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1화
위지문우는 승덕전 편전에서 묵기 시작했다. 학평관은 손발이 잽싼 노비들을 붙여 그의 시중을 들게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새장을 들고 산책을 하거나 귀뚜라미 싸움을 했다. 처마 밑에 새장을 잔뜩 걸어 놓은 탓에 아침이 되면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에 꼭 산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여인들을 꼬시는 걸 좋아했다. 그의 눈매에 홀린 궁녀들은 걸핏하면 얼굴을 붉히며 종종걸음을 쳤다. 위지문우는 궁녀들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이렇게 어린 궁녀들에게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하루 행적과 일과는 황제에게 낱낱이 보고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위지 장군이 황궁을 난장판으로 만들리라. 황제는 학평관에게 지시해 위지문우의 시종들을 평범하거나 못생긴 여인들로 바꾸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골이 난 위지문우가 황제를 찾아왔다.
“무엇 하러 내 사람들을 전부 바꿨지?”
“네가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궁에 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 어찌 아직도 천범이의 향고를 빼지 않는단 말이냐?”
“초조해할 거 뭐 있어. 향고를 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 내가 말한 것을 다 들어주면 그때 생각해 보지.”
황제가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조금이라도 섣불리 움직이면, 짐이 위지 가문의 모든 이들을 매장할 테니.”
위지문우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날 죽일 수 있으면 그리해 봐. 날 죽이는 게 곧 황후를 죽이는 것이니까. 못 믿겠으면 한번 해 보든지.”
황제는 말문이 막힌 나머지 책상만 내리쳤다. 요즘은 제법 온순해진 그였지만, 위지문우만 보면 예전의 황제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황제의 인내심도 만만치 않았다. 금세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자신이 화를 내면 낼수록 위지문우가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릴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자였다.
“성 북쪽에 있는 저택은 이미 수리를 명했다. 오랜 시간 방치된 탓에 시간이 좀 걸릴 테지. 또한 위지 일가는 도성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조서를 모든 성에 배포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건지 답이 오는 곳이 없더군. 이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네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가족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다.”
위지문우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저택을 수리하는 일만 서둘러 줘. 수리만 끝나면 그곳으로 거취를 옮길 테니. 내가 안 보여야 너도 마음이 번잡하지 않을 텐데?”
“짐은 네가 요구한 것들을 다 시행하고 있는데 넌 언제쯤 짐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냐?”
“내가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는 그날, 닙닙이가 자유를 얻을 거야.”
“경고하건대, 다시는 그 이름으로 황후를 부르지 말거라.”
위지문우가 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쪼잔하긴.”
황제는 더 화낼 힘도 없었다. 천하에서 황제를 이리 막 대하는 사람은 위지문우뿐이리라.
이튿날, 조회를 마친 문무백관들은 금수교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준수한 외모에 비범한 기세, 뛰어난 자태를 가진 그는 활짝 웃으며 낯이 익은 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숙黃叔, 이제 머리가 다 하얗게 세시었습니다.”
“오세백吳世伯, 나이를 드셔도 여전히 건장하십니다.”
“장張 대인! 보아하니, 또 승진을 하시었나 봅니다.”
“이보게 양정산楊呈山, 군에 있지 않고 어찌 도성에 돌아온 것인가?”
“진陳 대인, 오랜만입니다.”
다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위지 일가를 도성으로 불렀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위지문우를 황궁으로 들일 줄이야. 게다가, 이미 죽은 게 아니었던가?
그때의 전투를 어찌 관리들이 모르겠는가. 그 일의 옳고 그름 역시 훤히 꿰고 있었다. 위지 대장군의 인품과 평판을 기억하는 이들은 황제의 이번 조서에 위안을 얻고 있었다. 다만 가장 처음으로 돌아온 이가 위지문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번에 많은 이들이 위지문우의 주변을 둘러쌌다. 위지 대장군과 친분이 깊었던 한 노신은 위지 대장군이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위지문우와 친했던 옛 동료도 다가와 기쁜 마음에 어깨를 몇 대 때렸다.
“너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그간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위지문우가 웃으며 얼버무렸다.
“가긴 어딜 가, 그저 숨어 있었지.”
남원으로 가 성까지 바꾸고 황제를 죽이려 했던 계획을 들키면 여기서 죽을지도 몰랐다. 위지문우는 사람 좋은 얼굴로 함께 궁 밖으로 향했다.
“이리 어렵게 만났으니, 어서 가서 술이나 한잔 들자고. 오늘은 내가 사겠네.”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암, 위지 장군이 돌아왔으니 마땅히 환영회를 열어야지.”
“그리 부르지 말게. 지금은 그저 직업도, 권력도 없는 한가한 사람이거늘. 언젠가 그대들에게 밥을 얻어먹어야 할 걸세.”
“우리 위지 공자께선 농담도 잘하신다니까. 황상과 친분이 얼마나 깊은데, 분명 조만간 장군에 봉해질 것이네.”
“맞네. 위지 공자의 능력이라면 황상께서 대장군에 봉하실 터. 안 그래도 조정에 인력이 부족했는데, 때마침 잘 왔군, 잘 왔어.”
