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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26)화 (625/1,192)

제626화

밤이 되자 황제가 백천범을 자신의 몸 아래 두며 말했다.

“린아가 오늘 한 말, 기억하오?”

백천범은 수작을 부리려는 그의 손을 막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요?”

“린아 혼자 얼마나 외롭겠소.”

“할 말 있으면 말로 하면 되지 왜 손을 들이미는 거예요.”

백천범이 그를 밀쳐냈다.

“달라붙지 좀 말아요. 오늘 기홍의 곁을 지키느라 저도 혼이 쏙 빠졌다고요. 피곤하니까 그런 얘기는 내일 다시 해요.”

그녀는 등을 돌려 침대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황제가 탄식했다.

“허어, 무엇 하러 내일까지 기다린단 말이오. 이런 일은 빨리할수록 좋소. 그래야 결과도 빨리 얻는 법이지.”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자꾸 꼬실 생각하지 말아요. 언제는 빨리 안 했나요? 근데 아이는요?”

황제는 분한 얼굴로 그녀의 새하얀 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 어여쁜 여인을 앞에 두고도 품을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리곤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매끄러운 그녀의 살갗이 손끝에 닿자 피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좀 계세요.”

백천범이 언짢은 듯 그의 손을 치웠다.

“졸리단 말이에요.”

황제는 넉살 좋게 또다시 손을 가져갔다.

“아니, 허리에 언제 이리 살이 붙었소? 살쪘다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가 그녀의 허리 전체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제 보니 살이 제법 많이 붙어 있었다. 백천범도 자신의 배를 더듬으며 말했다.

“네, 살이 좀 쪘어요. 요즘은 입맛이 좋아서 많이 먹다 보니까 살이 금방 찌더라고요.”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예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며칠 만에 이렇게 살이 붙는단 말이오?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이오. 위중청을 불러 살펴보라 하는 게 좋겠소. 다른 증상은 없었소?”

백천범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 원래 가을, 겨울이 되면 많이 먹는다고요. 그러니 자연히 살도 찌겠죠. 지금은 너무 늦어서 위 태의도 자고 있을 거예요. 내일 얘기해요.”

하지만 황제는 곧장 위중청을 불러오라고 했다. 태의를 불러오라는 말에 학평관은 괜스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의 목소리를 들으니 황후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학평관은 소복자를 위중청에게 보낸 후, 월규를 깨워 함께 문 앞을 지켰다.

위중청은 황제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달려 나갔다. 승덕전에 도착해서야 황후가 살이 찐 일로 자신을 불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위중청이 조심스럽게 황후의 맥을 짚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황제가 초조하게 물었다.

“어떠한가?”

위중청은 손을 슬쩍 내저으며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잠시 집중하던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감축드립니다, 황상.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황제가 멍하니 물었다.

“언제 회임을 했단 말이냐?”

“한 달이 조금 넘은 듯합니다.”

황제가 곧장 성을 냈다.

“네가 그러고도 의정이란 말이냐? 그간 황후의 회임도 몰랐다니!”

위중청으로서는 꽤나 억울한 일이었다. 황후는 특별한 일이 없을 땐 진맥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한 달 만에 안 것도 빠른 편에 속했다. 백천범이 황제에게 눈을 부릅떴다.

“저도 몰랐는데 위 태의가 어떻게 알겠어요?”

위중청이 조심스레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좋, 좋은 소식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말하거라.”

백천범도 눈을 반짝였다.

“어서 말해 주세요.”

“마마께서 쌍둥이를 회임하셨습니다.”

“잘됐네요!”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에요? 아님 딸이에요?”

“그것이…….”

위중청이 난처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직은 너무 초기라 신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괜찮아요.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까요.”

황제도 기뻐하긴 마찬가지였다.

“쌍태아를 가졌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느냐?”

“쿨럭, 크흠.”

위중청은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것이, 방사房事를 주의하셔야…….”

“짐도 그건 안다. 삼 개월 뒤에야 합방이 가능한 것이 아니더냐.”

“쌍태아이기 때문에 정말 주의하셔야 합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위중청의 목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가 이를 꽉 깨문 채 말했다.

“해산 전까지 최대한 하지 않으시는 게…….”

백천범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

* * *

소식을 들은 학평관과 월규도 기쁜 마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번엔 황후가 임신을 조급해하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두 명의 아이를 점지해 준 게 아닌가.

황후의 회임 소식에 온 궁이 기쁨에 휩싸였다. 가장 기뻐한 이는 역시 서 태후였다. 안 그래도 간절히 바라던 소식인데 하늘이 굽어살피어 한 번에 두 명이나 점지해 준 듯했다.

