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0화
이장은 내가 이렇게 말주변이 늘었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절로 얼굴이 붉어진 그가 소리쳤다.
“다 널 위해 하는 소리거늘! 여기서 떠들지 말고 썩 떠나거라. 왔던 곳으로 어서 돌아가!”
난 내 집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여기서 왔으니 여기로 돌아와야지요. 이 집은 어머니 아버지가 물려주신 제 집입니다. 남이 살 수는 없는 법이라고요.”
뚱보는 성질이 급했는지, 또다시 날 밀치며 성을 냈다.
“꺼져. 여기가 왜 너희 집이야? 안 꺼지면 죽여 버릴 줄 알아!”
그가 고개를 돌려 이장에게 말했다.
“외숙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제대로 혼쭐을 내줄 테니까요.”
알고 보니 이장의 조카였던 것이다. 그래, 아무리 간이 크다 한들 이렇게 남의 집을 빼앗을 사람은 이장 말고 없었다. 애당초 날 궁에 보내려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난 이장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이장님이 내 집을 다른 이에게 넘긴 것이로군요? 이장님,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짓을 하였습니까? 이는 남의 재산을 강점한 것이 아닙니까? 당장 관청에 고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둘 줄 알고?”
그때 뚱보가 손을 휘둘러 내 뺨을 때렸고, 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찌나 손힘이 센지,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그가 발길질을 해 댔다.
“빨리 안 꺼져? 죽기 싫으면 어서 꺼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거리긴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감히 이장에게 맞설 수 없는 탓이리라. 입에서는 어느새 피가 흘러내렸고, 허리는 뼈가 부러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난 천천히 바닥을 기어 마부에게 다가가 애원했다.
“백 장군 저택에 가서 장군을 불러주세요…….”
옆에 있던 튼실한 부인은 마부를 끌어당겼다. 꼭 귀신이라도 본 모양새였다.
난 목숨이 질긴 사람이다. 궁에서 양팔과 그의 의형제가 죽어라 때렸을 때도 목숨을 잃지 않았고, 엄동설한을 질기게 버텨냈다. 뚱보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바닥을 뒹구는 지금도 난 지지 않았다. 맞으면서도 남의 집을 빼앗은 야비한 인간이라며 욕을 퍼부었다.
정말 실망스러웠던 건 다름 아닌 마부였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자에게 고백을 했을까? 내가 이렇게 얻어맞는 걸 보고도 가 버리다니 말이다. 아무래도 켕기는 게 있으니 보지 않으려는 것이겠지. 내가 일방적으로 얻어맞자 지켜보던 이웃들도 더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만하시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겠소.”
“소쌍아, 그만 받아들이거라.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이장님, 뭐라고 좀 해 주십시오. 일이 커지면 좋을 게 없습니다.”
이장이 뚱보에게 호통쳤다.
“되었으니 그만하거라. 이 정도 혼났으면 앞으론 안 그러겠지.”
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흘러나왔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옷엔 먼지가 잔뜩 묻고 말았다. 분이 풀리지 않았던 난 미친 여자처럼 소리쳤다.
“날 때려죽이지 않는 한 또 올 것이다!”
불쑥 정신 나간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서 맞아 죽는다면, 백 장군이 괴로워할까? 뚱보는 내 말에 눈을 부라리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내 제삿날이 아니었다. 백장간이 날 찾아왔기 때문이다. 말에서 내린 그는 곧장 내 앞으로 달려왔다. 여태껏 겪은 수모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날 안아 올렸다. 백장간의 어깨 너머로 마부가 보였다. 마부는 날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역시 내가 고백했던 사내다웠다. 내 눈은 정확했던 것이다. 그는 정말로 백 장군의 저택을 찾아가 상황을 알렸다.
뒷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백장간은 함께 온 이들에게 뚱보를 흠씬 두들겨 패라고 분부했다. 물론 이장도 함께 말이다. 두 사람의 곡소리를 들고 있자니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백장간은 날 안은 채 자리를 뜨려 했지만,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가 이유를 물었을 때, 난 좀 더 지켜봐야 화가 풀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는 웃으며 계속 그들이 맞는 걸 구경하게 해 주었다. 사실은, 그에게 계속 안겨 있고 싶어서 댄 핑계였다. 그의 품에 처음 안긴 순간이니 이 기분을 오랫동안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그의 가슴은 매우 넓고 단단한 데다, 어렴풋이 좋은 향기도 났다. 겉으로 봤을 땐 키가 크고 말라 보이는 체형이었지만 날 그리 오랫동안 안고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적어도 숨을 몰아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내 호흡이 자꾸만 가빠졌다. 가슴이 점점 두근대는 탓에 나도 모르게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는 조금 의아했는지 고개를 숙여 날 바라보았다. 난 반쯤 실눈을 뜨고 조용히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곧장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가 아픈 것입니까? 그만 보고 돌아가야겠습니다. 의원에게 진맥을 봐 달라고 해야겠어요.”
