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1화
당황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군주를 일으켜 드리지 않고 뭣들 하느냐.”
시녀 소라가 서둘러 내 곁에 다가왔다. 난 소라에게 슬쩍 눈치를 보내며 있는 힘껏 바닥에 몸을 붙였다. 소라는 결국 날 일으키지 못하고 조용히 타일렀다.
“군주 전하, 어서 일어나시어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찌 이대로 일어날까. 나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장간은 내가 아닌 시녀들에게 화를 냈다.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전하를 일으키래도!”
이번엔 두 명의 시녀가 다가와 날 일으켰다. 셋은 이길 수 없으니 이대로 일어나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난 목 놓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손발을 파닥거리며 시녀들까지 전부 밀어내니 다들 깜짝 놀라 행동을 멈췄다. 주변에는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모든 걸 묻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백장간은 한참 뒤에야 허리를 숙이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 주었다.
“전하, 그만 울고 어서 일어나십시오.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체통은 무슨 체통, 진짜 제대로 된 군주도 아닌데. 게다가 어릴 때부터 체면을 잃은 일은 차고 넘쳤다. 그중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건 마부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일이었다. 그 일은 마부에게 살면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었으리라. 무려 군주의 고백을 거절한 게 아니던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웠다. 그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다격군주는 없을 테니까.
인생이란 정말…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법이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마부는 날 거절했다. 하지만 모든 걸 가진 지금도 여전히 원하는 사내는 얻을 수 없었다.
백장간은 내게 망신을 준 일이 미안했는지 정교하고 값비싼 장식품과 비단 등을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난 어느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출신은 가난해도 이제는 제법 세상 물정을 알고 있으니, 별 감흥이 없었다. 궁에서 지낼 땐 황후 언니의 봉관까지 만지작거리며 놀았는데 이런 것들이 뭐 그리 대수라고?
난 관리인 편에 선물을 전부 돌려보냈고 이유 없이는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전했다. 백장간은 죄책감을 이길 수 없었는지 직접 날 찾아왔다. 얼굴을 붉힌 그가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군주. 그날 제가 손을 놓으면 안 되었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피부가 두꺼워서 아프지도 않았는걸요.”
그는 민망했는지 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전하, 어찌해야 절 용서해 주실 겁니까? 차라리 절 한 대 때리십시오.”
“좋아요!”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설마하니 내가 좋다고 할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었다. 전원대장군이라는 자가 어찌 말을 번복할 수 있을까? 그가 자리에 꼿꼿이 선 채 말했다.
“그럼 때리십시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주먹을 쥐고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를 때렸다. 가슴이 어찌나 탄탄한지 쿵쿵 소리만 들려왔다. 결국 주먹을 펴서 손바닥으로 그의 몸을 때렸다. 가슴을 때린 뒤에는 등까지 때렸다.
백장간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꼭 잘 익은 새우처럼 껍질만 벗긴다면 한입에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 손은 그의 요대를 붙잡았고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요대를 당겼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군주가 되어 장군을 희롱했다는 소문이 돌면 좋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지만 황후 언니에게까지 망신을 주면 안 되었다.
눈치가 있는 이라면 내가 그를 희롱하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을 테지. 시녀들은 전부 밖으로 나가 있었지만, 그들이 조용히 웃는 소리를 언뜻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그를 사흘 밤낮으로 연신 때려 주고 싶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 그를 갈망해 왔으니까. 하지만 입술을 오므린 채 괴롭힘에 시달리는 백장간의 얼굴을 바라보니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내가 담이 작고 나약하다고 하지만, 나도 심보가 뒤틀릴 때가 있었다.
결국 손을 멈춘 난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나도 때렸으니 이제 서로에게 빚은 없는 거예요. 예전에 살던 집 공사가 끝나면 앞으로 그 집에서 살게요.”
백장간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전하, 이곳이 싫으십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게 아니라 불편할 뿐이에요. 그래도 여인인데 계속 외간 남자의 집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백장간이 말했다.
“군주는 제 여동생이 아닙니까.”
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군은 백씨, 전 여씨인데 어떻게 우리가 남매라는 거죠?”
