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2화
그녀는 나와 백장간을 상석에 안내했고 자신도 함께 앉았다. 상석에서는 고개를 틀지 않아도 곧장 호수의 연꽃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난 차에 대해선 잘 몰랐고, 시는 더더욱 몰랐다.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두 승상의 딸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도 그녀와 내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싸워 봐야 했다.
백장간은 나와 그녀 사이에 앉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빼어난 한 쌍이었다.
자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점잖은 말만 늘어놓았기 때문에 나는 차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아마 백장간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관인 그가 무슨 시를 짓겠는가!
그러나 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두 승상의 딸이 시 앞부분을 읊은 뒤 백장간에게 넘기자, 그는 금세 수려한 시구를 지어 읊었다. 많은 이들의 감탄과 갈채가 쏟아졌다.
시를 읊던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훌륭한 시구가 분명했다. 게다가 두 승상의 딸은 또다시 얼굴이 붉히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다들 지켜보는 앞에서 대놓고 감정을 나누는 꼴이 아닌가! 내 기분 따위는 상관없다는 걸까…….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내 잔이 빈 걸 확인하고 곧장 차를 따라주었다. 난 자그마한 찻잔을 들어 술을 마시듯이 단번에 들이켰다. 그렇게 서너 차례 들이켜자 백장간이 드디어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리 갈증이 납니까?”
그래, 당신이 갈증 나 죽겠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밤에 깊이 잠들지 못할 겁니다.”
당신이 곁에 있다면 편히 잠들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다과도 좀 드십시오.”
그가 접시를 내 앞에 놓아 주었다. 그의 관심에 조금 감동을 받은 나는 미소로 답하려 했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두 승상의 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정말 다과 하나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바로 다과를 집어 들었지만 던지진 않았다. 맛있는 다과를 낭비할 순 없었다. 뒤이어 사람들은 비화령飛花令인지 뭔지 하는 놀이를 시작했다. 누군가 시어를 정하고 순서가 되면 시를 이어 짓는 식이었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백장간이 내 팔을 치며 말했다.
“말 좀 하십시오.”
“…하.”
무시가 담긴 내 대꾸에 다들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난 최대한 침착하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황후 언니는 가슴이 떨려도 얼굴만큼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알려 주지 않았던가.
가장 민망해하는 사람은 역시 백장간이었다. 어쨌든 그가 날 이곳에 데려왔으니까.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군주 전하께서 ‘하’자를 제시해 주셨으니 제가 한 수 읊지요. 하늘대는 버들잎 짙은 그늘 아래, 그대여 눈길을 주지 마오. 어여쁜 살구꽃 한 송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네.”
두 승상의 딸이 가장 먼저 박수를 보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장군과 군주께서는 호흡이 정말 잘 맞네요.”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저 불만스러운 마음에 코웃음을 친 것뿐인데 호흡이 잘 맞다니.
차를 많이 마신 탓에 측간 생각이 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백장간이 곧장 어디 가냐고 물었다. 크게 말하기 민망했던 터라,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순간 너무 가까이 다가간 바람에 입술이 그의 귓불에 살짝 닿고 말았다. 그의 귀는 불씨가 붙은 양 새빨갛게 변했고 뒤이어 얼굴도 빨개졌다. 그는 얼른 차를 마시려는 척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옷깃 너머 보이는 목도 이미 빨갛게 드러나 있었다.
아주 잠깐 닿은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인가? 만약 그의 입술에 닿았다면 불이 붙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곧 두부의 계집종이 날 측간으로 안내해 주었다. 시녀 소라가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이런 곳에 오는 일도 드물 테니 소라에게 좀 더 구경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사실 난 인정이 넘치는 주인이었다. 소라는 계속 자주색 옷을 입은 사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붉게 물든 얼굴로 요염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니 소라에게도 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맞지 않았다. 나처럼 엄청난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소라의 마음은 수포가 될 가능성이 컸다.
측간에서 나오니 길을 안내했던 계집종이 보이지 않았다. 대나무 숲 앞에는 몇 갈래의 굽이진 길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멍하니 넋을 놓았다. 난 황후 언니와 달리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길을 자주 잃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선 여기부터 벗어난 다음 사람을 만나면 다시회가 열리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아무 길이나 골라 숲을 질러갔다. 고요한 숲의 정경 속에서 비취색 대나무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고, 그 틈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정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난 가느다란 그림자를 골라 밟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수많은 그림자가 내 몸에 미끄러지듯 움직일 때마다 재미있고 즐거웠다.
고개를 숙인 채 발을 내디디며 그림자가 바닥에서 치마로 차츰차츰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바닥을 향한 내 시야에 한 사내의 발이 담겼다.
밑창이 두꺼운 청색 가죽 장화는 한눈에 봐도 사내가 부유하다는 걸 알려 주었다.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옮기니 옅은 푸른색 장포가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호리호리한 체격, 각진 얼굴, 의젓한 이목구비까지……. 물론 백장간보다는 못했다.
사내가 날 보며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다들 날 군주라고 부르는데, 아가씨라니? 설마 날 모르는 것인가. 잠시 멍해졌었지만, 약간의 흥미를 느낀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쪽에서 오시니 길 좀 묻겠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지요? 호숫가까지 이어져 있습니까?”
