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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28)화 (627/1,192)

제628화

고작 네 살밖에 되지 않은 공주는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를 뜯고 나무에 올라 새 둥지를 뒤지고,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 등 위험천만한 일을 저질러 댔다. 노비들은 사석에서 그녀를 귀신보다 더 무서운 공주라고 불렀다.

반면 묵용성은 어수룩하고 겁이 많았다. 늘 백천범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누군가를 만나면 부끄럽게 웃는 게 꼭 여자아이 같기도 했다.

황제는 두 아이의 성별이 뒤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 아이는 배짱이 크고 한 아이는 겁이 많고 소심하니,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걱정스럽다가도 백천범을 똑 닮은 공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담이 크면 크라지,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공주이니 조금 제멋대로라고 해도 그리 나쁠 건 없었다.

하루라도 청양을 보지 않으면 황제는 불안했다. 그는 일을 하다가도 종종 붓을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 그때, 자그마한 몸집이 뛰어와 그의 다리를 껴안았다.

황제는 손을 뻗어 공주를 안아 올렸다. 공주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밝은 황색 옷을 입었는데 앞섶에 달린 매화 모양 매듭 단추는 다 풀어진 채 축 늘어졌고, 바지를 입은 데다 방퇴(바지 밑단을 고정하는 것)까지 차고 있었다. 얼굴은 먼지가 잔뜩 묻어 꼭 얼룩 고양이 같았다. 공주는 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따지기 시작했다.

“부황, 저를 무시하시는 거예요?”

황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부황이 언제 무시를 하였다고?”

“제가 먼저 태어났는데 어째서 여동생인 거예요. 묵용성은 저보다도 약한데 어찌 제 오라버니를 할 수 있겠어요?”

황제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네가 먼저 태어났다고 누가 그러더냐?”

“누가 그랬는지는 안 알려 줄 거예요. 정말이에요? 아버지는 황제잖아요. 천자의 입으로 절 속이시면, 흥!”

공주가 고개를 쳐들고 위협적인 표정을 해 보였다.

“널 속이면 어찌할 것인데?”

“그럼 앞으로 저도 부황을 속일 거예요. 부황께선 큰 사기꾼이고, 저는 작은 사기꾼이에요.”

황제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무엄하다. 어디 부황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그가 화제를 돌렸다.

“옷은 어찌 된 것이냐? 어째서 사내아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야. 하,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어디서 난 것이냐?”

“녹하 고고한테 부탁해서 만든 거예요. 어머니가 아주 용맹스러워 보인대요.”

황제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니가 이 옷을 입으라고 허락했단 말이냐? 포고를 할 때 입는 옷이란 걸 모른단 말인가?”

“어머니도 어릴 때 사내아이들이랑 싸웠대요. 그게 뭐 어때요. 싸워서 이기는 게 중요하지.”

“…….”

그래,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해서 누구와 포고를 하였느냐? 이기긴 했느냐?”

“영씨 집안 사내랑요. 졌어요.”

“졌어?”

황제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애가 널 봐주지도 않았단 말이냐?”

“누가 봐 달래요?”

공주는 예쁘고 커다란 두 눈을 희번덕였다. 비록 패배했지만 명예롭게 싸웠다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그녀가 말한 영씨 집안 사내는 영구의 아들, 영안寧安이었다. 제 아비가 영십寧十으로 짓길 원했지만, 기홍이 죽어도 싫다고 하는 바람에 영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거꾸로 읽으면 안녕이라는 말이 되듯, 평안한 삶을 살라는 의미였다.

영안은 공주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태자가 하듯 어른처럼 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닮아서 말수가 적었다. 아이와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면 절로 어색하고 불편할 정도였다.

“해서 그 애가 널 아프게 하였느냐?”

황제는 영안의 고지식한 성격을 잘 알았기에 공주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승부를 떠나서 이리 귀한 공주가 사내아이의 힘을 어찌 버틸 수 있을까? 분명 어딘가 부딪치고 다쳤을 것이다.

황제는 공주를 내려놓고 팔과 무릎을 살폈다. 역시나 몇 군데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가 벌컥 화를 냈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놈, 감히 우리 공주를 다치게 하다니! 여봐라, 가서 영안을 당장 끌고 오너라!”

옆을 지키던 시위가 곧장 명을 받잡았다. 속으론 네다섯 살 된 아이들끼리 서로 싸운 일에 황제가 끼어드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공주가 서둘러 시위를 불렀다.

“멈춰, 가지 말아요!”

황제가 물었다.

“어째서? 널 때렸으니 부황이 네 대신 분풀이를 해 줘야 할 것 아니더냐?”

“그러면 다시는 저랑 안 싸워 줄 거란 말이에요.”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청양아, 넌 공주다. 앞으로는 사내아이들이랑 섞여 놀지 말거라. 넌 다른 것을 배워야지. 자수라든가 고쟁이라든가…….”

“어머니도 자수는 잘 못 하잖아요. 예전에 부황께 드리려고 주머니에 수를 놓았는데 손가락마다 다 상처가 났대요. 제가 그렇게 상처가 나면 좋겠어요?”

“…….”

그래,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황제가 화제를 바꾸려 했지만 공주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부황, 말 돌리지 마세요. 전 여동생 말고 누이를 할 거예요. 어서 명을 내려 주세요. 묵용성은 앞으로 절 누님이라고 부르라고 말이에요.”

“…….”

황제가 침묵을 지키자 아이는 더욱 힘껏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황제가 허리를 약간 구부릴 정도였다.

“네? 명을 내리실 거예요?”

황제가 공주를 타일렀다.

