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4화
황제가 문 앞에 나타나자 위지문우는 덤덤히 그를 맞이했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그는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내가 죽는다는 말에 배웅이라도 하려고 왔나 보지?”
황제가 침대 옆에 앉자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 사이에 그의 안색은 죽은 사람처럼 짙푸른 빛으로 변해 있었다. 한참 뒤, 황제가 씁쓸한 말투로 물었다.
“어째서 이리 한 것이냐?”
“안 그럼 어쩌겠어. 내가 살고 네가 죽을래?”
“우리 묵용씨를 증오하는 게 아니었나? 내가 죽는 게 네가 원하던 것이었겠지.”
“네가 죽으면 그 애도 살지 못할 테니까. 네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그 애가 죽는 건 못 보거든.”
위지문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고민해 봤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지.”
“어째서 날 속였단 말이냐?”
위지문우가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다면 네가 날 죽게 내버려 두었을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다른 이는 몰라도 내가 널 모를까? 마음을 독하게 먹을 땐 누구보다 독하지만, 여릴 땐 누구보다 여려지지. 게다가 그 애가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걸 상상하면, 그냥 내가 죽는 게 낫겠더라고.”
“그래도 날 속이진 말았어야지. 적어도 그땐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소용없어. 네 장모가 얼마나 신통방통한지 넌 모를 테지. 그자는 여제이기도 하지만 독을 쓰는 데 엄청난 고수거든. 자신의 피로 독을 만드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독은 여제 본인만 해독할 수 있지. 천면인들도 어려서부터 여제의 독으로 훈련을 받는데, 반드시 정해진 때에 해독제를 먹어야 목숨을 연명할 수 있어. 그래서 여제에 대한 충심이 엄청난 거고…….”
황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여제는 이미 유폐된 것이 아니더냐. 설마 남제화가 짐과의 약속을 어겼단 말인가?”
“유폐된 것은 맞지만 남제화는 워낙 성격이 온화하고 효심이 깊으니 여제가 고생하는 꼴은 못 보겠지. 좋은 음식이며 옷이며 전부 갖다 바칠 테고 관리도 허술하게 할 게 뻔해. 누군가에게 독을 타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을 거야.”
“날 죽게 한 후에는 어쩌려는 것이냐?”
“네가 죽으면 태자가 즉위하고 천범이는 태후가 되어 조정을 관리하겠지. 여제는 날 통제하고, 난 천범이를 통제해서 동월을 손에 넣는 게 여제의 목적이었어. 여전히 그 미친 계획을 포기하지 못했던 거야. 남원의 저주를 풀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사람이잖아.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의지로 버티면서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인데, 지금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겠어?”
“집념이 어마어마하군. 첫걸음을 잘못 내디디니 모든 게 다 잘못됐어.”
황제는 하얗게 튼 위지문우의 입술을 바라보곤 그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여제는 여전히 구제 불능이라 해도, 너는 이제 후회되나?”
“네 손을 통해 묵용연을 제거했으니 후회는 없어. 다만 천면인을 쓰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걸 알고 있었지.”
“어째서?”
“여제는 널 모르지만 난 알잖아. 네가 그 계획에 걸려들었다면 묵용감이 아니지. 게다가 국력도 약한 나라가 그릇된 방법으로 강자를 이기려 하다니. 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발상이야. 여제는 미쳤어도 난 미치지 않았어.”
“처음부터 동월을 넘어뜨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냐?”
“내 원수는 애당초 묵용연이었으니까. 묵용연은 죽었으니 내 숙원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지. 비록 남원에 살면서 성까지 바꿨지만, 그래도 저승에 가서 조상님들을 봬야 할 거 아니야.”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린아가 안전하게 들어온 것도 생각해 보니 네가 암암리에 린아 곁을…….”
위지문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난 린아가 좋아. 사실 남원에서 린아가 날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어. 정말 대단한 아이야. 어린 나이에도 여제에게 위기를 느끼게 했지. 훗날 너보다 더 대단한 아이가 될 거야. 비록 고난을 겪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나도 그 애 어머니에게 그나마 떳떳할 수 있었어.”
“그 말은, 천범이와 혼사를 치르려 했던 것도 전부 거짓…….”
“그건 진짜였어.”
위지문우는 경망스럽게 웃었지만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정말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쨌든 너희 묵용씨가 내게 미안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려 했지.”
평소라면 황제는 당장 주먹을 날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처음 일은 추측에 맞았는데 결말은 아니었다. 그의 결말은 정말 묵용감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문우야, 내게 부탁할 게 더 있는 것이냐?”
“날 문우라고 부르니 진짜 옛날 생각나네.”
미소를 지은 위지문우의 두 눈에 천천히 물기가 어렸다. 아득해진 눈망울을 보니 옛 추억에 잠긴 듯했다. 황제도 아무 말 없이 짓궂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한참 뒤, 위지문우가 물었다.
“우리가 몇 번이나 싸웠었지?”
“셀 수도 없었다. 워낙 많이 싸웠으니까.”
