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4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장간이 그렇게 천박한 사람이던가? 설마 여인을 볼 때 겉모습만 보고 마음에 들어 할까? 설마 몸뚱이 너머의 진짜 내 모습은 보지 못한단 말인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머릿속엔 그와 두씨 아가씨가 함께 있는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
천천히 화원을 거닐던 두 사람이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한 사람은 다정한 웃음을 보내고, 한 사람은 부끄러워하면서.
백장간이 꽃을 한 송이 꺾어 그녀의 머리에 꽂아 주고, 너른 소매 밑으로 두 사람은 몰래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곤 석가산 뒤편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병풍을 내리쳤다. 더는 생각하기 싫었다. 여기서 더 상상했다간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난 거울을 보며 다시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지난번에 상으로 준 금관을 쓰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화원으로 향했다.
소라는 가는 길 내내 날 격려했다.
“힘내십시오, 군주님. 두씨 아가씨가 모든 면에서 군주보다 뛰어나긴 하지만, 절대 군주를 따라오지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난 기쁜 마음에 서둘러 물었다.
“어서 말해 봐. 그게 뭔데?”
“두씨 아가씨는 군주님보다 낯짝이 두껍진 않을 것입니다.”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거 칭찬 맞아?”
소라가 웃으며 말했다.
“사내대장부는 여자가 매달리는 걸 두려워한다지 않습니까. 날마다 백 장군님 곁을 맴돌다 보면 군주 전하를 성가셔하실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기죽지 마세요. 백 장군님이 군주에게 익숙해질 때쯤 군주께서 차갑게 대하시면 또 적응을 못 하실 겁니다. 그리곤 알아서 제 발로 군주를 찾아오시겠지요.”
“그 방법이 먹힐 것 같단 거지?”
소라가 심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바로 밀고 당기기 수법이지요.”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낯짝이 두꺼운 게 어떤 건지 본 군주가 보여 주지.”
화원에 도착하니 저 멀리 정자에 앉아 있는 백장간과 두씨 아가씨가 보였다. 난 발걸음을 늦추고 최대한 하늘거리며 걸었다. 아무리 두씨 아가씨와 견줄 수 없다 한들, 나도 백장간에게 내 진심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명문가의 딸들처럼 고상한 모습을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었다.
백장간은 날 진작 발견했지만 계속 다른 곳을 보았다. 보고도 못 본 체하는 모습을 보자니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화를 삭이고, 드디어 두 사람과 가까워졌다. 그는 마치 날 방금 본 것처럼 흠칫 놀랐다.
“오셨습니까, 군주.”
두씨 아가씨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예를 갖췄다. 난 조신하게 웃으며 물었다.
“두씨 아가씨께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어찌 언질도 주지 않으신 겁니까. 대접이 소홀하면 안 되지요.”
백장간이 말했다.
“아가씨는 제가 초대한 손님이니까요. 군주께 폐를 끼칠까 봐 미리 알리지 않았습니다.”
좀 전에는 날 못 본 척하고, 지금은 또 날 위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니! 내가 이곳에 오는 게 싫은가? 내가 두 사람만의 시간을 방해할까 봐?
겨우 화를 억눌렀다. 난 그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니, 언젠간 이 화를 백장간에게 전부 갚아 줄 것이다.
“그럼 전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찾아온 거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봄볕이 이렇게 좋은데, 많은 이들이 화원에 놀러 와야 북적거리고 좋죠. 안 그래요, 아가씨?”
“군주 말씀이 맞습니다.”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깐 채 공손히 답했다. 그리고 이내 아리따운 미소를 보이며 백장간에게 물었다.
“백 장군님, 군주도 함께 꽃을 감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 내가 화원을 구경한다는데, 백장간에게 허락까지 맡아야 한다고? 한데 백장간은 기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 주었다.
“예, 아가씨께서 북적이는 게 좋으시다면 그리 하시지요.”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화를 억눌렀다.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으니, 얼마나 화를 참을 수 있을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내 마음은 원한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더는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나도 성질이 있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두씨 아가씨를 사이에 두고 함께 걸었다. 꼭 나와 백장간이 그녀를 양옆에서 보호해 주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줄곧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딱히 끼어들 수 없었던 난 침묵만 지켰다.
사실 난 황후 언니와 말이 잘 통했다. 우린 늘 일상적인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걸핏하면 고상한 말만 늘어놓는데, 듣고 있으면 닭살이 돋을 만큼 소름 끼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두 팔을 감싸 쓸어내렸다. 이 기괴한 행동이 백장간의 주의를 끌었는지, 그가 물었다.
“군주, 춥습니까?”
춥지 않았다. 그저 닭살이 돋은 걸 없애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난 웃으며 대꾸했다.
“어서 말씀 나누십시오. 전 듣는 걸로 족합니다.”
두씨 아가씨는 내가 소외되는 게 신경 쓰이는 듯했다.
“군주께서도 저희와 함께 시를 읊으시지요. 호수에 연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연꽃에 대한 시를 읊는 게 어떠신지요?”
내가 말했다.
“가서 연밥을 먹는 건 어떨까요?”
“…….”
백장간이 말했다.
“이제 새 꽃이 피었는데 연밥을 어찌 먹겠습니까. 아직은 이릅니다. 하지만 핀 지 얼마 되지 않아 꽃이 아주 예쁘니, 가서 구경이라도 하시지요.”
