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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19)화 (618/1,192)

제619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은 황제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위로했다.

“초조해하지 마시오. 천천히, 그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짐에게 말해 보시오. 우린 부부가 아니오. 우리 둘 사이에 못 할 말은 없소.”

노친왕은 여전히 다정한 황제의 모습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멈추십시오! 황제가 어찌 그리 시비를 가리지 못한단 말입니까? 사건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저 여인을 옥에 가두지 않다니요! 여봐라, 당장 남원의 첩자를 포박하라!”

황제가 매섭게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누가 황후에게 손을 대는지 짐이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친왕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사건의 배후가 확실히 밝혀졌는데도 황후를 두둔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노친왕 중 가장 항렬이 높은 친왕은 무려 일흔 살이었다. 종실 내부에서도 덕성과 명망이 높은 자였다. 그는 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등의 예를 갖출 필요 없었다. 그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황상, 황상은 황제임과 동시에 묵용씨의 자손입니다. 만약 우리 친왕들의 경고를 계속 무시한다면 본왕도 가법대로 하겠습니다!”

묵용가는 황족이지만, 개국 초기 후대 군왕의 횡포를 막기 위해 종친의 의결을 거치면 황제를 벌할 수 있다는 가법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황제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였다.

묵용씨의 가법대로라면 굵은 코뿔소 가죽 채찍으로 황제를 벌해야 했다. 질기고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은, 한 대만 맞아도 피부를 터트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틀림없이 고통스러우리라. 다만 동월이 세워진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채찍을 사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친왕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황제는 그 존재를 기억조차 못했을 것이다.

노친왕의 발언에 다른 친왕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황제를 모해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는데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친왕들이 자신을 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건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백천범을 가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천범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가법에 따른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노친왕은 백천범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를 무시해 버렸다. 옆에 있던 진왕이 대꾸했다.

“묵용씨의 가법은 선조들의 채찍으로 황제를 벌하는 것입니다!”

백천범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황제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종친들의 의견이 모인다면 그리할 수 있습니다. 그 채찍으로 한 대만 맞아도 아마…….”

백천범이 그의 말을 끊었다.

“황상을 때릴 순 없습니다. 절 잡아가세요.”

“허튼소리!”

황제가 버럭 성을 내었다.

“이곳에 가만히 있으시오.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것이오.”

“아니 될 일입니다.”

노친왕이 강경하게 나섰다.

“황후를 반드시 옥에 가두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에 처해야 합니다.”

“무엄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백천범을 아예 자신의 뒤에 숨겼다.

“짐이 말했듯이, 황후를 그 어느 곳에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설령 가둔다 한들 승덕전에 가두겠다!”

“가법에 따르겠습니다!”

노친왕이 지지 않고 맞섰다. 황제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니 그라도 제대로 시비를 가려야 했다. 묵용 가문이 저 요망한 계집의 손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 되었다. 난처해진 진왕이 모두를 타일렀다.

“황형, 노여움을 푸십시오. 왕숙들은 다 황형을 위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진 일이 아닙니까. 황후를 가두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삼왕숙, 왕숙께서도 노여움을 푸십시오. 황형께서도 가두지 않겠다고 하신 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승덕전에 가두는 것도 나쁘진…….”

그러나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진왕의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친왕들은 어떻게든 가법에 따라 황제를 일깨워 줄 생각이었다.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각을 세우는데, 바깥에서 학평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태후 노불야 납시오!”

학평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후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사나운 기세로 노친왕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누가 내 아들을 때린단 말인가?”

순간,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선황제의 황비인 데다 지금은 태후인 그녀 앞에서 항렬을 내세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친왕들은 서둘러 그녀에게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서 태후는 지난번 일 이후로 자안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시일이 지나 황제가 그녀의 금족령을 해제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궁전에만 머물렀다. 황제가 그녀를 보면 언짢아할까 몸을 숨긴 것이다.

몸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병세가 호전되었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백천범은 종종 그녀를 찾아 좋은 것들을 챙겨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백천범의 성품은 자연스레 드러났다. 황제는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지만, 황후와 태자만큼은 태후에게 효를 다했다. 이제 그녀와 황제 사이엔 황후와 태자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오늘은 학평관이 소태감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상황을 들은 그녀는 노친왕들이 가법을 따르기 전에 급히 황제를 찾아온 터였다.

서 태후는 젊을 때에도 기세가 대단했다. 얼굴을 굳히고 눈을 부릅뜨면 어찌나 매서운지 단번에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찌나 빠른지 바람이 불어닥쳤다. 들어오자마자 백천범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그가 한시름 놓았다. 매서운 시선이 친왕들에게 꽂혔다.

“누가 감히 우리 어마마마를 잡아간다 했습니까?”

갑작스레 들어온 태후와 태자는 각각 아들과 어머니를 보호했다. 그들의 기세에 노친왕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이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서 태후가 말을 가로챘다.

“황후가 황제를 모해하려 했다? 친왕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에요? 이는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길이 아닌가? 세상에 그리 우둔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친왕들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그건 그랬다. 어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을 쓰겠는가? 자멸하길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황후는 어찌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애가가 보기에 황후보다 마음씨가 선한 사람은 없네. 절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지. 한데도 그리 흉악하게 몰아세우다니,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얼굴 좀 보게나. 딱해서 볼 수가 없군.”

