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3화
며칠 뒤, 황후 언니가 사람을 보내 입궁을 요청했다. 오랜만에 황후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인 만큼 절로 들떴다.
하지만 황상도 함께 계실 줄은 몰랐다. 난 최대한 단정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사실 궁중 예절은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으니, 대충 모양만 흉내 낼 뿐이었다. 사실 흉내도 잘 내지 못하지만. 무릎을 굽히는데 휘청거리는 바람에 앞으로 몸이 쏠렸다. 다행히 제법 민첩하게 반응한 덕에 두 팔을 활짝 펼치고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웃음바다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황후 언니가 말했다.
“웃지 말아요. 넘어지지 않았으니 응당 칭찬을 해 주어야지요.”
황후 언니가 박수를 보내며 칭찬하니 웃음소리는 곧장 갈채로 바뀌었다. 황후 언니 앞에서는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황제 폐하와는 조금 어색했기에 민망한 미소만 나왔다. 오늘 황상은 내게 상냥하게 대하며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며 서둘러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듣자니 두 승상의 공자 두형과 사적으로 혼인을 맹세했다던데. 규율에 맞진 않는 일이지만 황후가 두 사람을 도와주라고 청하니, 군주만 원한다면 짐이 혼삿날을 정해 주겠네.”
맙소사. 순간의 오해가 혼인을 맹세하는 일이 되어 버리다니. 황후 언니가 거들었다.
“지난 춘계 연회 때 두 승상의 공자와 딸을 봤는데 두 사람 다 훌륭하던걸. 공자의 외모도 뛰어나고 아가씨도 예쁘고 말이야. 두 승상은 애당초 백 장군을 딸과 혼인시키고 싶어 했는데, 소쌍이 너도 두씨 집안과 연을 맺는다면 겹경사가 따로 없는 일이잖아?”
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이렇게 점잖게 말했던가? 어쩐지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소쌍아, 네 생각은 어때?”
황후 언니가 내게 물었다. 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눈치가 있다면 모든 걸 언니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혼인 같은 큰일을 어째서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언니, 전 아직 어리니 이렇게 빨리 시집을 가고 싶진 않아요.”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야. 벌써 열여섯이잖아. 언니는 네 나이 때 이미 태자를 임신 중이었어.”
그때, 황제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두형에게 시집을 가기 싫은 것인가? 하면 누구와 혼인을 하고 싶은 것인가?”
황제의 눈빛 앞에서,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내뱉을 뻔했다. 그때 황후 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큰오라버니는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지혜로운 여인과 맺어 주고, 넌 늠름하고 따뜻한 낭군과 맺어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기엔 두 승상의 자식들이 제격이잖아. 너희 남매가 두씨 집안 남매랑 연을 맺으면 한 가족이 되는 것인데 얼마나 좋은 일이야.”
난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한 글자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백장간은 똑똑하고 재능이 많은 여인과 어울렸다. 하지만 난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황후 언니가 날 조금 하찮게 보는 것만 같았다. 정녕 난 칭찬할 구석이 조금도 없는 걸까? 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아요.”
황제와 황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황후 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네가 원치 않으니 이 일은 잠시 미뤄 두고 조만간 오라버니한테 물어봐야겠다. 오라버니는 두씨 집안 아가씨가 어떤지 말이야. 두 사람 모두 내 형제자매니까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백장간이 혼인을 승낙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황제는 정무를 살피러 남서방으로 향했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직접 내 혼담을 논했다니, 절로 불안해졌다. 황제의 후궁에는 황후밖에 없었기에 혼사를 구실로 조정 대신들을 좌지우지할 방법이 없었다. 혹여나 황제가 날 이용해 조정의 신하들과 연을 맺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황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가 떠나자 태자가 황자와 공주를 데리고 들어와 인사를 했다.
“군주마마를 뵈옵니다.”
날 좋아하는 황자는 곧장 달려와 자랑을 늘어놓았다.
“마마, 내 새 옷 좀 봐요, 예쁘죠?”
난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칭찬했다.
“와, 정말 예쁩니다. 우리 성아에게 아주 잘 어울려요.”
황자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태자가 말했다.
“황제皇弟, 마마께서 귀신 이야기를 제일 잘하시니, 하나만 이야기해 달라고 말씀드려.”
황자는 토끼처럼 깜짝 놀라더니 겁을 잔뜩 먹고 어머니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때 다른 아이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마마, 전 귀신 이야기 듣고 싶어요. 하나만 해 주세요.”
황자는 황후 언니 뒤에 숨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 귀신 이야기는 밤에 들어야 더 재미있지요.”
공주가 신이 나 말했다.
“그럼 오늘 가지 말고 밤이 되면 말씀해 주세요. 귀신 이야기해 주세요, 네?”
난 웃으며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황후 언니는 내게 마음껏 궁을 오가며 묵을 수도 있는 특권을 주었다. 오늘 궁에서 묵으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난 슬쩍 황후 언니에게 운을 떼었다.
“언니, 백 장군의 의견을 물어본 적 있으신가요?”
“없지.”
황후 언니가 즉시 답했다.
