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3화
백천범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너도… 어서 여인을 만나 네 삶을 살아야지.”
위지문우가 말했다.
“쳇, 내가 아쉬운 대로 아무나 고를 줄 알고? 너 말고는 아무도 눈에 안 들어와.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이미 아들은 있으니까.”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무슨 아들?”
“집안 형제의 아들인데 내가 양자로 삼으려고. 우리 가족들 중엔 나만 남았으니까. 대가 끊기면 안 되잖아.”
위지문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정말 우리 집안의 죄인이 되는 거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황제였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황제가 장검을 든 채 위지문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백천범이 서둘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얼 하는 거예요?”
황제는 경직된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괜찮소? 저놈이 허튼짓을 하진 않았고?”
“괜찮아요. 제게 허튼짓을 하지도 않았고요. 어서 칼 좀 집어넣어요.”
백천범이 황제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혼자 왔어요?”
황제는 위지문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다고 대꾸했다.
“당연히 혼자 왔겠지. 내가 너한테 허튼짓이라도 하는 것을 누가 보면 어쩌겠어?”
황제는 당장 위지문우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황후의 향고를 떠올리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화를 참은 황제가 매서운 목소리를 내었다.
“저택도 이미 수리를 마쳤고, 조서도 내일이면 받게 될 것이니 오늘 궁을 나가거라.”
위지문우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들어올 때도 환영을 받지 못했는데 떠날 때는 환송회를 해줘야 하지 않겠어? 다른 이들은 부를 것도 없이 우리 둘이서만 가볍게 마시는 거야. 어때?”
황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좋다.”
* * *
유월이 되니 큰비가 쏟아졌다. 억수 같은 비를 뚫고 황제의 조서가 위지 가문의 저택에 도달했다. 위지문우는 가족들을 대표해 무릎을 꿇고 조서를 받들었다. 학평관이 황제의 조서를 대독했다.
“천자께서 천명을 받들어 조서를 내려 가로되, 위지 일문一門은 공이 높고 충직하여 선황께서 친히 작위를 하사하시었다. 하나 불운한 일을 겪어 전 호국대장군 위지종 …… 이상!”
낭독을 마친 학평관이 조서를 위지문우에게 건넸다.
“위지 공자, 조서를 받으시지요.”
“황제 폐하의 백성 위지문우, 폐하의 은혜에 감읍하며 그 뜻을 받듭니다.”
위지문우는 지금껏 볼 수 없던 경건한 모습으로 조서를 받든 뒤,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함께 모여 있던 위지 가문의 가족들도 일제히 소리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학평관이 위지문우를 부축해 일으키며 낮게 읊조렸다.
“황상께서 소인에게 직접 여쭤보라 분부하시었습니다. 공자께서 약조하신 그 일은 언제쯤 하실 것인지요?”
위지문우는 입을 가리고 몇 차례 기침을 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급할 게 뭐 있습니까? 제가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니고. 황상께 며칠 안에 해 드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전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갈 테니, 총관리께선 차라도 한 잔 들고 가십시오.”
학평관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위지종화가 다가와 사과했다.
“총관리,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문우가 요 며칠 몸이 좋지 않아 오늘 아침에도 하마터면 일어나지 못할 뻔했습니다. 조서를 받기 위해 겨우 참고 나왔으니, 그만 들어가 쉬어야 할 듯합니다.”
학평관도 위지문우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프면 의원을 불러 치료를 해야지요. 더 미룰 것도 없습니다. 제가 궁으로 돌아가 위 태의를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지종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해 주신다면야 좋지요. 태의가 와서 봐주신다면 아마 금세 나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총관리.”
그때 위지문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잠시 쉬면 나아질 테니까요. 총관리께선 잠시 차라도 들고 가십시오. 대접이 소홀해선 안 되지 않습니까.”
위지문우의 안색은 정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는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초조했던 학평관은 차는 고사하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니 괜스레 마음이 번잡해진 황제는 상주서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아예 붓을 내려놓고 창가에 서서 학평관이 오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돌아온 학평관이 초조한 안색으로 말했다.
“황상, 위지문우가 아무래도 큰 병이 난 것 같습니다. 어서 위 태의를 보내셔야 합니다.”
황제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병이 났다? 언제 병이 났단 말이냐?”
“어젯밤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지 못할 뻔했다고 합니다. 조서를 받들 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지만 안색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걷는 것도 버거워 보이더군요. 방으로 들어갈 때도 하인의 부축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황제가 얼른 기억을 되짚었다. 어제 위지문우와 단둘이 술을 마실 때, 안색이 조금 창백하긴 했지만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위지문우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를 성가시게 했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는 황제를 앞에 두고서도 그는 웃고 떠들길 반복했다. 우스운 얘기를 늘어놓을 때면 어찌나 크게 웃는지 눈물마저 맺힐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갈 땐 제법 취기가 오른 탓에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가 아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백천범과 관련된 일이니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곧장 분부를 내렸다.