태후는 고개를 저으며 가엾다는 표정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태자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태후의 말처럼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태자는 노친왕에게 손을 휘두르려 했다. 진왕이 서둘러 태자 앞을 막았지만, 태자의 화를 부채질한 격이었다. 태자는 진왕을 발로 걷어차며 성을 냈다.

“누가 감히 내 어마마마를 해한단 말이야! 내가 가만 안 둘 테야.”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린아, 그만하거라. 이 일은 짐이 다시 조사할 것이다. 황후는 승덕전에 머무시오. 금족령을 내린 후 짐이 지켜보겠소.”

노친왕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망설였다. 비록 황제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한다 해도 태후까지 그러할까. 더군다나 황후와 사이가 나빴을 태후가 황후의 편을 들고 있었다. 노친왕들이 의문에 빠져 있는 사이, 진왕이 나섰다.

“왕숙, 황상께서도 경각심을 가지셨으니 조심하실 것입니다. 게다가 영 대인이 늘 황상을 살피며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겠지요. 영 대인만 곁에 있다면 황상께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황상께서 재조사하겠다고 하시니 조금만 더 지켜보시지요. 조만간 더 확실한 진상이 밝혀질 것입니다.”

* * *

다음 날, 임안성에는 새로운 소문이 나돌았다. 황후가 황제를 모해하려다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조만간 오문 앞에서 참수에 처해진다는 내용이었다.

차관에서 차를 마시던 남문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가 황제에게 손을 썼다고? 정말 일을 망치는 데 선수였다. 겨우 대제사의 통제에서 벗어났으면서 어찌 이리 쉽게 넘어가는 거란 말인가? 다만 그는 알고 있었다. 묵용감이 그녀를 쉽게 죽일 수 없다는 걸.

“황상께서 목숨처럼 아끼는 분이신데, 참수에 처하시겠어?”

“틀림없다니까. 황후를 안 죽이면 황제가 죽게 생겼는데, 안 죽이고 배겨? 황상께서 아무리 황후를 총애하신다 한들,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게 내버려 두시진 않겠지.”

남문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묵용감이 백천범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 먼 남원까지 그녀를 찾으러 왔을까. 더욱이 전쟁을 일으켜 그녀를 다시 신부로 맞았을 리도 없었다. 보아하니 저 소문은 거짓인 듯했다.

“자네들 말은 다 틀렸네.”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황상께서는 황후를 해하지 않으실 걸세. 이 일로 노친왕들과 맞서기까지 하셨다니까. 하지만 황제 시해는 대역죄이니 목숨을 앗아가진 않아도 옥에 가두실 수밖에 없겠지. 지금 황후께선 옥사에 갇히시어 모진 고문을 받고 계시네. 황상께서 처형하지 않으셔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실 걸세.”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 우리 집안에 옥사에서 일하는 형제가 하나 있는데 그 애가 몰래 알려 줬다네.”

누군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지난번 황상께서 봄 사냥에 가셨을 때, 운 좋게 황후 마마를 뵈었는데 정말 경국지색이었어. 차라리 단칼에 목숨을 끊는 게 낫지, 무엇 하러 그리 고통을 주는 것이란 말인가.”

“황상께서 어찌 죽이실 수 있겠나.”

“아이참, 영웅도 미인계는 이기기 어렵다더니, 우리 영민한 황제께서도 마찬가지구만.”

남문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자에 가려진 그의 봉안에 분노가 들끓었다. 묵용감, 이 나쁜 자식! 힘겹게 데려온 부인을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그는 은자 부스러기를 꺼내 탁자에 내던지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 * *

깊은 밤, 옥감사의 높은 담장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경탁을 치는 자가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날씨가 건조하니 불씨를 조심하시오.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과 창문을 모두 닫으시오…….”

야경꾼(밤사이에 화재나 범죄가 없도록 살피고 지키는 사람)은 옥감사 문 앞을 지키는 보초와 아는 사이였다. 그가 보초에게 인사치레를 몇 마디 건넸다.

“진 형, 오늘도 진 형이 보초를 섭니까? 어제 이미 당직을 서지 않았습니까?”

진 형이라는 자가 흠칫 놀라며 안을 가리켰다.

“오늘 중요한 분이 오지 않으셨는가. 당직이 아니라 해도 보초를 서야지.”

야경꾼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중요한 분이라니요?”

진 형이라는 사내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천하제일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이 누구겠는가? 잘 생각해 보게.”

야경꾼은 혀를 내밀며 놀라더니 다시금 경탁을 치며 길을 재촉했다. 검은 옷을 입은 채 지붕에 내려앉아 있던 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쪽에 있는 방을 알아본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천하제일의 방이라…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옥척에 바짝 붙어 오른쪽으로 이동한 그는 기둥을 따라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눈앞에 굴곡진 복도가 펼쳐졌다. 그 끝에는 어두운 동굴 입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보초병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곧장 동굴 안으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협소한 계단이 이어졌다. 한참을 내려가니 철문 옆을 지키는 보초병들이 꾸벅꾸벅 조는 게 보였다. 그는 쏜살같이 보초병에게 다가갔다. 두 명의 보초병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지만 혈을 눌리고 조용히 쓰러졌다.

검은 옷을 입은 이는 경멸의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향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한 여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새하얀 옷 너머로 아름다운 자태가 도드라졌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것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자물쇠를 비틀어 부수고는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닙닙아.”

그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창이 내려왔다. 검은 옷을 입은 이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금세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쓰러져 있던 여인은 그가 불렀던 닙닙이 아니라 낯선 이였다. 그가 복면을 내리고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자승자박의 수에 걸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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