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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18)화 (617/1,192)

제618화

여전히 익숙한 나무와 풍경을 바라보던 남문우의 두 눈에 물안개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거의 십 년만이었다. 떠날 때만 해도 스물이 조금 넘는 나이였는데, 이제는 이립而立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공명功名도, 아내도 얻지 못했는데 대체 무얼 세운단 말인가?

심지어 성까지 바꾸었으니 조상을 볼 낯도 없었다. 성만 바꾸었을까, 나라를 팔고 남원의 황가 성을 따랐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을 터였다. 이제 돌아왔으니 조상들에게 사죄하고 위지 가문의 명예를 되찾아야 했다. 애당초 그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응당 그가 갚아야 했다.

그는 이곳을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벽돌 하나 기와 한 장 모두 그의 머리에 선연히 새겨져 있었다. 잡초를 헤치고 나아가던 그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사당 앞에서 멈추었다. 대대로 위지 가문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었다.

먼지로 뒤덮인 문을 밀자 ‘끼익’ 소리가 불쾌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짙은 먼지 냄새가 코를 훅 찔렀다. 그는 먼지 쌓인 제단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선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대황자 묵용한이 황위에 오른 후, 위지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멀리 도망쳤다. 그가 집을 압류하긴 했지만, 다행히 사당을 부수진 않았다.

오히려 위패 네 개가 더 늘어나 있었다. 제단 앞에 다가간 그는 위패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의 부친과 큰형, 둘째 형, 그리고 그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위패에는 그의 예전 이름인 ‘위지문우’가 적혀 있었다. 상처를 입은 채 혼란을 틈타 멀리 도망쳤던 때가 잠시 떠올랐다. 그 후 누가 시신을 수습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게도 위패까지 만들어 모셔 주었다. 덕분에 그를 제외한 세 사람은 편히 쉴 수 있었으리라.

그는 향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공손히 삼배를 올렸다. 선조들과 부모, 형제들에게 절을 올린 그는 마지막으로 향에 불을 붙이고 자신의 위패를 향해 절했다…….

* * *

백천범은 쟁반을 든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복도에 서 있던 학평관이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달려 나왔다.

“어찌 마마께서 직접 가져오십니까? 월규와 녹하는요?”

백천범이 몸을 살짝 틀며 그의 손을 피했다.

“총관리, 그 애들을 나무라지 마셔요. 제가 가져오겠다고 한 겁니다.”

학평관이 웃으며 말했다.

“노친왕들께서 많이 와 계십니다. 현모양처인 황후 마마의 모습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난 거예요?”

“십 년에 한 번 지내는 대제이니 정성을 다해야겠지요. 마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백천범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종실 어른들과 형제들이 자리해 있었다. 진왕도 황제와 무언가를 논의하는 중이었다. 황제는 백천범이 들어오자 바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찌 이곳까지 온 것이오?”

“당신이 점심 어선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고 들어서요. 배고플까 싶어 제가 좁쌀 죽을 끓여 왔습니다.”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황수께선 정말 세심하십니다. 황형께서 황수를 그리 보배처럼 아끼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좁쌀 죽을 건네받고는 숟가락으로 가볍게 저으며 진왕을 흘겨보았다.

“뭘 그리 부러워하느냐? 네가 마음을 다잡는다면 진왕비도 그리해 줄 것이다.”

진왕은 부끄러운 마음에 괜스레 화를 냈다.

“황형, 왕숙들 앞에서 제 단점을 꼭 들추셔야겠습니까?”

친왕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몇몇은 몰래 백천범을 살폈다. 황궁 바깥에서는 황후의 소문이 무성했다.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었다가 남원의 무양공주가 된 여인. 또 대혼날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황제는 유언비어를 틀어막았다. 그녀를 향한 총애는 여전히 더할 나위 없었다.

어찌나 끝도 없는 총애인지, 황제 앞에서 감히 ‘당신’이나 ‘저’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가! 규율이라고는 조금도 없음에도,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죽을 한 숟갈 떠서 입에 가져갔다.

“왕숙들도 황후의 솜씨를 맛볼 수 있게 좀 더 담아 오라고 하시오.”

그러나 백천범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기만 했다. 황제가 좁쌀 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녀가 별안간 죽 그릇을 내리쳤다. 사방에 날리는 새하얀 죽 사이로 모두의 놀란 얼굴이 얼핏 비쳤다. 그때, 어디선가 하얀 고양이가 튀어오더니 바닥에 엎질러진 죽을 핥았다.

백천범이 찢어질 듯 소리쳤다.

“소백아, 안 돼……!”

고양이는 몸을 비틀더니 휘청거리다 픽 쓰러졌다. 가까이에 있던 진왕이 다가가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고양이는 이미 숨이 끊긴 뒤였다. 진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황후, 대체 무얼 하시는 겁니까?”

