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5화
“무슨 일 있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문득, 백천범은 어깨 부근이 따뜻하게 젖는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황제를 밀어내며 살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등진 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방금 말하지 않았소. 문우가 떠났다고.”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백천범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황급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오른쪽 팔은 예전처럼 매끈했다. 볼록 튀어나왔었던 덩어리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 되면 백천범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넋이 나간 듯 웅얼거렸다.
“그 애가 우릴 속인 거 맞죠? 그 애가… 죽어야 향고를 뺄 수 있는 거였어요. 맞죠?”
등을 돌리고 있던 황제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가장 후한 대우로 장례를 치러 주라고 이미 분부했소. 떠나는 날이 되거든 함께 그 애를 배웅해 줍시다.”
백천범이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지금 가서 봐야겠어요.”
황제가 그녀 앞을 막았다.
“너무 늦었소. 내일 갑시다.”
“아뇨. 지금 가야 해요. 마지막 모습을 봐야겠어요.”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알았소. 마차를 준비하라 이르겠소.”
그가 백천범에게 겉옷을 입혀 주었다.
“그 애 앞에서 울지 않길 바라오. 당신이 울면 가는 길이 편치 않을 것이오. 바깥에 비가 내리니 조심하고.”
“알겠어요.”
백천범은 고개를 숙여 황제가 허리끈을 대신 동여매 주는 걸 지켜보았다.
“저랑 같이 안 가실 거예요?”
“난 가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두 눈꺼풀을 무겁게 드리운 채 말했다.
“그 애에게 인사를 한 뒤 빨리 돌아오시오.”
백천범이 떠난 뒤, 홀로 남은 황제는 텅 빈 방 안에서 오도카니 서 있었다. 한참을 넋을 놓은 듯 있던 그가 천천히 서재로 향했다. 누구의 시중도 받지 않고 직접 종이를 펼친 그는 밀서를 쓴 뒤, 영구를 불렀다. 하지만 영구를 대신해 학평관이 들어왔다.
“황상, 기홍의 복통이 심해 영 대인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황제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해산을 한단 말이냐?”
“그건 아닐 듯합니다. 위 태의 말로는 팔월에야 나올 거라 했는데 벌써 복통이 있다고 하니 영 대인이 기홍을 찾아간 것입니다. 아, 조금 전 태자 전하께서 황상을 찾으셨습니다. 황상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기에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잠시 뒤에 다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전하께 지금 오셔도 좋다는 기별을 넣을까요……?”
“무슨 일로 짐을 찾는단 말이냐?”
“그것까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짐이 가 보겠다.”
황제는 밀서를 문진 아래 두고 밖으로 향했다. 그가 떠나자 자그마한 몸집이 곧장 책상 앞으로 다가와 밀서를 펼쳤다. 밀서는 이천행 장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내용은 딱 한 줄뿐이었다.
「비밀리에 남원에 잠입해 여제를 시해하라.」
태자는 밀서를 읽고 생각에 잠겼다. 붓을 들고 먹을 묻히려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고 확인하니 십칠이었다. 태자가 십칠에게 분부했다.
“밖에서 망 좀 봐줘.”
십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하, 이곳은 황상의 서재입니다. 이리하시면 아니 됩니다.”
태자가 눈을 부릅떴다.
“경고하는데, 과인을 화나게 하지 마. 과인은 꼭 복수를 하는 사람이니까. 황상이 되거든 널 가만두지 않겠어.”
사희가 조용히 타일렀다.
“십칠, 전하야말로 우리의 주인이 아니오. 전하의 말씀이 맞소. 어서 밖을 지키시오.”
십칠은 잠시 망설이다 밖으로 향했다. 사희는 재빨리 먹을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태자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한 글자만 쓰면 되니까.”
태자는 붓을 들고 조심스럽게 ‘아니 불不’자를 써넣었다. 덕분에 밀서의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비밀리에 남원에 잠입해 여제를 시해하지 마라.」
사희가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전하, 남원의 여제는 요망한 할멈이라며 미워하지 않으셨습니까?”
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부황께서 그러셨어. 죽는 건 무섭지 않다고. 정말 무서운 건 죽지 못해 사는 거라고. 이렇게 일찍 죽이는 건 그 할멈이 너무 편하게 가는 거야.”
“하지만 내용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시해하지 않을 거면 무엇 하러 남원에 잠입한단 말입니까?”
태자는 밀서를 들고 조심스럽게 바람을 불어 먹물을 말렸다.
“괜찮아. 못 알아보면 더 좋지. 나중에 직접 처리할 거야.”
태자는 밀서를 다시 접어 문진 아래에 둔 뒤, 사희와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왔다.
먼저 이 사건이 어떻게 끝맺었는지 말하자면, 황제의 밀서는 두 달 후 이천행 장군에게 전해졌다. 밀서를 펼친 그는 곧장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우선은 내용이 말이 되지 않았고, 중간에 적힌 ‘불不’자는 나중에 끼워 넣은 흔적이 역력했다. 게다가 황제의 필체도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밀서를 변조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황상의 밀서에 손을 댄단 말인가? 이 장군은 감히 추측할 수 없었기에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서신을 쓴 뒤 그 사이에 밀서를 넣었다. 결국 밀서는 다시 황제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태자는 난생처음 매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황후 또한 밀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황제도 시해의 명을 내리지 않았다. 여제를 시해하려던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말이다.
