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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27)화 (626/1,192)

제627화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도홍빛 꽃과 푸른 나뭇잎은 늘 그랬듯 풍경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희망이 가득한 계절에, 황후에게 산기가 찾아왔다. 궁 안은 절로 소란스러워졌다. 궁 안의 궁녀와 태감은 누구를 만나든 황후의 상태를 물었다.

승덕전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위 태의는 스무 명이 넘는 의관들을 대동한 채 문밖을 지켰다. 더운 날씨도 아니건만, 다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나운 맹수처럼 끊임없이 정원을 서성이는 황제 때문이었다. 그가 위중청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둘째 아이는 쉽게 나온다 하지 않았느냐?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단 말이냐?”

첫아이를 낳을 때의 충격 때문일까, 황제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엔 쌍둥이가 아니던가. 혹여 난산이 이어진다면, 그러다 혹여라도……. 그는 차마 그 후의 일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황상.”

위중청이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이를 받는 마마 말로는, 황후께선 지금 양수가 조금 나온 상태라고 합니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양수가 일찍 터지는 바람에 산모가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위중청의 팔을 붙잡은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양수가 나왔다고? 하, 하면 방법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영구가 그의 앞에 다가와 고했다.

“황상, 더 힘을 주셨다간 위 태의의 팔이 부러질 것입니다.”

황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힘을 풀었다. 위중청은 영구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짓고는 가볍게 팔목을 흔들었다. 뼈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지만,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는지 시퍼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영구가 황제를 타일렀다.

“황상, 여인들이 아이를 낳을 때는 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금방 괜찮아지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어라? 어쩐지 귀에 익었다.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남 얘기는 식은 죽 먹기지. 지금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데 이게 금방이란 말이냐?”

“…….”

기홍이 아이를 낳을 당시, 그녀 또한 이곳에서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했고 영구는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황제가 그를 안심시키며 해 준 말이 아니던가. 어찌 똑같은 말이 본인에겐 통하지 않는 것일까. 학평관도 황제에게 다가왔다.

“황상, 마마께선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위 태의 말처럼 첫째 아기씨보단 더 수월하게 낳으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께선 마마의 기둥이십니다. 황상께서 초조해하시면 마마께선 얼마나 더 초조해하시겠습니까?”

그때, 월규가 밖으로 나왔다. 황제가 급히 물었다.

“낳은 것이냐?”

“황상께 아룁니다. 아직입니다.”

황제가 성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아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넌 무엇 하러 나왔단 말이냐?”

“마마께서 국수를 드시고 계신데 식초를 넣고 싶다고 하시어 식초를 가지러 가는 길입니다.”

황제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 국수를 먹는다고? 그가 복도로 들어서니 가동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황상,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창문으로만 보려는 것이다.”

가동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말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황후는 첫아이 때의 기억을 되짚어 일찍이 서 태후와 진왕에게 이 일을 상의했다. 다들 황제가 자제력을 잃으면 체통마저 버린다고 생각해 황제의 복도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임무를 가동이 맡게 된 터였다.

황제도 분명 그리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이제는 말을 번복하지 않는가. 가동을 한쪽으로 밀친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창가에 바짝 기대었다. 좁은 창살 틈으로 백천범이 커다란 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입가가 번지르르해질 만큼 한입 가득 국수를 물고 있었다. 월규가 식초를 가지고 들어오자 국수에 식초를 뿌리더니, 그녀가 다시 젓가락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황제는 잔뜩 졸였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

“천범, 어찌 이런 때에 국수가 넘어간단 말이오?”

백천범의 낭랑한 목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많이 먹어야 힘을 쓰죠.”

별안간 이상함을 깨달은 그녀가 고개를 들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어서 가세요!”

그녀의 매서운 호통에 황제는 곧장 뒷걸음질 쳤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태자가 뒷짐을 진 채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황, 군자는 실없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황제께서, 쯧…….”

그를 몹시 하찮게 여기는 말투였다. 황제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 이런 어린놈이 제 아비를 가르치려 들다니. 그러나 지금은 혼을 낼 겨를도 없었다. 뚱한 얼굴로 자리를 옮기니 이번에는 서 태후가 조용히 그를 타일렀다.

“황후의 목소리 좀 들어 보세요. 얼마나 기력이 넘칩니까? 애가는 황후가 순산할 것이라 믿습니다. 애가가 날마다 밤낮으로 경전을 외며 황후 모자를 지켜 달라 빌었으니, 부처님께서도 애가의 목소리를 들으셨을 겁니다.”