“나보다 더 많이 싸운 상대는 없었겠지?”
“물론 없었지.”
황제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말고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위지문우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곧장 기침이 나왔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곧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흠칫 놀란 황제가 서둘러 그를 말렸다.
“말은 그만하고 어서 누워.”
위지문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너와 이야기할 시간도 없을 거야. 만나 봤자 늘 싸우는 게 일이었지만. 어릴 때도 그러더니 커도 변한 게 없네. 지금처럼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눈 건 손에 꼽을 정도잖아. 어차피 곧 죽을 테니 부끄러운 얘기도 좀 해야겠다. 그때 다들 묵용연을 재목으로 여기고 그자의 말만 따랐잖아.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감탄한 사람은 너였어.”
그가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난 어릴 때부터 자부심이 넘쳐서, 늘 네가 신분만 믿고 날 업신여긴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도 널 업신여겼지. 하지만 군대에 들어간 넌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혹독한 훈련을 견뎠지. 황자가 돌아오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걸 보니, 그때 깨달았어. 네가 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하지만 그 당시 위지 장군은 체면이 가장 중요했기에 입 밖에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지.”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그때 내가 도성에 돌아와 업무를 보고할 때, 검게 탄 내 얼굴을 보면서 비웃지 않았느냐. 말은 그리해 놓고 곧장 뙤약볕에서 무술을 한나절이나 연습하더니 여섯째에게 얼굴이 타지 않았냐고 몰래 묻기까지 했지.”
위지문우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웃었다.
“타고난 외모를 어찌하겠어. 남원의 강한 햇볕에도 타지 않는 것을. 다음 생엔 여인으로 환생해야 할까 봐.”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호탕하고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꼭 근심 따위는 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짙은 자색 옷을 즐겨 입으며 말수가 적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흰색 옷을 즐겨 입고 시시덕거리거나 화를 내며 감정을 쉽게 표출했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미워했지만, 늘 그림자처럼 함께 붙어 다녔다.
“듣자니 양자를 들였다면서?”
“응.”
위지문우는 점점 힘을 잃어가는 듯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집안에 향불이 끊기면 안 되잖아.”
“내일 그 아이에게 네 작위를 세습하라는 조서를 내리겠다.”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것도 지켜보마.”
“고마워.”
위지문우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으로, 네게 비밀 하나 알려 줄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 나는, 그 무엇도 널 이긴 적 없었어. 하지만, 그래도 난 그 애를 위해, 죽을 수 있어. 넌 못하겠지만 말이야. 이 일로, 이거 때문에, 그 애가 날 기억해 주겠지. 평생 날…….”
황제는 낮게 웃으며 욕을 퍼부었다.
“이런 미친놈!”
“그래, 난 미친놈이야. 내가 나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의 숨은 점점 미약해졌다.
“그 애한테 알려 줘. 향고를 푸는 방법은 나밖에 없다고. 내가 죽어야, 그 애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잠시 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문턱을 넘어오는 황제의 얼굴에는 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문 앞을 지키던 위지 일가의 가족들은 초조함에 짓눌려 있었다. 몇몇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한참 동안 그쳤던 비는 또다시 긴 선을 그리며 내리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을 바라보던 황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뒷일을 준비하거라. 공작 등급에 맞추어 일을 처리하고 궁에서 관리할 사람을 보내거라. 떠나는 날은 짐이 직접 배웅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감히 큰 소리로 울 수 없었던 가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켜야 했다.
하늘에서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어두운 기세가 천천히 하늘을 뒤덮었다. 번개 한 줄기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비바람이 온몸을 적셨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꼭 빗속의 바위처럼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위지문우의 마지막을 지켰다.
* * *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백천범은 꿈에서 위지문우를 만났다. 그는 구름 가까이에, 그녀는 땅 위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하얀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옷자락이 바람에 살랑이닌 모습이 꼭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 같았다. 그는 예전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닌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닙닙아, 난 갈게. 이제 넌 자유야.”
그녀는 곧장 얼굴을 굳혔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지막으로 부른 거야. 다시는 이렇게 부를 일 없으니까 잘 기억해 둬.”
그가 몸을 돌리니 구름이 그의 모습을 조금씩 집어삼키듯 가렸다. 그녀는 놀란 마음에 서둘러 그를 쫓았다.
“아이참, 가지 마. 아직 향고를 안 빼줬잖아…….”
열심히 뒤쫓았지만, 어느 순간 발이 허공에 붕 뜨더니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장막은 걷혀 있었고 황제가 침대 앞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꼭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아득히 먼 눈빛이었다. 백천범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황제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턱을 그녀의 어깨에 괸 그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위지문우가 떠났소.”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떠났다니, 어디로요? 집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요?”
황제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주 먼 곳으로 갔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이상한 일이네요. 방금 꿈에서 문우를 만났거든요. 저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어요. 이제 제가 자유라는 말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뒤쫓았는데 발이 허공에 빠지면서 잠에서 깼어요.”
황제가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에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불안했다. 그녀는 황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왜 이렇게 동요할 일이 있을까. 그녀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