그녀는 불상 앞을 찾아 절을 올리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 황각사에 향유香油를 공양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평소에는 황제를 피해 다니며 자안궁 밖을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승덕전으로 달려갔다. 혹여 노비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소식이 있을까 봐 자신이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백천범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와는 달리 초기 증세도 없었고 잘 먹고 잘 자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한겨울이 되며 그녀는 임신 삼 개월에 접어들었다. 다만 배가 어찌나 불러오는지, 다른 산모들보다 오륙 개월은 더 앞선 것 같았다.

황제는 그쪽 방면의 생각은 고이 접고 늘 가슴을 졸였다. 백천범이 걷다가 넘어질까 봐, 혹은 몸이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걷기 힘들까 봐 걱정으로 애를 태웠다. 그는 특별히 그녀를 위한 가마를 만들었지만, 백천범은 타려 하지 않았다. 직접 걷는 것만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빨리 걸었고, 언덕이나 계단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몸조리 중에 황후의 소식을 접한 기홍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늘 주인의 음식을 걱정했다. 백천범의 입맛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녀가 임신했을 때 무얼 먹고 싶어 했는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몸조리에 힘써야 했으니, 늘 영구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가 궁 안의 상황을 물었다.

영구는 허리를 굽히고 요람 속 아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급해할 거 없습니다. 하늘처럼 귀한 주인을 누가 감히 소홀히 모시겠습니까? 산달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총관리는 벌써 유모를 들이려 할 정도입니다. 무려 열여섯을 들이라는 명을 내리더군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마마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총관리는 너무 긴장한다니까요. 지난번에 유모를 들였어도 아무 소용없었잖아요. 마마께선 직접 돌보는 걸 좋아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유모가 꼭 필요할 거예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잠에서 깬 아이가 칭얼댔다. 기홍이 말했다.

“이리 주세요. 배가 고픈 걸 거예요.”

영구가 조심스레 아이를 요람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 그 자세가 제법 능숙했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홍은 절로 웃음이 났다. 늘 차갑고 냉정하기만 하던 영 대인이 이리 온순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영구는 부인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가 통통한 얼굴을 파묻고 자그마한 입을 꼼질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영구가 빤히 바라보니, 기홍은 절로 부끄러워졌다.

“누가 보면 서방님이 드시고 싶어 하는 줄 알겠어요!”

영구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어찌 아이의 것을 빼앗아 먹겠습니까?”

기홍이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선 그리하셨잖아요.”

영구도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 입가에 묻은 젖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영구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아 주고는 아이를 요람에 눕혔다. 그사이 기홍은 앞섶을 내리고 매무새를 정돈했다. 가슴 앞쪽에 젖은 흔적이 보이자 영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아,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땐, 많이 먹지 못해서 그, 그리 붓는다고 하던데, 그런 것입니까?”

기홍이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왜 안 붓겠어요. 아이가 크면 더 많이 먹을 테니 괜찮아질 거예요.”

영구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도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 내가 좀 도와줄까요?”

기홍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아이참, 어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황상께서도…….”

하신 일을 그라고 못 할까. 말로 표현하는 게 서툴렀던 영구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걸 더 좋아했다. 기홍은 급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지만, 이윽고 한결 편해져 못이기는 척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고개를 든 영구는 잘 쪄진 새우처럼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 다, 다음번에 또 불편하거든, 내, 내가 잘 통하게 해 드리지요.”

“네.”

목까지 새빨개진 기홍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대꾸했다.

* * *

녹하는 축 처진 채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가동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인,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녹하는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청화자기 찻잔을 이리저리 돌렸다.

“또 속상해서 그래? 기홍도 막 아기를 낳았고 마마께서도 회임하셨는데, 우리한테만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가동이 자리에 앉아 녹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냥 날 아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다들 나더러 모자라다고 하잖아.”

녹하가 피식 웃더니 가동의 턱을 꼬집었다.

“자기가 모자란 걸 알긴 아는구나. 태자 전하께서도 저리 성장하셨는데 당신은 언제 크려는지. 조만간 태자께서 같이 다니려고 하지도 않으실걸.”

“부인만 날 안 미워하면 돼. 우린 우리의 삶을 살면 되니까. 괜히 부러워할 것 없어. 남들한테 보여 주려고 사는 인생이 아니잖아. 우리만 편하면 되지. 난 이렇게 지내는 것도 정말 좋아.”

그러나 녹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자를 들이든가, 첩을 들여야겠어. 어떤 게 더 낫겠어?”

가동이 진지하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그래도 아이는 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게 나을 것 같아. 안 그럼 나중에…….”

녹하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벌컥 성을 내며 그를 때렸다.

“그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네, 이 나쁜 놈!”

가동이 머리를 감싼 채 꽁무니를 뺐다.

“오해야! 억울하다고! 난 정말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 정말이야, 맹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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