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0화
철창 밖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편하게 제 발로 붙잡혀 주다니. 남문우, 그간 무탈하였느냐?”
남문우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묵용감, 옛 친구를 이리 대접하는 것인가? 난 남원에서 네게 돌아갈 기회를 주었는데 말이야.”
“그랬던가? 짐을 풀어 준 것도 너희의 계획이 아니었느냐?”
“여옥이 그러던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지. 이번 일도 말이야. 짐은 표범이 나타난 일에 줄곧 의심을 품고 있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찌 홀로 그 먼 길을 걸어 백천범을 정확히 찾아냈겠느냐? 정말 기상천외한 일이지. 하지만 짐은 응당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더군. 제때 나타나 준 덕에 천범이의 목숨을 구했으니.”
남문우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네 곁에만 있으면 닙닙이가 위험한 일을 겪는구나. 어찌나 잘난 부군이신지.”
“그래, 못난 부군이지.”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일도 적을 유인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천범이를 억울하게 했지. 내 마음도 편치 않아.”
“내 앞에서까지 그리 가식 떨 거 없어. 넌 천하와 사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희생할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지 마.”
뒤이어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천범이 모퉁이를 지나 황제 옆으로 걸어왔다.
“내가 이렇게 하자고 한 거야. 황상께선 본인이 사망한 걸로 소문을 내자 하셨지만, 내가 그렇게는 못 한다고 했어. 몽달에 새로운 왕이 즉위한 뒤로 북부 국경 지역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어.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문이 돌면 전쟁을 일으키려 들 테지. 그럴 바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게 나아. 북쪽 백성들이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잖아?”
그녀가 황제의 옆에 섰다. 황제는 소매 밑으로 손을 가져가 늘 그렇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문우,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나타난 거야? 내 기억 속에 넌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남문우가 백천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엔 생기가 넘쳤고 눈망울에 담겨 있던 경각심도 사라져 있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곁에 있으니 경계할 일이 무어 있을까. 그는 영원히 묵용감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닙닙아.”
그가 그녀를 불렀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는 더 이상 그 이름을 쓰지 않는다.”
“맞아. 날 닙닙이라고 부르지 마. 그 이름에 별로 좋은 기억도 없으니까.”
백천범이 물었다.
“향고로 날 움직여서 황상을 죽이려던 거, 네가 생각해낸 거야?”
남문우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향고를 심은 것을 알고 있었어?”
“도망치던 날 알았어. 매번 네가 날 어떻게 찾아내는지도 알았고. 다 네가 심어 둔 향고 때문이었잖아.”
남문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도 상관없어. 내가 향고를 심은 건, 네가 내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야. 물론… 넌 도망쳤지만.”
황제는 이런 이야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남원의 여제는 이미 위폐되었다. 그럼에도 날 죽이려 한 것은 네 계획인 것이냐?”
남문우는 웃으며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알아맞혀 봐.”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알아차린 남문우가 코웃음을 쳤다.
“묵용감, 덫을 놓을 줄은 알면서 내가 일부러 덫에 걸려들었다는 건 모르는군.”
황제가 물었다.
“무슨 뜻이냐?”
“날 바보로 보지 말라고. 나도 예전엔 명성이 자자한 위지 가문의 장군이었어. 이런 잔꾀로 날 속일 수 있었을 것 같아? 내가 덫에 걸리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백천범에게 시선을 옮겼다.
“닙닙아, 오른쪽 팔을 보여 줘.”
“무엄하다!”
황제의 호통을 뒤로하고, 백천범이 퍼뜩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팔에는 자그마한 덩어리 같은 게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꼭 피부 속에 자그마한 콩을 심어 둔 듯한 모양새였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황제가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윽고 그가 남문우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황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남문우는 뒷짐을 진 채, 철창 안을 서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닙닙이의 심신을 통제해서 독을 타게 했어. 그저 닙닙이의 마음이 얼마나 강인한지 확인해 보려는 것뿐이었지. 대제사의 통제도 벗어났으니 내 통제에서도 벗어났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닙닙이가 잡혀 갔다는 말을 어느 정도 믿은 건 사실이야. 다만 이곳에 와보니 허점이 너무 많기에 네가 꾸민 짓이라는 걸 알아차렸지.”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덫에 걸려든 이유는 바로 이거 때문이야.”
그가 백천범의 팔뚝에 볼록 튀어나온 것을 가리켰다.
“가까이에 있어야 향고를 자극해서 닙닙이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거든.”
“이런 비열한 놈 같으니!”
더 이상 노여움을 억누를 수 없어 황제는 옆에 있던 영구의 검을 뽑아 들었다. 남문우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내가 죽으면 닙닙이도 오래 살 수 없어. 닙닙이의 향고와 내 건 한 쌍이거든.”
그가 자신의 소매를 걷어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 굵직한 그의 팔뚝에도 콩알만 한 무엇인가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다만 천천히 움직이는 모양새가 절로 소름이 끼쳤다.
“보이지? 닙닙이의 향고가 가까이 있는 걸 알고 흥분한 거야.”
그 말에 황제가 냉정을 되찾았다.
