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22)화 (621/1,192)

제622화

위지종화도 조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고집은 무슨 수를 써도 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안색도 좋지 않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위지종화의 말투가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며칠간 너무 피곤했던 것은 아니더냐. 저택의 일은 이 숙부와 형제들이 처리할 테니 넌 궁에서 편히 쉬고 있거라. 조만간 날이 정해지거든 그때 정식으로 저택에 들어오거라.”

위지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 주신다면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저 숙부께서 힘이 드실까 봐 걱정일 뿐이지요.”

“가족끼리 그런 말 할 것 없다.”

위지종화가 가마를 타고 돌아가는 그를 배웅했다.

“궁에 도착하면 이 숙부를 대신해 황상께 문안을 드리거라. 하해와 같은 황상의 은혜를 우리 집안사람들 모두가 영원히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위지문우는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

“묵용감이야말로 제 은혜를 영원히 기억해야 하지요.”

“문우야!”

위지종화가 낮게 호통쳤다.

“황상과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해도 그리 버릇없게 말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위지문우는 태연하게 미소를 짓더니 허리를 숙이고 가마에 올라탔다. 그가 탄 가마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위지종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너무 패기가 넘쳤다. 어릴 때도 삼황자와 실력을 겨루지 못해 안달이더니, 삼황자가 황제가 된 지금까지도 어찌 저리 똑같단 말인가? 군주를 모시는 일은 호랑이와 한 곳에 있는 것과 같음을 모르는 것인가?

위지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전부 위지문우의 공이었다. 위지문우가 가문의 기둥임은 명백하지만, 황상과 맞서려 하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궁으로 돌아온 위지문우가 가마에서 내리는데, 복도에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몸에서 풍기는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위지문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어린 태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본 적 있어요.”

위지문우는 그런 태자의 모습이 우스웠다. 손을 뻗어 태자를 안으려는데, 묵용린은 후다닥 도망을 갔다.

“만지지 마세요.”

“어째서?”

위지문우가 웃으며 말했다.

“예전엔 날 아버지라고도 불렀었는데, 다 잊었구나?”

태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찌 감히 그런 말을! 내 아버지는 대전에 계신 분이에요. 그 말을 들으셨다면 곧장 당신의 목을 내리치셨을 거예요!”

위지문우는 궁에 들어온 후, 태자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예전부터 묵용린을 예뻐한 그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태자는 그가 보이기만 하면 멀리 달아나곤 했다. 그를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로 태자가 먼저 위지문우를 찾아왔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야?”

태자가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듣자니 부황과 친구였다면서요?”

위지문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뭐, 그런 셈이었지. 그게 왜?”

“당신이 그 악랄한 곳에서 온 거 다 알고 있어요.”

태자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황에게 못된 짓을 했다간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요!”

위지문우는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날 기억하니? 남원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거야?”

그때 묵용린은 고작 한 살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는 다 기억하는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이 날 마귀 할멈에게 보냈잖아.”

태자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당연히 기억하지.”

태자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악몽 같은 기억이 있었다. 그 악몽 속에 위지문우의 얼굴이 등장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노점에서 만둣국을 먹는 그를 보자마자 반응하고 말았다. 태자는 줄곧 자신이 용감하다고 생각했지만, 궁에 들어온 위지문우는 저절로 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만 쳐서 될 일일까. 이곳은 그의 집이었다. 어찌 외부인 때문에 자신이 숨어 지내야 한단 말인가. 오늘은 특별히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나쁜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

사실 예전의 일은 위지문우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여제가 가짜 아이를 돌려보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짜 아이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을 겪고도 무탈하다는 것은 이 아이가 얼마나 강인한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묵용감이 가짜를 알아차려서 망정이지, 몰랐다면 묵용린은 남원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가 손을 뻗어 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묵용린은 곧바로 손길을 피했다. 그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나도 린아 너처럼 마귀 할멈에게 호되게 당했거든. 네가 힘든 일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널 그 할멈에게 넘기는 일은 없었을 거야. 내가 린아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널 해할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나중에 크면 너도 다 이해할 거다.”

그가 입을 가리고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앞으로 날 봐도 도망치지 말렴. 어차피 며칠 뒤엔 떠날 거거든.”

태자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태의를 불러 줄까요?”

위지문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말만으로도 충분해. 가서 놀아. 난 좀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겠으니까.”