위지문우는 자신을 칭송하는 말을 들으며 즐겁게 웃었다. 사실 그도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을 치켜세우는 건 위지 가문이 곧 누명을 벗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간 고난을 겪은 그를 가엾게 여기기 때문임을, 어찌 모를까.
위지문우는 배포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임안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금원金元 대주루의 별실을 빌려 모든 이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공연단까지 불러 떠들썩한 시간을 보냈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위지문우 이 자식, 그리 멍청한 놈은 아니군. 이제 그자의 가족들이 곧 돌아오겠어.”
백천범이 말했다.
“보아하니 남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가 봐요. 황상께선 앞으로 문우를 어찌하실 거예요?”
황제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짐과의 거래가 끝났으니 각자의 길을 가야지.”
“그래도 인재잖아요. 황상께서 작은 관직이라도 내어 주시면 조정을 위해 힘쓰지 않겠어요?”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돌아온 목적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소. 남원의 첩자 노릇을 하러 온 것이라면, 늑대를 끌어들이는 일이 아니오?”
백천범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줄곧 위지문우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 왔기 때문이었다. 남원에선 몽롱한 상태로 지냈지만, 그때의 기억은 잃지 않았다. 위지문우는 한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코 선을 넘진 않았다. 이 점만 봐도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놀리듯 말했다.
“역시 황상은 늘 남들보다 깊게 생각한다니까요. 하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에요. 곱씹어 봐도 문우는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내기를 걸어도 좋아요.”
황제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뭐 하러 내기까지 한단 말이오? 짐이 그 애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위지문우 그놈은… 영 점잖지가 않소. 그래도 어릴 땐 형제나 다름없었는데, 감히 형제의 부인까지 넘보다니. 그런 놈이 더한 짓이라고 못 할까?”
백천범은 그의 등에 기대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단노, 화내지 말아요. 화를 내면 주름이 생긴단 말이에요.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했는데 주름까지 생기면 정말 노인인 줄 알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나기도, 우습기도 했다. 그는 커다란 손을 뒤로 뻗어 그녀를 감싸고는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누구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셌는지 모르는 것이오? 겁도 없이 그런 말을 꺼내다니, 이 지아비가 밤에 그대를 어찌하는지 두고 보시오.”
* * *
위지문우가 임안성 주루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가 부른 공연단이 목격담을 일파만파 퍼뜨린 덕분이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위지 저택을 찾기도 했는데, 이미 인부들이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저택 앞 노점에서 차를 파는 노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위지 장군이 정말 돌아왔으며 자신에게 은원보까지 주었다고 말했다.
며칠이 지나자 위지 가문의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둘씩 저택의 사당을 찾아와 통곡하며 울었다. 얼마 뒤, 위지문우의 당숙들과 숙부도 돌아왔다. 도성에 집을 두고 떠나야 했던 그들은 꼬박 일고여덟 해 만에 돌아왔다. 하나같이 감격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위지 가문의 일원들은 황제가 가문의 누명을 씻겨 줄 조서를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위지문우는 줄곧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가족들을 만나다 보면 시간이 늦어져 종종 궁 밖에서 묵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 형제 중 둘째였는데, 전쟁으로 두 형제를 잃었다. 지금은 가장 어린 숙부인 위지종화尉遲宗華만 남았다. 백부의 아들들도 모두 살아남아 장성한 뒤였고, 먼 당숙과 형제들까지 모이니 집안이 제법 복작거렸다.
한데 모인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자 위지문우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백부와 숙부의 가족들은 모두 번성하였는데 그의 식구들 중에선 유일하게 그만 남았기 때문이다.
위지 가문의 가장이 된 위지종화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일은 종신대사였다. 그가 위지문우에게 말했다.
“문우야, 황상과 친분도 두터우니 혼사를 내려 달라 청해 보거라. 어서 대를 이어야 너희 집안의 계보를 잇지 않겠느냐. 이 숙부는 이제 늙어서 왕년의 포부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다. 이번 생의 희망은 너밖에 없다. 황상께서 우리 위지 가문의 누명을 벗겨 주시고 네가 관직만 얻으면 우리 가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게다.”
위지문우는 담담히 말했다.
“저도 나이를 많이 먹었습니다. 혼사를 하여 무엇합니까. 집안의 영리한 아이를 양자로 삼으면 그만이지요.”
위지종화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나이가 많다니! 이리 한창인 나이에 부인을 들이지 않겠단 말이냐?”
“예. 양자를 들이는 일은 숙부께서 서둘러 알아봐 주십시오. 황상께서 조서만 내리시면 아이를 데리고 옛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숙부댁도 그 집에서 지내십시오. 사람이 많으면 북적거리고 좋지 않습니까.”
위지종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명만 벗는다면 일품 관원의 딸을 들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처가의 도움을 받으면 삶이 더 순탄해지지 않겠는가. 한데 어찌 혼사는 제쳐두고 양자만 들이려 한단 말인가? 설마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기라도 한 걸까? 위지종화는 좀 더 타이르려 했지만, 위지문우가 손을 내저었다.
“숙부, 더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전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