모든 이의 시선이 진왕에게 향했다가 곧장 백천범으로 향했다. 황후가 황제의 음식에 독을 타다니. 그것도 감히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직접 본 게 아니라면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백천범은 숨을 거둔 고양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소백아, 소백아…….”

한 노친왕이 정신을 차리고 호통을 내질렀다.

“황제 폐하, 어찌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어서 황후를 압송하셔야지요.”

“폐하, 무얼 망설이시는 겁니까? 다들 보았습니다. 설마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낯빛이 어두워진 황제는 천천히 백천범에게 다가갔다.

“황후, 짐을 죽이려는 것이오?”

“아뇨. 저, 저는……”

백천범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숨이 턱 막히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황제가 몸을 돌려 노친왕들에게 말했다.

“다들 들으셨소? 황후가 아니라고 하지 않소. 짐은 황후를 믿소.”

“황제 폐하.”

노친왕이 원망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폐하께서 애처가라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폐하의 목숨을 앗아가려 하였습니다. 한데도 어찌 그리 감싸시는 겁니까?”

“황후가 한 짓이 아닐 것이오. 누구도 황후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없소.”

진왕이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황형,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때 조사하지 않으면 왕숙들뿐만 아니라 이 아우도 황형의 안전이 걱정될 것입니다. 황형께서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천자이십니다. 천금 같은 황형께 이리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니요. 밖으로 소문이 난다면 만백성이 불안에 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우가 배후를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한 노친왕이 백천범과 황제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진왕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조사가 끝나기 전까진 황상의 안위를 위해 황후와 거리를 두십시오.”

“무엄하다!”

황제가 노친왕을 밀치고 백천범의 손을 꽉 잡았다.

“황후는 짐의 부인이다. 이런 일로 부인을 내치란 말인가!”

“황상!”

노친왕이 급기야 무릎을 꿇었다.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여인 때문에 사직과 만백성을 돌보지 않으시다니요. 백성들의 원망을 사시려는 것입니까!”

진왕도 무릎을 꿇었다.

“황상, 어찌 되었든 명백히 조사한 후에 다시 얘기하시지요. 그리하는 게 황후 마마의 결백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황상!”

친왕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부르짖으니, 그 기세를 이길 수 없었다. 황제가 결국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하면 조사해 보거라. 짐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친왕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왕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조사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황후 마마의 궁녀를 불러 상황을 파악하고 위 태의가 죽 안에 든 독을 확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어디에서 난 독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만 분명히 조사하면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월규가 불려 왔다.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월규는 조금 겁이 난 표정이었다. 뒤이어 바닥에 떨어진 좁쌀 죽과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백천범에게 보냈다. 진왕이 매섭게 호통을 쳤다.

“이 죽은 누가 만든 것이냐?”

월규는 몸을 덜덜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서 고하지 못할까! 거짓을 고했다간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다.”

다리가 풀린 월규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마, 마마께서 만드셨습니다.”

“도와준 자는 없었느냐?”

“마마께서, 직접 황상의 간식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고 하시어 아무도 돕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황후 마마 홀로 만드시었다는 것이냐?”

월규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위중청이 급히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신 위중청, 황상을 뵈옵니다. 이리 급하게 신을 부르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진왕이 사건의 조사를 맡은 후로 그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진왕이 말했다.

“위 태의, 이리 와서 확인 좀 해주게. 바닥에 쏟아진 죽에 어떤 독이 들어 있는 것인가? 어째서 고양이가 몇 입 핥자마자 숨을 거두었단 말인가?”

위중청은 서둘러 죽이 쏟아진 곳에 다가갔다. 한참 뒤, 그가 어두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했다.

“왕야, 고양이의 경부 근육이 경직되고 동공이 수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몸 전체가 움츠러들고 이빨이 꽉 조여 있는 게 경기를 일으킨 모습입니다. 소관의 의견으로는 마전자馬錢子(마전의 씨)의 독이 사용된 듯합니다.”

진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전자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위중청이 갑작스레 무릎을 꿇었다.

“왕야, 어제 태의원에 있던 마전자 두 돈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

진왕이 사납게 책상을 내리쳤다.

“어째서 제때 보고하지 않은 것이냐?”

“그리 많은 양이 아니라 다른 약재에 섞여 들어갔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제 태의원에 온 외부인은 황후 마마밖에 없으니,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어…….”

용의자는 너무도 명확했다. 황후가 태의원에서 마전자를 훔쳐 황제의 음식에 탄 것이다. 그러나 모종의 가책을 느꼈는지 그릇을 내동댕이쳤고 황제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다만 황후의 속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행되었으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든 용서받을 수는 없으리라. 황제가 차가운 눈빛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황후, 더 할 말 없소?”

“모르겠어요.”

백천범은 질겁한 얼굴이었다. 늘 꼿꼿했던 허리는 잔뜩 수그린 채, 놀란 토끼처럼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전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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