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5화
백장간은 재빨리 물에 뛰어들었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아가씨에게 헤엄쳐 갔다. 나는… 손발에 힘을 뺐다. 정말 이대로 물에 가라앉고만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 날 구해 주었다. 노를 젓던 하인이었다. 그는 황급히 내 허리를 감싸려 했다.
누가 구해 달랬나?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인걸. 난 그를 발로 차며 매섭게 호통을 쳤다.
“꺼져!”
입에 들어오는 물을 내뿜으니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축축해진 머리카락은 얼굴에 다 달라붙었고 난 보지 않아도 내 꼴이 어떨지 알 수 있었다. 하인은 차마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두씨 아가씨를 뭍에 옮긴 백장간이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어서 모셔오너라!”
모셔오긴 개뿔! 나는 재빨리 물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라앉자 뭍에선 야단이 났다.
“어서 군주를 구하래도, 어서! 군주가 물에 가라앉잖느냐!”
하인도 나를 따라 잠수를 했지만 난 하인이 떠받칠 수 없게 물속에서 소리 없는 전투를 벌였다. 아마 밖에서는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수면만 보였을 테지. 마침내 백장간이 내게 헤엄쳐 왔고 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그렇게 난 장군에게 안겨 뭍으로 옮겨졌다. 물속에서 힘을 잔뜩 뺀 탓에, 나는 손발을 축 늘어트리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뭍으로 나오자 노비들이 나를 받아들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백장간은 계속 날 품에 안은 채 후원으로 향했다. 두씨 아가씨는 홀로 그 자리에 남겨졌다. 물론 집사가 함께 있으니 뒷일을 잘 처리했으리라.
백장간은 급한 발걸음으로 날 방에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침대에 내려놓은 게 아니라 바닥에 내버렸다. 시녀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배어 있었다.
바닥에 날 팽개치다니! 안 그래도 몇 차례나 화를 꾹꾹 참고 있었는데,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난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담이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귀한 신분이니 예전엔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난 그에게 삿대질을 해 주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요?”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도 나고 억울했다.
“물에 빠졌는데 이렇게 거칠게 대해야겠어요?”
“본인이 자초한 일 아닙니까? 어째서 두씨 아가씨를 물에 빠뜨린 겁니까?”
얼굴로 열기가 훅 밀려왔다. 그래, 내가 아가씨를 밀친 거였다. 하지만 나도 몸을 날려 함께 빠지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녀가 먼저 날 밀친 거였다. 그저 날 빠뜨리진 못했을 뿐. 설마 그건 못 봤단 말인가?
“나이가 어리니 그간 불필요한 말들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군주가 잘못한 겁니다.”
그는 잠시 뒤 어두워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군주, 오늘 일은 정말 실망입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울분이 터지고 말았다. 차라리 다시 한번 호수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뭘 어쨌다고 실망을 해? 그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호수에 빠뜨려서?
백장간은 천천히 붉어지는 내 눈시울을 바라보더니 결국 노비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다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군주의 목욕 시중을 들래도!”
말을 마친 그가 밖으로 향했다. 난 입술만 깨물다 축축하게 젖은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거기 서!”
백장간은 내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감정이 격해진 탓일까,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최대한 진정한 뒤,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가씨는 구해주고 난 안 구해 준 거죠?”
그는 내 눈빛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절로 긴장이 되었다. 만약 그가 이 자리에서 두씨 아가씨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다면, 난 단칼에 마음을 접으리라. 그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군주는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아가씨는 못 하니까요. 아가씨를 구하지 않고 물에 빠져 죽게 놔둬야 했습니까? 승상의 천금 같은 딸이 장군의 저택에서 익사한다면, 황후께 얼마나 큰 폐를 끼치는 것인지 알기나 합니까?”
이게 바로 소인배와 대인배의 차이였다. 난 영원히 그의 발뒤꿈치만큼도 못 쫓아가겠지. 그는 팔백 리보다 더 먼 곳까지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가씨를 익사시킬 생각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정말 급했다면 나라도 그녀를 구했을 것이다.
“내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본인이 직접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요?”
“지난번에 취했을 때, 수영 시합을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억 안 납니까?”
기억을 되짚어 보던 난 얼굴을 붉혔다. 그제야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사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신발을 만들거나 수영밖엔 없었다.
도성에 살기 전, 집 근처에 하천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수영을 배웠다. 어머니 말로는 두 살짜리가 배두렁이만 입은 채 종일 수영만 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번 취기를 빌려 수영 시합을 하자며 그를 억지로 끌고 갔다. 하지만 그는 늦은 밤이라 불가능하다고 했고 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생떼를 썼다. 결국 소매가 찢겨 나갔다. 옷이 뜯겨나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소라가 재빨리 나를 데려갔다. 술이 깬 뒤에 소라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난 후원의 문을 전부 걸어 잠갔다.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금세 잊어버리는 성격 탓에 그 일은 금방 기억 속에서 지워졌고 난 또다시 생글거리며 그와 승상의 저택을 찾았던 터였다.
그가 짚어 주니 저절로 할 말이 없어졌다. 조용히 목욕을 하러 가려는데, 그가 갑작스레 벌컥 화를 내며 소라에게 호통을 쳤다.