그가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길을 잃으신 것이었군요. 호숫가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도 곧장 승낙했다.
“네, 알려 주신다면야 저도 감사하지요.”
그는 손짓을 하며 날 이끌었다. 그에게서는 겸손하면서도 점잖은 분위기가 흘렀다. 난 발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향했고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걸었다. 이따금 내게 신신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이 고르지 못하니 조심하십시오.”
바닥에는 무늬가 있는 돌이 깔려 있었다. 예쁜 도안에 맞춰 길을 내었지만 종종 평평하지 않은 곳들이 있었다. 상관없었다. 이것보다 더 험한 길도 걸어 다녔는데 뭐 그리 대수라고.
그러나 내 자만심은 금세 화를 불러왔다. 갑작스레 발밑에 뭔가가 걸리면서 몸이 기우뚱 쏠리더니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그때, 사내가 재빨리 내 허리를 감싸 지탱해 주었다. 그에게서 잣나무 향 같은 은은한 향이 훅 끼쳤다. 얇은 윗옷 사이로 서로 몸을 맞댄 탓에 매우 탄탄한 가슴이 느껴졌다.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훅 올라왔다. 서둘러 그와 거리를 두려 했다. 그도 당황했는지 손을 움츠렸다. 그때, 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소맷단이 찢어진 것이었다. 덕분에 새하얀 팔이 밖으로 드러났다.
나와 그 사내 모두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소맷단을 주워 내 팔에 걸쳐 주려 했다. 하지만 당황한 손짓에 옷깃은 더 벌어져 버렸고 급기야 분홍빛 속옷까지 보였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옷을 정돈해 주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감히 그리할 수는 없는지 쩔쩔맬 따름이었다.
차마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 큰 사내가 이리 작은 일에 눈물까지 보이려 하다니, 기이한 장면이었다. 대장부라면 자신이 한 일에 용감히 책임을 질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을.
그때,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를 바라보았다. 다들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고, 몇몇 여인들은 눈을 가리기도 했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듯한 반응이었다.
무리 사이에서 백장간이 걸어 나오더니 장포를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그가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무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앞으로 다가왔다. 두 승상이었다. 그가 다짜고짜 손을 들어 사내의 뺨을 날렸다.
“이런 못난 놈!”
묵직한 손찌검에 그의 얼굴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고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사내가 무릎을 꿇고 두 승상에게 울며 빌었다.
“아버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두 승상이 나에게 읍하며 말했다.
“군주, 신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군주 전하께서 벌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신이 반드시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내일 황상께 혼사를 정해 달라고 청을 드리지요.”
“…….”
갑자기 혼사라니 그게 무슨……. 백장간이 미간을 찌푸렸다.
“승상 대인, 앞뒤 사정이 제대로 밝혀진 것도 아닌데 어찌…….”
난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밝혀질 게 뭐가 있겠어요.”
이 일로 혼사가 정해지는 건 나도 싫었다. 하지만 백장간의 말에 맞서서 그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만약 날 시집 보내고 싶어 한다면 난… 그와 연을 끊고 절대 왕래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가 거절한다면 난 한껏 기대에 부풀 테지. 어떻게든 그의 속내를 알아내려 애쓰면서.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군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무책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책임감이 강한 사내였다. 그것도 아주 단칼에 책임을 지려 했다.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이날의 일은 정말 황당했다. 처음엔 분명 두 승상의 딸이 백장간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마지막엔 나와 두씨 집안 공자가 연을 맺을 처지에 놓였다.
결국 난 백장간에게 이끌려 저택으로 돌아왔다. 중문을 지난 뒤에야 가마가 땅에 놓였다. 가마에서 내리니 백장간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장포를 돌려주려는데, 그가 황급히 내 손을 막더니 주변을 물렸다.
“잠시 들어가서 얘기 좀 하시지요.”
그가 먼저 이런 말을 하다니,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건 아닐까. 난 서둘러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백장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수심이 깊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군주, 만약 두형杜衡에게 시집을 가고 싶지 않다면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름이 두형이었다니, 제법 입에 잘 붙는 이름이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제 명예가 땅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그자에게 시집을 가지 않으면 누구에게 갈 수 있겠어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그 말도 맞긴 하지만…….”
맞긴 개뿔, 소극적인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장군, 방금 말한 방법이란 건 무엇인데요? 무슨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는 거예요?”
“만약 두형에게 시집을 가기 싫다면, 다른 훌륭한 자로 찾아보겠습니다.”
난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요?”
그는 자리에 멈춰 서서 천장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수를 헤아렸다. 꼭 점쟁이 같은 모습이었다.
“대충 세어 보니 네 명 정도 될 듯합니다. 군주께서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골라 보십시오.”
“누구인데요. 말씀해 보세요.”
“사마 대인의 공자, 위지 대인의 공자, 진국공의 장손, 예친왕의…….”
네 명 중 그는 없었다. 사방에 서리가 내려 얼어붙는 듯했다. 정말이지, 이대로 펑펑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