“두 승상이 너와 공자 얘기만 꺼내서 우선 네게 먼저 물어본 거야.”
“그럼 이 기회에 백 장군께도 한번 여쭤보세요. 그래도 백 장군이 큰오라버니인데, 오라버니도 하지 않은 혼사를 제가 먼저 올릴 수는 없지요.”
황후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곧장 백장간을 궁으로 모시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태자에게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라고 했다.
백장간은 이상하리만치 금방 도착했다. 황후의 명을 받든 공공 말로는 궁을 나가자마자 그와 마주친 덕에 곧장 모셔왔다고 했다.
더 이상한 점은 그가 들어오자마자 뒤이어 황제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황후 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신하들이 남서방에서 황상을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또 온 거예요?”
황제가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백장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돌려보냈소. 백 장군이 온다길래 와본 것이오. 군신 관계를 떠나 짐에게는 손위 처남이 아니오.”
백장간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어서 앉아요. 다들 한 식구인데 서먹하게 그러지들 말고요.”
황후 언니가 백장간에게 물었다.
“두 승상 딸의 초대로 다시회에 갔었다면서요. 어땠어요?”
“좋았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두씨 아가씨에 대한 인상이 어땠는지입니다.”
백장간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황제가 갑작스레 헛기침을 했다. 다른 의미라도 담긴 것처럼 묵직하고 큰 기침 소리였다.
“…좋았지요.”
“두씨 아가씨가 마음에 들면 황상께 혼삿날을 정해 달라고 하려고요. 오라버니의 나이도 적지 않으니 어서 아내도 맞이하고 아이도 낳아야지요. 전 다른 건 걱정 없어요. 그저 오라버니도 혼인을 하고 소쌍이도 좋은 낭군을 찾으면 그걸로 족해요.”
백장간이 말했다.
“마마의 관심은 감사하지만, 신은 아직…….”
황제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쿨럭!”
황후 언니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상, 목이 안 좋으세요?”
“괜찮소. 그저 조금 간지러운 것뿐이오.”
“위 태의를 부를까요?”
“그럴 필요 없소. 금방 나을 것이오.”
그는 백장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엔 일종의 신호 같았다. 역시나 백장간은 꾸물대다 입을 열었다.
“신도 두씨 아가씨가 참 좋은 신붓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혼인 전에 서로를 충분히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가 잘 맞는다면 그때 혼사를 치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긍정적인 대답에 황후 언니는 기뻐했다.
“우리 동월은 개방적인 풍조가 강하니 혼인 전에 가끔 만나는 것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짬이 날 때 두씨 아가씨와 따로 만나 보세요. 만나서 괜찮으면 제가 혼인 준비를 해 드릴게요.”
어쩐지 황후 언니보다 황제가 더 기뻐하는 듯했다. 입이 거의 귀에 걸려 있지 않은가. 이내 체통을 잃을까 봐 걱정이 된 것인지 황제는 고개를 살짝 틀어 장식장에 놓인 화병을 바라보는 척했다.
내 예리한 직감대로라면, 황제와 백 장군 사이에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 * *
두씨 아가씨와 교제해 보겠다는 건 황후 언니 앞에서 대강 둘러댄 말인 줄 알았건만. 며칠 뒤, 백장간은 꽃을 감상하자는 핑계로 두씨 아가씨를 저택에 초대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눈앞이 노래지는 듯했고,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노비들에게 분풀이하는 법을 몰랐다. 병풍을 바라보며 식식대고 있는데 소라가 말을 걸었다.
“어찌 그리 혼자 분을 삭이십니까? 백 장군께서는 보지도 못하실 텐데요.”
괜스레 마음이 찔렸다.
“나 혼자 화가 난 것뿐인데 왜 백 장군을 끌어들이는 거야?”
“백 장군님 때문에 화가 난 것 아니십니까?”
“네가 어떻게 알아?”
소라가 직설적으로 답했다.
“군주 전하께서 백 장군을 흠모하시는 건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장간을 향한 내 마음이 남들 눈에도 보인단 말인가? 다들 알고 있다면, 어째서 그만 모른단 말인가? 난 손가락을 꾸물댔다.
“그래서 넌, 백 장군도 날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
“군주께선 고귀한 신분이시니 백 장군님께서도 가볍게 보진 않으실 겁니다. 군주께서 정말 마음이 있으신 거라면 황후 마마께 혼사를 정해 달라 청을 드려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괴로울 뿐이었다.
“황후 언니는 백 장군을 오라버니로, 날 여동생으로 여기시는데? 오라버니에게 시집을 가는 여동생이 어디 있겠어.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잖아.”
“황후 마마와 백 장군님은 함께 자라셨으니 남매의 정이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군주께선 백 장군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요.”
소라의 말은 내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정말 우리가 가능한 사이라고 생각해?”
소라가 날 위아래로 빤히 바라보더니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지금은 두씨 아가씨가 있으니, 비교를 하자면… 조금은…….”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소라의 말은 분명했다. 내가 두씨 아가씨에게 크게 떨어진다는 게 아닌가. 외모며 재능이며 모든 게 그녀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