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7화
“왜 제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거예요.”
새삼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무서운데요?”
“무서운 것 없습니다.”
그가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저 군주께서 선을 넘지 않길 바라는 것뿐이지요.”
무슨 선? 난 냉소를 머금었다. 늘 지겹도록 하던 얘기겠지. 그는 오라버니, 난 여동생이니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상도常道에 어긋난다는 얘기. 어쩌면 그는 이 촌뜨기 군주가 마음에 안 차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라의 말대로 철판을 깔고 그에게 들러붙을 생각이었지, 당장 내 속내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술을 마신 탓에 마음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결국 이런 대치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조금이나마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더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직설적으로 날 거절한다면,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다 한들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결국 난 발걸음을 돌렸다. 휘청거리는 걸음 탓에 탁자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니, 그가 황급히 달려와 날 일으켰다.
“어딜 부딪혔습니까?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이 가장 싫었다. 정말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무엇 하러 이런 친절하게 대한단 말인가?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날 더 힘들게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난 이를 악물고 또다시 뻔뻔하게 그에게 기댔다.
“장군, 저 좀 데려다주세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백장간은 날 안아 올리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열린 문 너머에는 하인 몇 명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니 멀뚱히 서 있던 하인들은 갑작스레 바닥을 쓸거나 기둥을 닦고 꽃에 물을 주었다. 소라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는데, 땅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난 백장간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웃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은 탓에 어렴풋한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결엔 옅은 꽃향기가 섞여들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나는 반쯤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검게 빛나는 그의 눈망울엔 꼭 어슴푸레한 빛이 흐르는 듯했다. 좀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기 힘든, 깊이가 있는 눈이었다. 시선을 그의 턱으로 옮겼다. 둥근 윤곽이 참 예뻤다. 난 참지 못하고 가볍게 그의 턱을 쓸어내렸다.
그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내리고 날 바라보았다. 절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술에 취했으니 무슨 짓을 해도 모를 테지. 그는 뜻밖에도 미소를 짓더니 나를 조금 더 위로 들어 올리며 나무랐다.
“주정뱅이.”
맙소사. 난 그가 이런 표정과 말투로 나를 대하는 게 너무 좋았다. 응석받이로 여기는 것도 같고, 조금은 자포자기한 것 같기도 했다.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뛰었다. 당장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손을 천천히 그의 어깨에 가져갔다. 그는 날 힐끔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묵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그가 날 땅에 내던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결국 내 손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가 그의 목에 가까워졌다. 내게 닿은 몸이 뻣뻣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었는지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계세요.”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얌전히 얌전히 눈을 감고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으니, 백장간은 제법 익숙하게 침대에 날 내려놓고 이불도 덮어주었다. 난 눈을 감은 채 그를 불렀다.
“장군.”
그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반쯤 눈을 뜨고 더 작은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불렀다.
백장간이 허리를 숙이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까이에서 들으려는 듯했다. 그때, 나는 그의 목을 감싸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긴장하고 당황한 탓에 너무 힘껏 부딪힌 나머지 앞니까지 맞닿았고 달곰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그는 멍하니 서 있었지만, 난 재빨리 팔을 풀고 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아무리 취기를 빌렸다지만, 과하다 싶기도 했다. 낯짝이 두껍다 한들, 나는 이미 선을 넘었다. 부모님이 아셨다면 무덤을 뚫고 나와 날 호되게 때리셨을지도 모른다. 사내가 여인을 희롱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여인이 사내를 희롱하는 게 흔한 일이던가?
정신을 차렸는지, 백장간이 쏜살같이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다.
이튿날,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갔지만 백장간은 멀리서 날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자리를 피했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어물쩍 넘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그런 짓을 했으니 날 더 싫어하겠지. 어쩌면 속으로 하찮게 여기며 분수도 모른다고 비웃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리 예쁘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얼굴도 그저 그렇고 몸매는 날씬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빼어난 것도 아니었다. 군주라고 해도 행동은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황제 앞에서 조금 주눅이 드는 것 말고는 어디에서나 제멋대로 행동했다. 저택의 노비들마저도 뒤에서 군주 같지도 않은 군주라고 부를 정도였다.
