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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36)화 (635/1,192)

제636화

내 키가 작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지만, 난 그가 직접 가르쳐 준다는 말에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역시 낯짝이 두꺼우니 좋은 점이 많았다. 난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정말요?”

“당연히 정말이지요.”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허리를 껴안고 품에 파고들었다.

“장군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가 태도를 바꾸기 전에 난 서둘러 손을 풀었고 붉게 물든 얼굴로 달려가며 연신 환호를 내질렀다.

“이제 나도 사냥할 수 있다!”

백장간은 하인들을 시켜 후원에 과녁을 세웠다. 그리곤 어디에서 났는지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활을 내게 건네며 시위를 당겨보라고 했다.

머리를 굴린 난 활시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올리고 활을 들었다. 입은 잔뜩 힘을 주었지만 손에는 조금도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장군, 못 당기겠어요.”

“힘을 좀 더 주세요. 시위가 그리 팽팽한 편은 아니니까요.”

난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잔뜩 힘을 주었다. 이까지 꽉 깨물었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또다시 그를 바라보며 불쌍한 척했다.

“장군, 정말 안 되는걸요.”

백장간은 어쩔 수 없이 내 몸 뒤로 다가와 기다랗고 탄탄한 팔을 내 어깨 위로 뻗었고, 시위를 당기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감싸니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으련만,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실리고 말았다…….

‘뚝!’ 소리와 함께 시위가 끊어졌다.

“…….”

백장간이 말했다.

“팽팽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내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사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 중에 힘이 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백장간이 그의 활을 건넸다.

“군주는 힘이 센 편이니 이 활을 써 보세요.”

난 울상이 된 채로 활을 받아 시위를 당겼다. 이번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당길 수 없었다. 차마 이번까지 말을 할 수는 없어, 그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진짜처럼 보였는지, 그는 다시 한번 다가와 날 도와주었다.

이번에도 그는 내 뒤에서 팔을 뻗고 내 손을 감싸 쥐었다. 힘껏 팔을 뒤로 당기니 몸 전체가 그의 품에 폭 파묻혔다. 등이 그의 가슴과 맞닿자, 그의 심장 소리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내 등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도 느꼈는지 난데없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 반동으로 난 활과 함께 몸이 쏠렸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데, 그가 반사적으로 날 감쌌다. 공교롭게도, 그의 손이 감싼 곳은 내 빈약한 가슴이었다. 그는 말벌에 쏘인 것처럼 몸을 흠칫 떨더니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결국 난 흉한 꼴로 바닥에 고꾸라졌고, 얼굴은 땅에 붙어 버렸다. 그가 황급히 다가와 날 일으켰다.

“군주,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난 꾀죄죄해졌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게요? 날 넘어뜨린 거요? 아님 가슴을 만진 거요?”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그, 만, 만지지 않았습니다…….”

백장간은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타오를 듯했다. 가슴이란 단어는 내뱉지도 못했다.

난 고개를 숙이고 흙이 묻은 치마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먼지 터는 것도 안 도와주실 거예요?”

그가 흠칫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치마를 털어 주려다 한쪽에 서 있는 소라를 불렀다.

“어서 군주의 옷을 털어드리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소라는 얼굴이 자줏빛이 되어 있었다. 꾸물대며 걸어오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웃음을 참은 나머지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간 내 수많은 추태를 함께 지켜봤으니 익숙해질 법도 한데, 소라는 아직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직접 먼지를 털었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백장간도 더는 날 가르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읍했다.

“오늘은 군주께서 많이 놀랐을 테니 다음에 다시 가르쳐 드리지요.”

이렇게 자그마한 일에 무릎을 꿇다니, 참 가소로웠다. 가슴을 만져진 사람도 나고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먼지를 뒤집어쓴 것도 나인데. 내가 그에게 화라도 내던가?

“장군, 괜찮습니다. 계속 가르쳐 주세요.”

백장간은 울상이 되었다. 아마 넌 괜찮아도 난 안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음에 하시지요. 군주의 활도 고장 났으니 고쳐 놓으라고 분부하겠습니다.”

“장군 걸로 쓰면 되잖아요?”

백장간은 괴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꼭 내가 그에게 올가미를 씌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의 예상이 맞았다. 난 그에게 파렴치하게 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기에 더는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소라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내 의도를 꿰뚫어 본 것 같지 않아?”

소라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알라고 하십시오. 어쨌든 군주이신데 백 장군님도 어찌하진 못하실 겁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신분을 이용해서 위세를 부리고 싶진 않아.”

소라가 태연히 답했다.

“이게 무슨 위세를 부리는 것입니까. 그저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것뿐이라고요. 왜 옛말에 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난 소라를 흘겨보았다.

“내가 맨발이라는 거야?”