“말해 보거라.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남문우가 어여쁜 두 눈으로 철창을 훑었다.
“이곳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가 묵을 곳을 마련해 줘.”
“좋다.”
남문우의 요구 사항은 또다시 이어졌다.
“닙닙이와 가까이 있어야겠어. 네 승덕전에 머무르는 게 가장 좋을 듯하군.”
“좋다. 짐의 눈앞에 있어야 짐도 마음이 놓일 터.”
“날 억압하지 말고 제대로 시중들 사람을 붙여 줘.”
“좋다. 또 뭐가 필요하느냐? 다 얘기해 보거라.”
남문우가 잠시 망설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지 가문의 누명을 벗겨 줘. 우리 위지 가문의 결백을 인정하고 저택을 돌려줘. 가족들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그리해 준다면, 네 보답은?”
“닙닙이의 몸에서 향고를 꺼내주지.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동월로 돌아온 이유가 위지 가문의 누명을 씻기 위해서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찌 이곳에 돌아왔을까?”
남문우가 두 손을 펼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원과 함께 널 처리하려 했지만 이제 불가능해졌다. 난 위지 가문의 죄인으로 남고 싶지 않아. 지금의 난 남문우가 아닌 위지문우거든.”
“그래. 거래를 받아들이지.”
황제가 수하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여봐라, 철창을 풀고 위지 장군을 궁으로 모시거라.”
두려울 게 없었던 위지문우는 한없이 여유로웠다. 황제가 그를 속이려 한다 해도 무섭지 않았다. 철창이 열리자 그는 성큼성큼 나왔다.
점박이가 돌아온 것부터 백천범이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까지. 황제는 위지문우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병력을 동원에 온 성을 이 잡듯 뒤지고 싶었지만, 혹여나 위지문우를 자극해 백천범에게 해가 될까 싶어 그러지 못했다.
결국 백천범에 대한 위지문우의 감정을 이용해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지문우는 백천범의 향고를 자극하기 위해 스스로 덫에 걸린 것이었다니. 그는 당장이라도 위지문우를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황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이었지만, 백천범의 손만큼은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백천범은 그의 품에 기대어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말아요.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요. 향고를 빼 주겠다고 했으니 분명 약속을 지킬 거예요.”
황제가 탄식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엇 하러 판을 짰나 싶소. 내가 잡지 않아도 제 발로 날 찾아왔을 것을.”
“그러게요. 소백이가 너무 불쌍해요.”
백천범도 속상해하며 말했다.
“소백이를 제게 보낸 것도 이 판을 위해서였다지만, 그래도 절 속이시지 말았어야 해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인걸요.”
“그대의 마음이 여리지 않소.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면 어찌 실감 나게 연기를 했겠소? 궁 안에만 보는 눈이 수도 없은 데다, 잔당을 처리하지도 못했다오. 그러니 남문우가 걸려들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소. 당신만 억울하게 되었구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 왕숙들에겐 잘 설명해 드려야 할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잘 얘기해 두었으니. 세간의 유언비어도 막고 있소. 짐의 걱정은 오직 그대뿐이오.”
그가 그녀의 팔뚝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곳을 어루만졌다.
“위지문우가 짐을 속이지 않길 바라오. 그런 일이 있다면, 위지 가문을 철저히 처단할 것이오.”
“그 애가 돌아온 게 가문 때문일 줄은 몰랐어요. 생각해 보면 참 안 된 일이에요. 성까지 바꾸고 타향에서 떠돌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치 않았을까요.”
“위지 가문의 몰락은 묵용한과 묵용연의 다툼 때문이었소. 억울한 건 사실이지만 위지 가문에 아무런 과오도 없는 건 아니오. 예전 태자를 향한 충심이 과했지. 묵용한이 즉위한 후, 위지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을 감추고 뿔뿔이 흩어졌소. 묵용한이 정권을 잡은 초기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그들을 처단할 시간이 없었지.
위지 가문을 다시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결국엔 다 명예와 이익, 권세를 위한 일이 아니겠소. 황조가 바뀔 때마다 현 정권의 명문 세가를 희생하는 일은 늘 있던 일이오. 천자가 바뀌면 신하도 모두 바뀌는 법이니.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존귀하고 명예롭지만, 시국이 요동치면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것이 명문세가요. 역사의 변천을 겪을 때마다 어찌 이리 비슷한지 모르겠소.”
백천범은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황제의 가라앉은 마음을 끌어올려 주고 싶었다. 그녀가 헤헤 웃어 보였다.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적어도 이번에 태후께서는 제 편에 서셨잖아요. 증거를 다 보시고도 왕숙들 앞에서 저를 지켜주셨어요. 진심으로 절 믿어 주신 거라고요.”
황제도 미소를 지었다. 백천범이 물었다.
“태후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늘 짐을 위한다고 하지만 매번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않았소. 이번 일만 옳은 생각을 했을 뿐이지. 사실 용서를 논할 것도 없소.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니. 그저 조금 이기적이고, 자신의 좋고 싫음을 남에게 강요했을 뿐 아니겠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짜가 아님을 알았을 테지. 짐은 그저 태후가 이번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자숙하길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