슬슬 어제의 일이 후회되었다. 너무 충동적이었다. 백장간이 그 일로 날 피한다면,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차라리 옛집을 수리해서 이사를 가는 편이 나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매일 그와 마주친다면 얼마나 더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를지 나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 * *
며칠이나 백장간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날 피하기도 했지만, 나도 굳이 그를 찾아가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매일 후원에서 활 쏘는 연습을 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점점 그럴싸하게 쏘았다. 소라가 옆에서 눈을 반짝였다.
“이번 봄 사냥 땐 분명 아주 큰 놈을 잡으실 겁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예전 봄 사냥 때 황후 언니가 호랑이를 잡았던 것과는 견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사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한참 연습을 하고 나니 팔이 조금 뻐근했다. 소라에게 가마를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오랫동안 옛집을 가지 않았으니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옛집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간 공사가 완전히 중단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에 화를 참을 길이 없었다. 난 바로 공사 책임자를 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공사비만 받고 일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
책임자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이젠 하다 하다 공사 인부마저 날 업신여긴단 말인가? 이 군주가 그리 호락호락할 줄 알고?
난 모처럼 신분을 내세워 엄하게 호통을 쳤다.
“지금 본인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아는가? 감히 황상께서 친히 봉하신 군주의 분부를 태만히 하다니, 담이 제법 크구나. 이 일을 황상께 고해 네 죄를 묻겠다!”
책임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무릎을 꿇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군주 전하, 소인 억울하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전 그저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상부는 무슨 상부?”
“소인도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우선은 공사를 중단하고 나중에 다시 지시를 내리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집인데 내 말을 따라야지 어찌 상부의 말을 따른단 말이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자더냐?”
책임자는 땀범벅이 된 얼굴로 입술을 꿈틀대더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업신여김을 받던 과거가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 절로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난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대신 분부를 내렸다.
“되었으니 어서 공사를 재개하거라. 딱 열흘을 줄 것이야. 열흘 안에 완공하지 못하면 그때 죄를 묻겠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인부들을 불러모았다. 난 쓸쓸한 방 안을 잠시 거닐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내게는 친근한 곳이었다. 아무리 신분이 변해도, 마음만큼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책임자가 인부들을 불러 공사를 시작하는 걸 보고 난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저택에 돌아가고 싶진 않아 소라와 잠시 거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가마꾼은 멀찍이에서 우리를 따라왔다. 소라와 나는 금성대로의 시장을 거닐었다. 도중에 초왕의 저택을 지나기도 했다.
잠시 멈춰서 바라보니, 보초병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황제가 잠룡 시절 머물던 관저인데, 지금은 무슨 용도로 쓰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빤히 저택을 바라보니 문 앞을 지키는 보초도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난 소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저택에는 아무도 살지 않을 텐데, 왜 보초를 세워 두는 거지?”
소라가 말했다.
“황상께서 예전에 사시던 곳이니 의미가 크잖아요. 안에 있는 것들도 전부 예전 모습 그대로 두고 백성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하려는 거죠.”
난 입을 삐죽거렸다. 넓디넓은 황궁에 살고 있으면서 이렇게 큰 왕부도 남겨두다니. 정말 낭비였다. 거리에 모여 있는 걸인들에게 안식처로 제공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속으로 황제를 험담하는 것도 대역죄에 속했다.
그때,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올라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실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장군 저택의 식사도 아주 훌륭한데, 무엇 하러 은자를 낭비한단 말인가. 밖에서 음식을 사 먹고 싶다가도 돈을 생각하면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밖에서 음식을 사 먹지 않는 건 그만큼 가난했던 옛 습관이 몸에 밴 탓이었다.
오늘은 그 습관을 깰 작정이었다. 돈도 있고 신분도 높은데 다른 이들처럼 편하게 사 먹지 못할 게 뭐람? 난 소매를 힘껏 털며 소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아가씨, 몇 분이십니까?”
소라가 내 앞을 막아섰다.
“위층에 별실이 있습니까? 저희 아가씨는 조용한 걸 좋아하셔서요.”
“예, 예. 있습니다.”
종업원은 더 격하게 반기며 위층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호수와 맞닿은 별실이 있는데 풍경이 아주 예쁘지요. 그 방으로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잘 몰라 소라만 바라보았다. 소라는 시녀였지만 나보다 아는 것이 많으니까.
“네. 호숫가 별실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