* * *
백천범이 위지가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위지문우는 아직 입관 전이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그는 독 때문인지 얼굴은 새파랗게 물들었고, 피부에서 옅은 광이 났다. 불빛이 드리우니 꼭 청옥 같은 느낌이 나기도 했다.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우리 유모가 그랬어. 잘 웃는 사람 중에 못된 사람은 없다고. 그 사람들 마음속에는 빛이 있대. 난 네 마음속에도 빛이 있는 것 같아. 황상께서 내가 울면 네가 싫어할 거래. 그래서 안 울고 웃으면서 얘기하려고.”
그녀는 최대한 밝게 웃으려 애썼지만,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다 꼭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물처럼 주룩주룩 흘렀다.
“네가 모든 일의 공범이긴 했지만 한 번도 널 미워한 적 없어. 정말이야. 남원에서 있는 동안 늘 네가 함께 있었잖아. 넌 예의 바르고 항상 신중하게 처신했어. 무례하게 굴지도, 무턱대고 몰아세우지도 않고 날 걱정했지. 즐겁게 장난을 치기도 했고, 나한테 점박이도 보내 줬어. 넌 참 좋은 사람이야. 그저 어긋난 때에 만나서, 내가 널 저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백천범은 눈물을 닦으면서도 계속 활짝 웃으려 노력했다.
“어릴 때, 유모는 늘 날 가여운 눈빛으로 바라봤거든.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애처럼 보였나 봐. 하지만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나한텐 유모도 있고, 오라버니도 있고, 황상도 있으니까.
그간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어. 친오라버니도 찾았고, 너도 만났고. 낯선 나라에서 넌 내게 엄청난 온기를 주었어. 한 번도 표현한 적은 없지만, 사실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어. 문우야, 앞으로 널 내 오라버니라고 여길게. 명절 때마다 네게 향도 피우고 지전도 태워 줄게. 위패도 모시고…….”
문밖에서는 위지 가문의 가족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황제는 위지문우와 어린 시절부터 친우였으니 그의 곁을 지켰다지만, 황후는 어찌하여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킨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시신 앞을……. 금지옥엽인 황후가 무섭지도 않단 말인가?
한참 뒤, 문이 열리고 황후가 밖으로 나왔다. 빨개진 두 눈에는 여전히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으니 조금 기이한 표정이었다.
“위지문우와 전 의남매입니다. 부디 뒷일을 잘 처리해 주세요.”
위지종화가 흠칫 놀라며 조용히 물었다.
“황후 마마, 제 조카와는 언제 그런 연을 맺으신 것입니까?”
“방금요. 제가 오라버니로 삼겠다고 결심했어요.”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보았다.
“먼저 갈게요. 발인할 땐 황상과 함께 문우를 배웅할 거예요.”
이튿날, 황제는 위지문우를 일급 호국공護國公으로 추서했다. 사후 처리는 공작의 규율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에 7일 후가 발인이었다.
관을 묘지로 옮길 땐 수많은 행렬이 그의 뒤를 이었다. 어찌나 규모가 큰지 황족과 다를 게 없었다. 백성들도 자신의 집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 이상했던 점은 위지가의 저택에서 출발한 행렬이 곧장 성문 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영구 행렬은 황궁 앞 금성대로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황제와 황후는 손을 꼭 붙잡은 채 성루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뿌린 지전이 바람에 흩날리니 새하얀 나비가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백천범은 위지문우의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자꾸만 눈물이 났다. 황제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당신의 직감이 맞았소. 그 앤 좋은 사람이었소.”
그는 이미 세상을 등졌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계속 걸어가야 했다. 황제는 천천히 멀어지는 긴 행렬을 바라보며 들릴 듯 말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 * *
중추가 지난 뒤, 기홍은 통통한 아들을 낳았다. 늘 무표정했던 영구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는 어찌나 기뻐하는지 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가동은 부러운 눈빛으로 강보에 싸인 분홍빛 갓난아이를 바라보더니 시샘을 내었다.
“진짜 예쁘다. 제 아비는 전혀 안 닮았네.”
백천범이 웃으며 아이를 안았다.
“이렇게 작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누굴 닮았는지는 어느 정도 얼굴이 피어야 알죠.”
태자는 어른들 사이에 끼인 채 까치발을 세웠다.
“저도 보여 주세요, 어서요.”
백천범이 허리를 숙여 태자에게 아이를 보여 주었다.
“기쁘지? 나중에 아기가 크면 태자를 형이라 부르며 뒤를 졸졸 따라다닐 거야.”
태자가 활짝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백천범에게 물었다.
“모후, 제 친아우는 언제 낳아 주실 거예요?”
백천범이 웃으며 물었다.
“왜 꼭 아우여야 하는데? 누이동생은 싫고?”
“여자아이들은 잘 울어서 싫어요. 남동생이 좋단 말이에요. 그래야 저랑 포고도 같이하죠.”
황제가 웃으며 태자를 놀렸다.
“이걸 어찌한다? 부황과 모후는 공주를 갖고 싶은데.”
태자는 진지한 얼굴로 잠시 고민했다.
“그럼 우선 여동생을 낳아 주고 그다음은 남동생으로 낳아 주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황?”
황제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보이는 태자였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였기에 종종 우스울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