“위중청을 위지 저택에 보내 진맥을 받게 하라. 워낙 간사한 놈이니 또 무슨 계략을 짜고 있을 수도 있다.”
황제에게는 너무나 더딘 하루였다. 창밖에 내리는 부슬비는 꼭 그의 마음을 애태우듯 적시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걸음이 닿는 대로 침전으로 향했다. 침대엔 장막이 켜켜이 내려져 있었다. 장막을 하나하나 걷어 올리니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천범은 피곤한 것인지 말도 거의 하지 않고 계속 잠만 청했다. 자느라 점심도 거를 정도였다.
황제는 그녀의 상태가 위지문우의 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픈 탓에 백천범의 몸까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가 조용히 백천범을 깨웠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기이한 일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아주 작은 미동에도 쉽게 잠에서 깨지 않던가.
그녀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그의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황제가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위 태의는 돌아왔느냐?”
영구가 문 앞에서 대답했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황상, 신이 위지 저택에 다녀올까요?”
두 사람이 목청을 높여 대화를 나누는데도 백천범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더 이상 초조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부하들을 대동하여 최대한 빨리 다녀오거라. 만약 위중청이 오지 못할 상황이거든 일각마다 사람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라.”
“예, 알겠습니다.”
위지 저택에 있던 위중청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짚어 봐도 위지문우의 맥은 사맥死脈(죽음의 징조를 나타내는 약한 맥박)이었다.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위지문우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위 태의, 그만하게. 다시 짚어도 똑같네. 내가 죽을 거라는 건 명확하지 않은가.”
궁을 나올 당시, 위중청은 황제의 명을 받았다. 위지문우의 병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중청은 누구보다 살고 싶었지만, 그가 신선도 아닌데 어찌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이를 살리겠는가? 지금 위지문우를 살릴 방도는 전혀 없었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위중청은 자신감이 넘쳤다. 궁에서 늘 활발한 모습을 보여 왔으니, 그저 작은 병이 난 거라 생각했다. 자연히 약 몇 첩만 지어 주면 되겠거니 했는데, 이런 상태일 줄 알았겠는가?
그때, 영구가 조용히 나타나는 바람에 위중청은 화들짝 놀랐다. 기다리다 지친 황제가 사람을 보내 그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영구가 위지문의 상태를 묻자마자, 위중청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심맥이 쇠약해진 데다 몸 전체에 좋지 못한 기운이 퍼진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몸조리를 해야…….”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가 우습기만 했던 위지문우는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위 태의의 말은 내가 곧 죽을 거라는 뜻이지.”
영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위중청을 바라보았다.
“저 말이 사실인가?”
영구의 위압감이 실로 어마어마했기에 위중청은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인가? 방금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몸조리를 해야 한다고…….”
“그저 가망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영구는 초조해졌다. 황제의 최측근이었기에 그 또한 향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황후가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인 듯했다. 만약 위지문우가 죽는다면 황후도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가 위중청에게 물었다.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위중청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명예에 오점을 남긴다 해도 이번만큼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구는 곧장 위중청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구할 수 없다면 돌아가지. 마마께서도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자네가 가서 봐 드려야 하네.”
두 사람은 급히 궁으로 돌아가 보고를 올렸다. 황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멀쩡했던 자가 어찌 죽을병에 걸렸단 말인가? 위지문우가 죽는다면 그의 천범은 어찌 되는 것이고? 그가 위중청의 멱살을 잡아 틀었다.
“짐이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위지문우를 살리지 못하면 네 목을 내놔야 한다고!”
깜짝 놀란 위중청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황상, 신, 신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은 신선이 와도 위지 공자를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그를 침전으로 끌고 갔다.
“황후의 맥을 짚거라. 상태가 어떠하냐?”
금기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월규는 곧장 장막을 걷고 백천범의 손을 위중청에게 건넸다. 위중청이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의 맥을 짚었다. 잔뜩 찌푸렸던 미간은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풀렸다.
“황상, 마마의 맥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저 깊은 잠에 드신 것 같습니다.”
“한데 어째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이…….”
위중청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후에게 아무 문제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황상,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마마께서는 맥이 안정적이십니다. 일어나실 때까지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확실한 것이냐?”
“신이 목을 걸고 장담하겠습니다.”
황제가 그를 흘겨보았다.기며 대꾸했다.
“네 목은 나에게 달린 지 이미 오래다.”
그가 방 안을 서성였다. 혹 위지문우가 죽으면 백천범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위중청에게 말했다.
“넌 여기서 황후를 지키거라. 짐은 위지문우를 보고 와야겠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곧장 사람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