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9화
애당초, 백천범은 쌍둥이의 순서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딸을 끔찍이 아끼는 묵용감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묵용청양을 막내로 삼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묵용성의 얼굴을 닦아 주며 타일렀다.
“청양이 말이 맞아. 애당초에 청양이가 먼저 태어났거든. 지금이라도 원래의 순서를 찾았으니 더 잘된 거란다. 앞으로 누이가 우리 성아를 더 아껴 줄 텐데, 싫으니?”
황자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 애가 언제 절 아껴 주었다고요. 괴롭힌 적이 더 많은걸요.”
백천범은 아들의 나약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성아, 부황께서 너희 남매의 싸움에 간섭하지 말라 명하신 것은 언젠가 성아 너도 맞서 싸우길 바라시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도움만 받으려 해서는 안 돼.”
황자가 당차게 말했다.
“싸우는 건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잖아요. 육황숙은 싸움 같은 건 안 하신다고요. 게다가 진정한 대장부는 여인과 싸우지 않는 법이에요.”
백천범은 웃음이 절로 났다. 그녀 또한 아들을 몰아세우고 싶진 않았다. 그저 언젠가 스스로 깨닫길 바라는 수밖에.
묵용성이 고자질한 내용은 백천범을 통해 고스란히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청양이 좀 신경 써야겠어요. 오늘 또 성아를 괴롭혔대요.”
황제가 흠칫 놀라는 척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로?”
“자기를 황저라고 부르게 했대요. 성아가 싫다고 하니까 바닥에 넘어뜨렸고요.”
황제는 은근한 기대가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성아가 싫다고 했단 말이오?”
“나중엔 결국 불렀대요. 성아가 어찌 청양이의 상대가 되겠어요.”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이번엔 씩씩하게 맞서나 했더니, 괜히 기대했군.”
“귀신보다 무섭다고 불리는 아이예요. 누가 그 애 앞에서 씩씩하게 맞서겠어요? 게다가 성아만 그래요? 당신도 똑같잖아요. 청양이한텐 늘 져 주잖아요.”
황제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예전엔 모든 이들이 짐을 군신이라 부르지 않았소. 지금은 짐의 딸아이가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가 되었으니 어쨌든 한집안 식구인 것은 확실하오.”
황저가 된 공주는 그제야 담이 작은 동생이 걱정되었다. 동월의 황자로서 훗날 태자 오라버니의 정무를 도와야 하는데, 저리 참깨만 한 담으로 어찌 태자를 보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묵용성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무서운 것을 이겨 낼 수 있다면, 다른 건 별문제도 되지 않을 터였다.
묵용성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무엇이던가? 두말할 것도 없이 표범 점박이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늘 표범이 있는 정원을 찾아가 놀았다. 곧 점박이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묵용성은 단 한 번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심지어는 멀리서 점박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 발걸음을 내딛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그녀는 황자를 꼬드겼다. 눈을 가리고 물체를 알아맞히는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공주는 검은 천으로 황자의 눈을 가린 뒤, 그를 점박이가 있는 정원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낌새를 알아차린 황자가 천을 내리니, 눈앞에 표범 점박이가 있었다.
황자는 잠시 멍하니 넋을 놓았다. 눈빛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겨우 시선이 점박이의 얼굴 위에 고정되었을 때, 그는 까무러치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 함께 놀자는 신호로 받아들인 점박이는 황자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신나게 얼굴을 문질렀다.
가여운 황자는 공처럼 몸을 만 채 점박이의 발에 치여 이리저리 뒹굴었다. 어찌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은 금세 쉬었고 바짓가랑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근처에서 순찰을 돌던 금군이 황자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덕에 황자는 겨우 정원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너무 놀란 황자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침대에 누워서도 자꾸만 경련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하는 탓에 방 안은 태의들로 가득 채워졌다.
공주는 그제야 자신이 크게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혹한 황자의 모습 앞에서, 공주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백천범은 공주를 호되게 혼냈다. 밥도 주지 않고 사당에서 죄를 뉘우치라고 명했다.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있던 공주는 배도 고프고 졸렸지만 어떻게든 버텼다. 황제는 몰래 들어와 공주에게 간식을 전해 주었지만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공주의 눈빛엔 후회와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부황,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저 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고쳐 주려 했던 거에요.”
그 말에 황제는 조금 감격스러웠다.
“부황도 네가 성아를 위해 그리했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네 좋은 마음과 달리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이지. 앞으로는 주의하거라.”
* * *
그녀에게는 은애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물에 비친 달빛처럼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홀로 슬퍼할 수밖에. 그 사내는 그녀가 은애해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국구이자 전원대장군 백장간이었다. 그를 은애해선 안 되는 이유는 그의 높은 신분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신분도 그리 낮진 않았으니까. 그녀는 군주였다. 그것도 황제께서 친히 봉호를 내려주신 군주. 그에게 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건, 그녀와 그의 사이에 황후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후의 큰오라버니이고 그녀는 황후의 의매였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그녀도 그와 남매가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같은 집에 살았다.
그는 그녀에게 무척 잘 대해 주었다. 조용한 후원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살뜰히 보살폈다. 물론 그의 관심은 하인들을 통해 전달되지만 말이다. 저택 관리인은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늘 ‘장군께서…….’라고 말문을 열었다.
