백 장군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는 거였어.”

저절로 냉소가 흘러나왔다.

“두 승상이 머리는 잘 굴렸네. 딸은 백 장군, 아들은 군주랑 혼사를 치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잖아. 부귀는 하늘을 찌를 테고 말이야.”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자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됩니다. 역대 황조에서도 외척 세력이 너무 강하면 늘 문제가 생겼어요.”

그녀의 말이 꽤나 뜻밖이었다.

“그런 것도 알고 있던 거야?”

소라가 멋쩍게 웃었다.

“그저 주워듣거나 연극을 본 것입니다. 연극에는 별의별 내용이 다 나오거든요.”

그제야 소라의 방대한 식견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난 황후 언니처럼 규율을 싫어했기 때문에 늘 소라와 함께 밥을 먹었다. 마음이 넓은 소라도 나와 음식을 먹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마 남들 눈에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자매처럼 보일 터였다.

음식 맛은 아주 훌륭했다. 맛있는 음식에 기분은 좋아졌지만, 갑작스레 많은 양을 먹은 탓인지 연달아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소라는 자신이 딸꾹질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며 내 뒤로 걸어가더니 한 손으로 등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목을 조였다. 이렇게 숨을 참다가 자신이 소리를 지르면 그때 숨을 내쉬라고 했다.

난 숨을 참았고 소라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소라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가 언뜻 보고 놀라서 소라를 걷어찬 것이다. 난 황급히 소라를 바라보았다.

“소라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소라는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씩씩댔다. 난 고개를 돌려 두형을 쏘아보았다.

“왜 소라를 찬 거죠?”

두형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군주 전하, 저 애가 방금 군주께 해선 안 될 짓을 했잖습니까!”

“해선 안 될 짓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요!”

난 소라를 일으켜 의자에 앉힌 뒤 허리를 문질러 주었다.

“걸을 수 있겠어? 어서 가자. 의원을 불러야겠어.”

소라는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주 전하, 전 괜찮습니다.”

난 눈을 부릅뜨며 두형에게 말했다.

“두 공자님, 우리 소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간, 가만두지 않겠어요.”

두형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군주님, 전 그저 군주께 못된 짓을 하길래…….”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내 딸꾹질을 멈추려던 거였다고요.”

더 이상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소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두형은 뒤를 따라오며 조용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군요. 소라 아가씨에게 약값을 변상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약값뿐만 아니라 소라가 고생하는 몫까지 전부 보상하세요.”

두형이 물었다.

“어찌 보상하면 될까요?”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만약 누가 은자 열 냥을 줄 테니 당신을 칼로 한 번 찌르게 해달라면 그리할 거예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하지 않겠지요.”

“백 냥은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천 냥.”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만 냥.”

“찔리면 죽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저 피만 볼 거예요. 가벼운 상처만 남을 거고요.”

“그럼 상관없지요.”

그가 선뜻 대꾸했다.

“그 정도 통증이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난 피식 웃고 말았다.

“사내가 칼로 한 번 찔리는 건 방금 소라가 당신에게 발로 차인 통증과 같아요. 이제 얼마를 보상해야 하는지 잘 아셨겠지요.”

두형은 입을 쩍 벌리더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난 짐짓 안색을 굳혔다.

“못 주시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군주께서 원하신다면 더 많은 돈도 드릴 것입니다.”

그래? 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이 말을 고쳐 주었다.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 소라가 원하는 만큼 주셔야지요.”

힐끔 보니 소라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게 아무래도 또 웃음을 참느라 힘에 부친 듯했다. 우린 두형을 뒤로하고 얘기를 나누며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차분히 걷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난데없이 몸이 앞으로 기우뚱 쏠렸다. 두형의 비명이 들려왔다.

“군주님, 조심하십시오!”

그는 몸을 날려 나를 품에 안았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그가 우아하게 몸을 틀며 바닥에 착지했다. 일 층에 있던 손님들은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두형은 나를 놓아 주고는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마 모든 이들이 날 향한 그의 깊은 마음을 보았을 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나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참 똑똑한 자였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극도 꾸밀 줄 알고. 나와 자신의 관계를 널리 알리려는 걸 내가 모를까? 또한 그가 보상한 만 냥은 조만간 내 혼수와 함께 다시 돌아오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을 테지.

역시 제 아비를 닮아 머리를 잘 굴렸다.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계단 위에 있던 소라가 멍하니 지켜보다 조용히 사죄를 올렸다.

“다 제 탓입니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군주를 곧장 붙잡았을 텐데요.”

난 눈빛으로 그녀를 달랬다. 소라가 다치지 않았어도 두형은 그녀가 날 붙잡게 두지 않았으리라. 돌아가는 길, 소라를 가마에 앉히고 내가 걸어가려 했지만 소라는 극구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함께 비좁은 가마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울상이 된 소라가 말했다.

“이제 어떡합니까? 다들 그 모습을 보았으니 분명 오해를 할 겁니다. 황후 마마께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분명 혼삿날을 정해 주실 거예요.”

“우선 상황을 지켜봐야지.”

난 담담하게 소라를 위로했다.

“이렇게 죽으란 법은 없어.”

“방금 그 일은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어찌 갑자기 넘어지신 거예요?”

“두형이 꾸민 일이야.”

난 냉소를 지었다.

“지난번 그 수법을 다시 쓴 거지. 두부에서는 본 사람이 몇 없었지만 이번은 달라. 백성들이 틈날 때마다 우스갯소리로 이 일을 꺼낼 테니까.”

소라가 이를 꽉 깨물었다.

“정말 돼먹지 못한 자군요. 여론을 만들어 자신을 따르게 하려는 거잖아요.”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난 소라를 향해 웃어 주었다.

“난 명예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거든. 차라리 군주를 안 하고 말지. 군주 신분이 사라지면 그자도 더는 날 귀찮게 굴지 않을 거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던 소라는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아, 하지만 백 장군님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합니까? 오해하실 거 아닙니까!”

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장군이 못 들을까 봐 걱정인걸. 며칠이나 날 피해 다녔는데, 여기서 더 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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