난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의 얼굴과 목덜미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저택에 돌아오니 의원이 도착해 있었다. 의원은 내 상태를 살펴보더니 다행히 뼈가 다치진 않았다면서 푹 쉬면 금방 나을 거라고 했다. 백장간은 기뻐하며 관리인에게 의원을 배웅하게 한 뒤,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어쩐지 엄숙한 표정이었다. 괜스레 뜨끔했던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침대 옆에 앉았다.
“군주 전하,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몰래 저택을 나가 다른 이들과 시비가 붙어 이리 변을 당하시다니요. 다른 이도 아니고 군주십니다. 이 소식이 황후 마마의 귀에 들어간다면 절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전하를 잘 돌보지 못했다고 탓하시겠지요.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나간다 한들 하인들을 데리고 나가야지요. 누가 소식을 전하러 오지 않았다면 오늘 거기서 맞아 죽었을지도……”
난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맞아 죽으면 슬퍼했을 거예요?”
그는 잠시 넋을 놓더니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그냥 농담한 거예요.”
부디 대답하지 않길, 어차피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닐 테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이불을 잘 여며 준 뒤 발걸음을 돌렸다.
옆에 있던 시녀 소라小螺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단 채 날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남은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그녀를 더 슬프게 했으리라.
“군주 전하, 앞으로는 절대 소인을 떼어 놓지 마시어요.”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매까지 맞고.”
소라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맞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소인은 그저 군주 전하가 걱정입니다. 소인이 있었다면 그 누구도 군주 전하를 업신여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난 귀엽고 아담한 소라의 체격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앞으로는 항상 데리고 갈게. 다른 이들이 날 업신여기지 못하게 말이야.”
백장간은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겠지. 지금까지 우린 각자 앞뜰과 후원에 묵으며 익숙하고도 낯선 사람처럼 지냈다. 관리인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듣는 사이로.
놀랍게도, 치료하는 동안 그는 두 번이나 날 찾아왔다. 이번엔 정말 나를 살뜰히 돌봐 준 것이다.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 그는 집문서를 내게 쥐여 주었다.
“여기, 군주의 집입니다. 내가 대신 찾아왔습니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의 감정이 어찌 평온할까. 그는 우는 여인을 본 적이 거의 없었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려 하자, 난 곧장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처음엔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천천히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만 그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몹시 당혹스러우리라.
난 그의 옷을 눈물로 다 적시고 말았다. 새삼 민망해진 나는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너무 기뻐서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집이었는데… 드디어 찾았네요. 고맙습니다, 백 장군님.”
그는 내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더니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예를 갖출 것 없어요. 어쨌든 우린 남매니까요.”
그 말은 내 안에서 싹텄던 희망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었다. 난 맥없이 침대에 쓰러져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갑작스러웠는지, 그가 겸연쩍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럼 쉬세요. 짬이 나면 다시 찾아올 테니.”
빈말이었다. 그는 그 후로 날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이제 상처도 많이 나은 덕에 이제 침대에서 내려와 뛰어다닐 수 있었다.
내 상황은 백장간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회복되고 며칠이 지나니 관리인이 찾아왔다.
“장군께서 전하의 옛집을 복구하실지 아니면 새롭게 꾸밀지 여쭤보라고 하십니다. 예전 모습으로 복구한다면 전하께서 직접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셔야 하고, 새로 꾸미신다면 장군께서 인부에게 도안을 맡겨 전하께 보여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정말 답답했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전처럼 복구할게요. 그래도 옛집이 그리우니까요.”
관리인은 내 뜻을 장군에게 전했고, 며칠 뒤 가마와 호위병들을 배치해 옛집에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뚱보 왕씨는 정말 막돼먹은 사람이었다. 내 소중한 집에서 멋대로 산 것도 모자라, 전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는 매끈하고 평평한 벽돌을 깔았고 안에는 값비싼 녹나무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두었다. 벽에는 화려한 미인도와 산수화를 걸어 놓았으며 장식장에는 각종 도자기를 진열했다. 초라했던 예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난 집 한가운데에 서서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이를 악물었다.
“이 집은 두고 저기 정원 쪽에 새로 집을 짓죠. 그리고 그 안을 예전 집처럼 만들어야겠어요.”
예전부터 어머니 아버지께서 귀하게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멀쩡한 집을 부숴 버리면 벼락을 맞을지도 몰랐다.
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난 매일 저택을 나갔고 덕분에 기분도 조금씩 나아졌다. 한 번은 저택으로 돌아오는데 대문 앞에서 갑작스레 가마가 땅에 놓였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백장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 전하를 먼저 모시거라.”
오랫동안 그를 보지 못했으니 인사를 하고 싶었다. 밖으로 발을 내민 순간, 가마가 다시 들어 올려졌다. 난 결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말에 타고 있던 사내가 날아오더니 침착하게 날 받아 주었다.
난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굳어지더니 날 안고 있던 손을 풀어 버렸다. 덕분에 난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난 바닥에 얼굴을 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볼 낯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