“청양아, 여동생으로 지내면 오라버니들이 널 지켜 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묵용성 그 겁쟁이가 절 지켜준다고요?”

“오라버니에게 그리 말해선 안 된다.”

“명을 내려주실 거예요?”

황제의 묵묵부답에, 결국 공주가 고개를 들어 올린 채 통곡하기 시작했다.

“제가 누이인데 여동생을 하라니요. 이건 절 업신여기는 거라고요. 엉엉…….”

그녀가 울면 황제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소매로 공주의 눈물을 닦아 주며 애달프게 달랬다.

“착하지, 뚝 그치거라. 넌 공주다. 네가 울면 눈물이 아니라 금 방울을 흘리는 것이란 말이다. 이리 귀한 것을 어찌 흘린단 말이냐. 그래, 부황이 약속하마. 그럼 되겠느냐? 네가 누이를 하고 성아가 남동생을 하거라.”

공주는 언제 울었냐는 듯 황제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말은 천금이니까 딴말하시면 안 돼요!”

“이런 철면피 같으니.”

황제가 공주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

“어서 옷을 갈아입고 세수부터 하거라. 온종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리면 체통은 언제 지킨단 말이냐?”

공주는 물러날 때를 알고 곧장 예를 갖추었다.

“소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주가 몇 발짝 물러나려는데 황제가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울면서 떼를 쓰는 방법은 누가 알려 준 것이냐?”

공주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제가 혼자 생각해낸 거예요.”

황제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알려 줬을지 뻔했다. 가동 이 바보 같은 놈, 너무 오랜 시간 근육을 풀어 주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우선은 기억해 두었다가, 훗날 한 번에 갚아 주리라.

* * *

다들 공주보다 황자 묵용성을 보살피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워낙 순진하고 겁이 많은 아이라 보는 사람마다 그를 가엽게 여겼다.

묵용성은 담이 작았다. 지붕 위에 올라가거나 나무 타기, 물에 들어가는 것은 묵용성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마다 꾀죄죄한 공주의 몰골에 비하면 황자는 늘 깨끗하고 단정했다. 얼굴도 옥처럼 새하얀 그는 어머니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묵용성은 공주처럼 위험천만한 놀이를 싫어하는 대신 고쟁을 켜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육황숙인 진왕을 숭배했다. 묵용성은 육황숙처럼 수려한 사내가 되고 싶어 했고, 진왕에게 고쟁을 배웠다. 지난번 황제의 탄일 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곡을 연주하여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겁이 많긴 했지만, 묵용성도 황자의 자존심은 있었다. 몇 년간 여동생이라고만 여기다가 갑자기 누이라고 부르라니. 이 일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묵용청양이 아무리 그를 압박해도 그는 절대 누이란 말을 뱉지 않았다. 이에 공주가 흉포한 얼굴로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황저皇姐라고 불러, 어서.”

황자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기어코 자존심만은 꺾지 않았다. 저 희번덕거리는 눈을 봐라. 정말인지 귀신도 무서워할 공주였다. 평생 그녀를 안 보고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공주가 코웃음을 치며 발을 걸자 황자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공주가 그를 깔아뭉개며 머리를 때렸다.

“황저라고 불러.”

황자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대성통곡했다. 정말 서러웠는지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기만 해도 절로 가여워지는 몰골이었다. 황제도 그런 황자의 심성이 늘 걱정이었다. 몸이 물로 만들어지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툭하면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공주는 서둘러 황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황자가 우는 순간 다들 정신없이 달려올 터였다. 지금도 각자의 노비가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차마 그녀를 끌어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누구도 감히 귀신보다 무서운 공주를 건드리지 못했다.

황자가 이리도 서럽게 우는 이유는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옷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었다. 심각한 수준의 결벽증과 강박증이 있던 황자는 모든 물건을 깨끗하고 가지런하게 두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물건을 끔찍이 아꼈고 아주 조금의 흠도 용납하지 않았다.

더 어릴 땐 둘이 똑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는데, 공주는 몇 번 가지고 놀지도 않았는데 팔다리가 없어지고 끊어지기 일쑤인 데다 금세 사라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황자의 장난감은 언제나 처음처럼 깨끗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런 황자를 어떻게 협박해야 할지 공주가 모를 리 없었다. 공주는 그의 입을 틀어막은 채 말했다.

“소리 내기만 해. 새로 지은 네 월백색 옷을 가위로 다 잘라 버릴 테니까.”

황자는 육황숙의 월백색 장포를 부러워했다. 푸른 대나무가 수놓아진 장포로, 하늘하늘한 자태가 어찌나 멋있는지 그도 한 벌 갖고 싶었다. 결국 백천범이 녹하에게 부탁했고, 얼마 전에 완성품을 전해 받았다. 아까운 마음에 차마 입어 보지도 못하고 옷장에 고스란히 넣어 둔 그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공주가 자신의 약점을 공략하자 황자는 당해 낼 길이 없었다. 곧 그의 입에서 황저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공주는 만족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그럼 이 고생 안 해도 되잖아. 내 멋대로 하는 게 아니라 부황께서 명을 내리신 거야. 앞으로는 내가 네 누이고 넌 내 동생이야. 이 일을 거부하면 넌 황제의 명을 어기는 거니까 부황께 벌을 받아야 해.”

황제라는 말에 황자는 몸을 흠칫 떨었다. 황제는 그가 황궁에서 표범 점박이 다음으로 무서워하는 존재였다. 황제가 그에게 눈을 부릅뜰 때면, 그는 곧장 몸을 떨며 소변을 찔끔 지릴 정도였다.

원하는 바를 이룬 공주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사라졌고, 황자는 훌쩍거리며 어머니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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