백장간은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께서 군주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혼자 지내면 제대로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만약 거처를 옮긴다면 황후께서 제가 군주를 잘 돌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장군께선 절 잘 돌봐 주셨나요?”
그가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전 군주를 잘 챙기고 돌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절 잘 챙기고 돌봐 준 게 장군님이었어요? 관리인이었겠죠.”
그는 내 말주변에 깜짝 놀란 듯했다. 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에도 없는 호의였으면서.”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날 그런 말을 한 건 정말 옛집으로 돌아가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와 마주치니, 가슴만 답답해졌다. 차라리 눈에서 멀어지는 편이 나았다.
다만 일은 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갑작스레 기둥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공사 기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난 백장간의 저택에서 좀 더 머물러야 했다.
근심에 잠긴 나와 달리, 백장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직접 내게 연밥 한 바구니를 가져다주더니 방금 연못에서 딴 거라며 신선할 때 먹어 보라고 했다.
내가 공사 지연에 대해 묻자,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큰일도 아니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수리하는 게 좋겠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은근히 좋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가 아는 백 장군은 워낙 충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니 모두 황후 언니를 위한 것일 테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그가 내 생각을 해 주길 바랐다.
며칠 뒤, 백장간은 두부杜府에서 열리는 다시회茶詩會(차를 주제로 한 시를 즐기는 모임)에 함께 가자고 권했다.
두부는 현재 승상인 두영림杜英林의 관저였다. 두 승상에게 천금 같은 딸이 하나 있는데, 듣자니 경국지색에 재능도 뛰어나다고 했다. 특히 시를 잘 지어 관저에서 종종 다시회를 열고 왕손들과 귀족들을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다시회에 초청되는 공자와 여인들은 두부에서의 초대를 영광으로 여겼다. 난 그 영광이 내게도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나도 존귀한 신분이긴 하지만, 난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그들과 나에게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학을 떼며 거절했겠지만, 이번엔 가야 했다. 따로 접한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승상은 원래 자신의 딸을 황상에게 바칠 생각이었지만, 황상의 마음은 오직 황후 언니에게만 향해 있었다. 설령 선녀가 내려온다 해도 황상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 승상은 백 장군을 눈여겨본 게 분명했다. 딸을 백 장군에게 시집보낸다면 어쨌든 황상과 친척 관계를 맺는 셈이 아닌가.
나는 가마를, 백장간은 말을 타고 두부로 향했다. 가마에 앉아 있으면 그가 탄 말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난 발을 걷어 몰래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는 가마 옆에 있었다. 커다란 말을 타고 새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고상하면서도 멋있었다.
가는 길 내내 그를 다섯 번이나 힐끔거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날 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며 갈 뿐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내가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 결국 두부에 도착했을 땐 꼭 홍시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내면 도톰하고 과즙이 풍부한 과육을 맛볼 수 있는……. 나는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우린 존귀한 신분의 손님인 만큼 두 승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는 우리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히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있는데, 승상의 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나 백장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 정말 매혹적이었다.
백장간을 바라보니 그도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올리는 그에게서 겸손한 군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서로 예를 갖추는 동안, 난 가만히 앉아 입가에 조신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 언니는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최대한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또 때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난 언니의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언니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감개무량한 마음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으리라. 저리 예쁘고 고귀한 여인이 나에게 예를 갖추다니, 정말…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승상은 자신의 사명을 마치자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고 두 승상의 딸은 나와 백장간을 다시회가 열리는 곳으로 안내했다.
다시회가 열리는 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커다란 호수에는 멋진 연꽃이 만개했고 녹음이 짙게 어우러졌다. 초록 잎 사이를 뚫고 나온 분홍 꽃은 부끄러움을 타는 여인처럼 아리따웠다. 평지에 세워진 정자는 장랑長廊처럼 보였지만 장랑보다 더 넓었다. 정자에는 탁자와 의자가 길게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엔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자 주변은 석가산과 각종 화초로 둘러싸였고 무성하게 잎을 피운 나무도 곳곳에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 완벽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백 장군과 두 승상의 딸을 보자 모두 예를 갖췄다. 사실 이런 번거로운 예절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