“멍하니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군주를 데려가 씻기래도. 감기라도 들면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깜짝 놀란 소라가 황급히 나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욕통에 엎드리니 소라가 내 등을 닦아 주었다.
“군주, 제가 볼 땐 그래도 희망이 있는 듯합니다. 장군께서 저리 긴장하시잖습니까.”
난 축 늘어진 채 답했다.
“하지만 아가씨를 먼저 구했잖아.”
“그러게 왜 수영은 할 줄 아셔서. 수영을 못하셨다면 분명 군주를 먼저 구하셨을 겁니다.”
“네 말이 다 맞아.”
난 손바닥을 펼쳤다 다시 천천히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백장간에게 안겨 있을 때 너무 세게 움켜쥐었던 것 같았다.
“네 말대로 하려고. 장군 곁을 맴돌면서 귀찮게 할 거야.”
“그리하셔야 한다니까요.”
소라가 맞장구를 쳤다.
“사내가 여인을 쫓아다니는 것보다 여인이 사내를 쫓아다니는 게 훨씬 쉽게 이어지는 법입니다. 식은 죽 먹기라니까요.”
난 고개를 돌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쉽네. 식은 죽이라면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지.”
“…….”
나중에 안 사실인데, 백장간은 내 처소를 떠난 후 아가씨를 따로 찾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하인들을 시켜 옷을 갈아입힌 후, 저택에 보냈다는 말만 들었다.
다만 백장간에게 치근덕거리려는 내 계획도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는 아직도 화가 난 것인지 날 볼 때마다 쌀쌀맞게 대했고,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아주 먼 사이처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예전부터 권력이 막강한 자들을 무서워했던 난 그의 모습에 자연스레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당장 무릎을 꿇고 그에게 대장군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군주,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저, 아니, 그게.”
괜스레 긴장이 되어, 난 너른 소매 안에서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식사는 하셨어요?”
“했습니다.”
“아. 드셨으니 다행입니다.”
“식사를 했는지 물으러 온 겁니까?”
“네. 안 드셨으면 제 처소에서 함께 드시자고 하려 했습니다.”
“군주는 아직 안 드셨습니까?”
“먹긴 했는데 아직 조금 남아서요.”
“…….”
얘기가 딴 길로 샜다는 생각에 서둘러 화두를 돌렸다.
“그럼 이제 무얼 하실 거예요?”
“곧 춘위春圍(봄 사냥)가 있어 황상께서 제게 일정을 정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난 곧장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조금 바쁘니 별일 아니면 그만 물러나라는 것이겠지. 그가 뒷말을 내뱉기 전, 나는 철판을 깔고 그에게 물었다.
“춘위가 사냥을 말하는 것이죠?”
“예.”
“저도 데려가 주실 수 있어요?”
“말을 탈 줄 아십니까?”
“아뇨.”
“활은 쏠 줄 아십니까?”
“아뇨.”
“그럼 가서 무얼 하려고요?”
당신이 가니까, 나도 가고 싶은 것이지. 난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사냥을 좋아하거든요.”
백장간은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사냥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찌 좋아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있는 곳이니까 좋아하지.
“재미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좋아해요.”
“…알겠습니다.”
백장간은 결국 내 생떼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제게 말해도 소용없으니 황후께 찾아가 말씀해 보십시오. 황후께서 동의하시면 별 문제없을 겁니다.”
“황후 언니는 분명히 동의하실 거예요.”
난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장군께서 제게 기사騎射를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분명 엄청난 걸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백장간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을 짓더니,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지금은 제가 훈련 때문에 좀 바쁩니다. 만약 진심으로 배우고 싶은 거라면 군영으로 와서 장병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십시오.”
난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답했다.
“좋아요!”
“…….”
내가 이쯤에서 물러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군영에서 거친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려는 여인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난 가능했다. 그리 건장한 마부마저도 넘봤던 나인데,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 것쯤이야 문제없었다.
“군주.”
그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뒷짐을 졌다.
“군주가 어찌 병사들과 한데 어울리겠습니까. 황후 마마께서 아시면 절 책망하실 겁니다.”
“그럴 리 없어요. 장군이 계신다면 황후 언니도 마음을 놓으실 거예요.”
난 자신 있게 말했다.
“장군께서 절 지켜 주실 테니까요.”
백장간은 뒷짐을 진 손을 풀었다. 난 그 틈을 타 팔 한쪽을 잡고 흔들었다.
“네? 장군님, 안 될까요?”
백장간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렇다고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그만 흔드십시오. 이러다 소매가 또 뜯어지겠습니다.”
이번엔 내 얼굴이 빨개졌다. 참나, 지난 일을 자꾸 이렇게 우려먹다니. 난 손을 풀고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뜻밖에도 그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고개를 숙여,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뛸 듯이 기쁜 순간이었지만, 차마 몸을 완전히 돌릴 수 없어 비스듬히 그를 보며 서 있었다.
“되었습니다. 그냥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군영으로 오시는 게 더 번거로울 겁니다. 우선은 활 쏘는 법을 알려 드릴 테니 말을 타는 건 적당한 말부터 구한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이 키로는 말 등에도 올라타지 못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