두씨 아가씨는 성질이 급했다. 아직 호숫가에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던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연잎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아시나요?”
두씨 아가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물건을 감싸는 용도로 쓰이죠.”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닭고기를 썰어서 연잎에 감싸 불에 구워 먹는 게 그 유명한 화계花鷄라는 음식이에요. 정말 맛이 훌륭하죠.”
“…….”
“그리고 연잎밥, 연잎떡도 맛있고요.”
난 잠시 고민한 뒤, 또 입을 열었다.
“맞다, 우산이 없으면 연잎을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하기도 하지요.”
“…….”
괜스레 의기양양해졌다.
“연잎의 쓰임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도 모르셨죠?”
두씨 아가씨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부끄럽네요.”
어쨌든 나도 한 번은 만회를 한 셈이 아닌가. 절로 당당한 미소가 걸렸다. 곁눈으로 백장간을 바라보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그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벼운 내 언행을 비웃는 것인지, 두씨 아가씨의 식견이 짧아 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호숫가에 도착하자 두씨 아가씨는 붉은 입술을 섬섬옥수로 가리며 우아하게 말했다.
“정말 아릅답습니다!”
난 입술을 삐죽거렸다. 연꽃을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자기네 집에는 여기보다 훨씬 많이 피었던데.
“제 기억엔 아가씨의 저택에도 연꽃이 아주 많이 피었던 것 같은데요.”
“저희집처럼 비천한 곳을 어찌 이리 귀한 곳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저 가지런히 피어 있는 연꽃 좀 보십시오. 굵기도 고르고 크기도 알맞은 게 어디를 보아도 한 폭의 그림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연꽃은 원래 이렇게 피는 게 아니던가? 그녀의 말처럼 특출 난 풍경을 자랑하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백장간이 말했다.
“마음에 드시면 언제든 보러 오셔도 좋습니다. 전 저택을 비워도 군주께서는 늘 계시니까요.”
난 그제야 깨달았다. 앞서 한 말들은 백장간이 이 말을 내뱉게 하기 위한 준비였던 거다.
“저도 늘 저택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얼른 답했다.
“잊으셨나 본데, 바깥의 집을 수리 중이잖아요. 가서 현장을 지켜봐야지요.”
“그런 곳은 인부들이 많으니 군주도 자주 가지 마십시오.”
“어째서요?”
두씨 아가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존비귀천이니까요. 군주처럼 신분이 고귀하신 분이 어찌 그런 이들과 대면을 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말투가 듣기 싫었던 난 코웃음을 쳤다.
“못 만날 건 또 뭐에요. 저도 마을 어귀에 살면서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다 만나고 살았는걸요. 전 뒤늦게 군주가 된 거라서 그런 규율 같은 건 잘 안 지켜요. 게다가…….”
“군주.”
백장간이 엄숙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끊었다. 내게 이런 태도를 잘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정말 오라버니 같았다. 난 그의 체면을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두씨 아가씨를 슬쩍 보니, 눈빛에 어느새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나도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흥, 내가 마음에 안 드신다? 내가 더 마음에 안 들거든.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백장간이 배를 타자고 제안했다. 두씨 아가씨는 기뻐하더니 부끄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배인가요? 두 사람만 탈 수 있겠지요? 그럼 저는 타지 않을 테니 장군과 군주께서 타시지요.”
백장간이 말했다.
“아가씨는 손님인데 손님께서 먼저 타셔야지요. 게다가 작은 배도 아니니 다 같이 탈 수 있습니다.”
난 이를 갈았다. 속이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었다. 날 떼어 놓고 싶겠지. 후훗,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결국 백장간과 두씨 아가씨는 배 앞쪽에 타고 나는 뒤쪽에 탔다. 이따금 두 사람은 내 존재를 잊은 채 사담을 나누거나 연꽃을 가리키며 고리타분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가슴 속 불씨가 어찌나 활활 타오르는지, 속을 다 태울 것만 같았다.
무료해진 나는 뒤에서 대나무 장대로 노를 저었다. 사실 방법은 몰랐지만 힘이 워낙 좋았던 탓에 배가 노선을 벗어나 호수 가운데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노를 젓던 하인은 난처해하면서도 웃으며 날 바라보았고, 나도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난 지금 저 둘을 방해할 작정이다. 백장간은 별문제 없을 테고, 두씨 아가씨는 가녀린 몸이니 분명 어지럽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또 빗나갔다. 두씨 아가씨는 어지러워하기는커녕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께선 노도 저을 줄 아십니까?”
난 장대를 그녀에게 건넸다.
“한번 해 보겠어요? 재미있거든요.”
두씨 아가씨는 약한 척하기 싫었는지 뒤쪽으로 걸어와 장대를 받아 들었다. 좁은 선미로 다가오니 하마터면 그녀에게 밀려 호수로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매우 안정적으로 서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흠칫 놀란 나는 장대를 다시 가져오려 했다.
“되었어요. 그냥 제가 할게요…….”
그렇게 서로 하겠다고 살짝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잇따라 풍덩 소리가 났고, 그녀와 나 둘 다 물에 빠지고 말았다.
두씨 아가씨는 질겁한 얼굴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나도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시선은 줄곧 백장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과연 누굴 먼저 구할 것인가?
사람은 가장 절박할 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법이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할 테니, 그에게 더 중요한 사람을 먼저 구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