소라는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눈빛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래, 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맨발 신세였다. 대부호 집안의 천금 같은 딸들은 조신하고 신중했지만, 나처럼 가난한 집 딸들은 아니었다. 체면은 내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마부에게 고백까지 했지. 백장간을 이리 대하는 것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 날 가르쳐 주러 온 사람은 백장간이 아니라 그의 수하인 참령 풍천괴馮天魁였다. 이름처럼 크고 우람한 덩치에 눈매도 짙었다. 하지만 내게 아주 공손하게 대했고 늘 적절한 거리를 두었다. 그의 가르침이 제법 마음에 든 나는 진지하게 임했다.

시위가 끊어졌던 활은 내 힘에 맞게 고쳐진 덕에 손에 잘 맞았다. 활쏘기를 배우다 보니 나도 황후 언니처럼 무예에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배워 보니 정말 좋았다. 더 기뻤던 건, 앞으로 백장간과 공통의 관심사가 생겼다는 점이다.

난 제법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금방 실력이 늘었다. 처음 몇 발은 행방을 알 수 없었지만, 조금씩 과녁에 활을 맞히기 시작했다. 풍천괴는 내가 이쪽 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에게 상으로 금자를 내리려 했지만, 그는 무릎을 꿇으며 본분을 다한 것이니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때로는 거절이 상처가 되기도 했다. 난 그의 거절에 기분이 조금 상했고, 직접 그를 일으켜 금자가 든 주머니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니, 어리석은 게 아니던가? 그렇게 풍천괴와 옥신각신하는데, 갑자기 반월문 쪽에서 매서운 호통이 들려왔다.

“풍천괴!”

풍천괴는 질겁한 얼굴로 달려가더니 그의 앞에서 예를 갖췄다.

“장군!”

백장간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물었다.

“무얼 하는 것이냐?”

“군주께서, 그러니까 군주께서…….”

“군주께서는 무슨, 썩 물러나거라!”

“예!”

풍천괴는 잔뜩 긴장한 채 서둘러 물러났다. 백장간은 뒷짐을 지고 다가와 내가 든 금자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군주, 풍천괴에게 상을 주시려 했습니까?”

“안 그럼요?”

난 주머니를 흔들었다.

“소리 들리세요? 듣기 좋죠?”

“군주께 활쏘기를 알려 드리는 건 그자의 본분이니 군주께서 상을 내릴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군주의 모든 지출은 제가 도맡아 관리합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차였는데, 그의 말이 달콤하게 들려왔다. 내 지출을 자신이 도맡는다니, 하면 앞으로 나도 그가 도맡아 책임진단 말인가? 난 눈을 깜박였다.

“알겠어요. 장군 말대로 할게요.”

그는 내가 별안간 순순히 따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장간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럼 그만 쉬시지요. 전 가 볼 테니.”

나는 얼른 그를 붙잡았다.

“장군, 함께 식사하고 가지 않으실래요?”

그는 내가 또 그를 귀찮게 할 것 같았는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 됩니다. 군주께서 또 술을 마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차마 뒷말은 뱉지 못했다.

‘술에 취해 또 술주정을 부리면…….’

* * *

백장간이 겁을 먹을수록, 난 더욱 과감해졌다. 이미 그와의 거리감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가슴 속에 지펴진 불은 보통 여인의 마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은 도적이었다면, 진작에 그를 납치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술에 취할까 봐 함께 밥을 먹으려 하지 않았지만, 난 기어코 술에 취해 그를 찾아갔다. 칠 할은 흐리멍덩하고 삼 할은 정신이 있는 상태였다.

얼굴이 홧홧한 채로, 그의 처소로 달려갔다. 서재에서 하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내가 비틀거리며 들어가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 쪽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하인은 처음 보는 모습인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백장간이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하인에게 호통쳤다.

“어서 물러나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하인은 황급히 방을 나갔지만, 하인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저 하인의 공을 인정해 금자를 상으로 내릴 생각이었다.

백장간은 얼굴을 굳힌 채 소매를 털며 군자다운 모습으로 물었다.

“군주, 술을 마셨습니까?”

“네. 장군께서 저랑 밥을 안 드시니, 술을 마셨습니다.”

백장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함께 먹었다면, 술을 안 드셨을 겁니까?”

“물론이지요. 장군께서 마시지 말라고 하면 안 먹을 겁니다.”

난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장군 말이라면 잘 듣잖아요.”

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나와 거리를 두었다.

“군주, 대체 무얼 하려는 겁니까?”

무얼 하긴, 얼굴에 철판을 깐 기간이 얼마인데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저택의 하인들도 전부 아는 일을 어째서 당사자는 모르는 척이람.

“백장간.”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는 미간이 볼록 튀어나올 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 위아래도 없이. 장군이나 오라버니라고 부르세요.”

“부하들이나 당신을 장군이라 부르고, 진짜 여동생이어야 오라버니라고 부르지요. 전 당신의 부하도, 여동생도 아닌데 어째서 이름을 부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장간, 정말 저를 안…….”

“군주.”

그가 갑작스레 내 말을 끊었다.

“취했으니 그만 돌아가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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