한편, 진왕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더니 옆에 있던 학평관에게 물었다.

“태자 전하를 낳을 때도 저러시었는가?”

학평관이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신 편입니다. 지난번에는 마마께서 워낙 고통스러워하시니 황상께서는 거의 초주검이 되셨지요.”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울음도 그치지 못하실 정도였습니다.”

진왕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는 위엄이 넘치는 황형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억지로 일각 정도 앉아 있었지만, 황제는 또다시 일어나 정원을 서성였다. 이따금 서양 시계를 꺼내 확인하더니 또다시 위중청에게 다가가 물었다.

“반 시진이 또 지났는데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야?”

위중청이 말했다.

“마마께서 방금 국수를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국수를 먹는데 반 시진이나 걸린단 말이냐? 황후는 음식을 빨리 먹는다. 새 모이만큼 먹는 여인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한데 어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무슨 소리라도 들려야 상황을 알 터인데, 이리 쥐 죽은 듯 고요하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위중청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의원이었다. 산모가 아이를 낳는 일은 그도 책으로만 배운 게 다였다. 게다가 부인도 없는 그로서는 황제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첫아이를 낳은 경험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초조해한단 말인가?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황제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백천범이 울부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런 정적에 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황제는 심호흡을 하고는 복도로 뛰어갔다. 가동이 빠르게 그를 가로막았다. 뒤쪽에 있던 영구도 잽싸게 달려와 황제 앞을 막아섰다.

황제가 화를 내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아이를 받는 두 마마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강보를 품에 안고 있었다. 두 마마가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상, 감축드립니다. 공주 아기씨와 황자 아기씨입니다. 황후 마마께서 황상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마마께서는 건강하시니 황상께선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입니다.”

황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마마에게 안겨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낳았다고? 비명도 듣지 못했는데?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이를 구경했다. 황제 역시 활짝 웃는 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이 다 빠질 만큼 초조해하고 가슴을 졸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렇게 금방 끝나 버리다니.

그는 사람들 틈을 뚫고 가까이 다가가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반쯤 뜬 눈으로 신기한 듯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순간 심장이 녹아 없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옆길을 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숨을 들이마시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핏물이 섞인 대야는 아직 바닥에 놓여 있었다. 침대에 누운 여인은 진이 다 빠진 듯 피로해 보였지만, 두 눈을 반짝이며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황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고생 많았소. 내 체면을 제대로 살려 주는구려. 한 번에 둘이나 낳아 주다니.”

백천범이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정말 위 태의 말이 맞았어요. 둘째는 그렇게 힘들지 않더라고요. 힘을 꽉 주니까 금방 나왔어요.”

“…….”

볼일을 보는 것만큼 쉽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꼭 볼일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

백천범이 나긋하게 말했다.

“안아 줘요.”

황제가 곧장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백천범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행복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기는 봤어요?”

“봤소. 아들 하나, 딸 하나. 다들 당신을 닮아 둘 다 아주 예쁘오.”

“거짓말. 방금 태어났는데 누굴 닮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창밖으로 따사로운 봄 햇살이 아른거렸다. 두 부부는 감격에 젖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전부 한 번씩 맛본 그들이었다. 세상살이라는 게 정말 그러했다. 고난 속에서 기쁨이 찾아오고, 달콤함 속에서 씁쓸함을 느끼고.

모든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서 만나는 귀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희로애락을 겪은 인생이야말로 값진 것이었다. 슬픈 일은 잊고 아름다웠던 모든 시간을 기억하며 가슴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지 않아야 햇살이 절로 따르는 법이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겪어야 비로소 인생이다.

그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 * *

황제는 두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공주의 이름은 묵용청양墨容淸揚이었다. ‘아리따운 여인이여, 미목수려하기도 하여라 有美一人淸揚婉兮’라는 시구에서 따온 말이었다. 황자의 이름은 밝게 빛난다는 뜻을 담아 묵용성墨容晟으로 지었다.

사실 청양이 먼저 태어났지만, 공주가 몹시 사랑스러웠던 황제는 그녀를 막내로 삼았다. 두 오라버니의 보호를 받으며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귀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묵용청양은 깜찍한 것은 물론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는 공주로 자라고, 묵용성은 문무에 모두 능한 지혜로운 아이로 자라 훗날 두 아이가 태자의 든든한 양팔이 되리라 믿었다.

한데 두 아이가 그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랄 줄이야. 묵용청양은 깜찍하긴 했지만, 어른들의 말은……. 백천범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묵용청양을 통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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