* * *

백천범은 남원에서 돌아온 후에도 아침마다 꽃을 꺾어 와 꽃꽂이를 즐겼다. 이날 아침에도 꽃을 한 바구니 꺾은 그녀는 월규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위지문우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월백색 장포에 옥패를 차고 하얀 옥관을 쓴 그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남원 사람들이 말하던 그의 별명을 떠올렸다. 옥면소호. 다시 동월의 차림새를 한 그는 더욱 남자다운 품위가 느껴졌다.

백천범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위지문우와 거리를 유지했다.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치려는데, 그가 갑작스레 그녀를 불렀다.

“닙닙아, 잠시만.”

백천범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날 닙닙이라고 부르면 가만 안 둘 거야.”

위지문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겠어. 천범아.”

옆에 있던 월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황후께 예를 갖추십시오.”

위지문우는 어여쁜 봉안으로 월규를 힐끔거렸다.

“아이고, 얼굴은 예쁜 아가씨가 성격 있으시네. 내가 황후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서 말이야. 그때 그쪽 황후가 나한테 거의…….”

“왜 불렀어?”

백천범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남원에서의 일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궁을 떠나려고 해. 그 전에 점박이가 있는 곳으로 좀 데려가 줘.”

위지문우가 탄식을 내뱉었다.

“이렇게 큰 황궁에서 날 반겨 주는 존재는 점박이밖에 없을 거야.”

“난 시간 없으니까 알아서 찾아가.”

“내가 널 잡아먹는 것도 아니잖아. 마음만 먹으면 묵용감을 골백번도 더 괴롭혔을 거야. 지금 내가 얼마나 얌전히 지내는지 너도 알잖아. 이런 내 진심을 너라도 좀 알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을 마친 그는 무심코 소매를 걷는 척하며 볼록 튀어나온 팔을 드러냈다. 동정심을 유발하려 했지만, 사실은 그녀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또 있을까.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별안간 팔에 들어 있는 멍울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위지문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는 듯 결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양아치 같은 놈! 백천범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어. 데려다줄게.”

월규가 소리쳤다.

“마마, 아니 됩니다.”

월규는 황제가 알까 싶어 재차 그녀를 말렸다.

“괜찮아, 얼른 다녀올게.”

백천범은 월규에게 먼저 돌아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향고에 대해선 월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위지문우는 황상마저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겁 없는 사람이었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참으로 후안무치한 자였다.

“마마, 조심하셔야 합니다. 소인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월규는 먼저 돌아가 사람들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을 위지문우가 눈치채지 못할까.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무도 보내지 마. 안 그럼 사람들 앞에서 너희 황후 마마와 공작 춤을 출 테니까.”

부아가 치민 월규는 입술이 다 찢어질 만큼 힘껏 깨물었다.

“이런 비열하고 파렴치한 자를 보았나!”

위지문우는 그녀의 반응에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백천범에게 손짓했다.

“가시죠, 황후 마마.”

백천범은 그를 데리고 점박이가 있는 작은 숲으로 향했다. 매일 점박이를 보러 왔지만, 매번 점박이는 그녀를 반겨 주었다. 이번에도 점박이는 냄새를 맡자마자 수풀을 헤치고 달려왔다. 울타리가 둘려 있었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또 말 안 듣네. 숲을 나오면 안 된다니까.”

백천범이 점박이에게 꿀밤을 주었다. 점박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움츠리더니 울타리를 넘어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윽고 위지문우를 알아본 점박이는 신이 나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백천범이 떠난 뒤, 주인을 잃고 울적해하는 점박이를 위지문우가 대신 돌봐 주었다. 그 일로 점박이와 위지문우는 서로를 의지하며 제법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점박이가 위지문우를 밀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곧 둘은 남원에서처럼 장난을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천범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껏 위지문우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늘 웃음으로 가려진 탓에 그의 마음을 쉽게 꿰뚫어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위지문우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위지문우는 몸을 뒤척여 자리에 앉더니 입을 가리고 몇 차례 기침을 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원에서의 시간이 너에겐 악몽이었겠지. 하지만 난 말야, 널 만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어. 널 신부로 맞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인연이 아주 조금 부족했나 봐.”

그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백천범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때 왜 날 놓아줬어?”

풀밭에 앉은 위지문우가 표범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대제사를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어. 네가 내 곁에 있으면 행복해할지 말이야. 대제사가 그러더라.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내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고. 이제야 대제사의 말뜻을 알겠어. 네 행복이 곧 내 행복이거든.”

백천범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믿기지 않는 듯했다.

“정말이야. 네가 날 떠나서 상처를 받긴 했지만, 행복해하는 네 얼굴을 보니 나도 정말 행복해. 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적어도 네 앞에서만큼은 아니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