관리인이 가져오는 모든 물건과 안부 인사는 전부 장군의 뜻이라고 했다. 정말로 그녀를 끔찍이 아껴 주는 것 같지만, 그게 정말 장군의 뜻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의 신분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았다. 군주가 되었을 때만 해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하늘에서 그녀를 보살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군주라는 신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좋은 인연을 막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난했던 여소쌍으로 지냈다면 백장간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 터였다.
그녀는 스스로와 내기를 해 보고 싶었다. 화려한 옷을 벗고 백성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 예전에 살았던 골목으로 향했다.
황제가 민가의 한 여자아이를 다격군주로 봉했다는 건 모든 백성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다격공주가 나라는 건 아무도 모를 테지.
예전에 살던 집에 도착하니, 새로운 사람이 살고 있는지 벽에 나무패가 걸려 있었다. 나무패에는 두 글자가 또렷히 새겨졌다.
「왕택王宅」
황후인 그녀의 언니는 그녀의 집만큼은 반드시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나중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었고, 그녀를 이 집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장군의 저택으로 보내 주었다. 아마 이 집이 그녀에게 더는 필요치 않다고 여긴 것이겠지. 자연스레 그때의 약속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녀가 자란 곳이자 부모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었다. 집안 곳곳을 볼 때마다 절로 추억이 떠오르는 그런 장소였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겠지만 그래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곳은 애당초 그녀의 집이고, 장군의 저택을 떠나면 이곳에서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교활한 토끼는 도망칠 구멍을 세 개나 만들어 놓는다지만, 그녀에게는 한 개면 충분했다.
홀로 이곳을 찾았지만, 군주로 지낸 세월이 있으니 난 제법 군주에 걸맞은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당히 문을 두드리니, 땅딸막한 키에 뚱뚱한 사내가 나와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굴 찾아온 것이냐?”
“그러는 넌 누구길래, 내 집에 있는 것이야?”
뚱보가 벽에 있는 나무패를 가리켰다.
“눈이 삔 거야, 글씨를 못 읽는 거야. 왕택, 여긴 내 집이라고.”
난 손을 내밀었다.
“집문서를 가져와 봐. 누가 이 집을 네게 팔았는지 봐야겠으니까.”
뚱보는 날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며 내쫓으려 했다.
“가, 가. 어디서 머리 누런 계집이 와서는. 어서 썩 꺼져!”
기분이 나빠진 터라, 나는 머리카락을 슬쩍 바라보았다.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머리가 조금 노랗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밥도 잘 먹고 건강해진 덕에 머리카락도 검고 윤기가 흘렀다. 한데 어딜 봐서 머리 누런 계집이라는 거야?
“억지 쓰지 말고 집문서나 내놔. 그럼 갈 테니까.”
“하! 계집이면 내가 못 때릴 줄 아나!”
뚱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날 밀쳤다. 난 비틀거리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집문서 안 내놓으면 관청에 고발할 거야!”
고성이 오가니 이웃 주민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조용히 쑥덕거렸다.
“와, 여씨 집안 딸이 아닌가? 어찌 갑자기 돌아왔지?”
“그러게. 입궁을 하지 않았나? 아직 나올 때가 안 되었을 텐데 어찌 나온 것이지? 설마 도망친 것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역시 궁은 다른가 보네. 허리가 다 꼿꼿해지고 말이야.”
“많이 변하긴 했구먼. 들어갈 때만 해도 머리가 누렇게 떴는데 지금은 새까매졌어. 궁에서 먹을 걸 잘 주는가 보군.”
“…….”
난 기세등등하게 뚱보에게 물었다.
“들었지? 다들 날 알잖아. 내가 이 집 주인이라는 걸 저들이 증명해 줄 거야.”
한데 뚱보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목청을 높여 이웃들에게 물었다.
“다들 말해 보시오. 이 집이 이 계집 거요?”
웅성대던 소리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웃 주민들 틈에는 마부도 있었다. 그는 이미 혼인을 했는지 튼실한 몸집의 부인이 곁에 있었고, 부인 품에 안긴 통통한 아들은 자그마한 입을 옴짝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마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충직하고 성실한 마부마저 이 뚱보를 건들 수 없었다.
그때, 이장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날 보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고, 여소쌍 네가 어찌 돌아온 것이냐? 궁을 도망치면 죽을죄라는 걸 모르느냐? 어서 가거라. 들키지 않았을 때 어서 돌아가래도!”
나는 곧바로 이장에게 물었다.
“내 집에 어째서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거죠?”
이장은 대꾸도 하지 않고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밀어냈다.
“어찌 이리 철이 없는 것이야. 궁에서 도망치는 건 구족을 멸하는 대역죄란 말이다. 이웃 모두에게 해를 입히고 싶은 것이냐!”
일부러 모두에게 겁을 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가 세상 물정을 안 겪어 본 사람도 아니고, 그저 웃음만 났다.
“이장님, 겁주지 마세요. 구족을 멸한다 한들 우리 여씨 가문이 죽임을 당하지, 동네 사람들이 왜 목이 날아간답니까? 동월의 법을 함부로 바꾸려 하지 마세요. 황상께서 아시면 이장님도 벌을 받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