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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17)화 (616/1,192)

제617화

백천범은 서둘러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정말이지, 너무 예쁜 고양이었다. 몸 전체가 눈송이처럼 새하얗고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털을 지녔다. 특히나 눈이 보석처럼 예뻤다. 태후의 고양이는 초록색 눈이었는데 이 고양이는 짙은 파란색이었다. 고양이는 도도하고 나른해 보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순수 혈통을 가진 파사 고양이라고 하오. 기분이 울적할 땐 이 고양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 보시오.”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던 그녀가 고민에 빠졌다.

“이름을 지어 줘야겠네요.”

월규가 피식 웃고 말았다.

“마마께서는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지 않으십니까.”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워져, 얼른 내뱉었다.

“난 점잖은 이름을 지을 줄 모르는걸. 작고 하야니까 소백小白이라고 부를래요.”

학평관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됩니다. 그 이름은 마마께는 금기입니다.”

백천범은 태연할 뿐이었다.

“설마 제가 백씨라서요? 그럼 백씨 성을 가진 백성들은 전부 이름을 바꿔야 하나요? 그냥 소백이로 할래요. 얼마나 좋아요. 입에도 착착 붙고.”

황제가 웃으며 거들었다.

“상관없소. 그대가 진짜 백씨 집안사람도 아니니까 말이오.”

백천범이 눈을 반짝였다.

“점박이 쓸쓸하게 지내고 있으니 소백이랑 같이 지내라고 해야겠어요. 어쨌든 생김새도 조금은 닮았잖아요. 점박이가 조금 클 뿐이지.”

그녀의 말에 모두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월규가 조심히 물었다.

“…마마, 점박이가 소백이를 잡아먹을까 봐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농인데, 다들 진지하게 듣다니요. 점박이가 소백이를 잡아먹을 일은 없지만, 장난을 걸지도 몰라. 소백이 입장에서는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울걸.”

황제가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짓궂긴.”

학평관과 월규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소백이와 함께 있으니 백천범도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그녀는 각종 천을 모아 장난감을 만들어 주며 소백이를 예뻐했다. 소백 역시 그녀가 어디를 가든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백천범이 고양이를 기르는 방식은 보통의 여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른 부인들은 세심하게 고양이를 길렀다. 먹이를 주거나 털을 빗겨 주고 목욕을 시켜 주는 전문 인력을 두는 것은 물론, 고양이를 늘 품에 안고 다녔다.

하지만 백천범의 고양이는 늘 자유분방하게 뛰어다니기 바빴다. 아침에 월규가 단장해 줄 땐 귀족 가문의 얌전한 아가씨 같았지만, 오후가 되면 꾀죄죄해져 돌아왔다. 도둑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어쨌든 황후 마마가 기쁘면 그만이기에, 다들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다만 고귀한 혈통을 가진 고양이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지도 몰랐다. 원래는 황후 곁에서 호의호식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야 하는데,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소백이는 종종 성질을 부리거나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원망스럽게 야옹거리기도 했다.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소백이를 바라보았다.

“왜 안 가는 거야, 거의 다 왔는데.”

그녀가 일렬로 늘어선 방을 가리켰다.

“어서 가자. 저기까지 가면 계피를 줄게.”

소백이는 또다시 야옹대더니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백천범이 말한 곳은 태의원이었다. 황후 마마의 방문에 위중청은 수하들과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 백천범은 그들의 인사를 마다하며 말했다.

“다들 일어나요. 예를 갖출 거 없어요. 가서 할 일들 하세요.”

곧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약재를 다듬거나 말리고, 자르고, 조제하는 등 분주히 일했다. 위중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태의원까진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아무 일도 없어요.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에요.”

백천범은 기다란 탁자 위에 놓인 수많은 약재를 바라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짙은 약재 향기가 훅 끼쳐 왔다. 그녀는 탁자 가까이 걸어가 이것저것 물었다. 위중청은 매번 약재마다 어떤 효능이 있는지, 무슨 병을 치료할 때 쓰는지 등을 성실히 알려 주었다.

백천범은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처럼 그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한참 설명을 듣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맞다, 계피 좀 줄 수 있어요? 소백이가 좋아하거든요. 안 주면 돌아가려 하지 않을 거예요.”

위중청은 곧장 명을 받잡고 수하를 부르려 했다. 백천범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작은 일도 사람을 시키는 거예요? 위 태의가 직접 해요.”

위중청은 민망하게 웃으며 예를 갖추고는 자리를 떴다. 계속해서 약재를 살피던 백천범은 남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무엇인가를 손에 감추었다.

* * *

임안성 북쪽에는 오래된 저택이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저택의 위엄은 건재했다. 우뚝 솟은 대문부터 문을 지키는 위풍당당한 돌사자, 두 장 정도 넓이의 기다란 계단까지.

그러나 봉인이라 쓰인 종이가 대문 한복판에 붙어 있었다. 그 글씨마저도 간신히 알아볼 만큼 흐릿해진 상태였다. 대문 곳곳에도 먼지와 균열이 가득했고. 현판이 걸려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누가 봐도 압류된 고위 관리의 저택이었다.

멀지 않은 노상 찻집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도, 남문우의 시선은 줄곧 저택의 대문에 머물렀다. 그가 앉아 있는 찻집도 쓸쓸하긴 매한가지였다. 손님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주인은 노인이었다. 그가 자꾸 저택을 바라보자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저 집이 궁금하신가 보지요?”

남문우가 커다란 잔을 흔들며 천천히 대꾸했다.

“압류된 지 오래되어 보이는데, 조정에서는 아직도 내놓지 않았나 봅니다?”

“내놓았지요. 하지만 누가 감히 사겠습니까?”

노인이 혀를 끌며 말했다.

“집만 봐도 아시겠지만, 엄청난 집안의 저택입니다. 안이 어찌나 넓은지 뒤쪽은 경산景山과 맞닿아 있고 커다란 호수까지 있지요. 풍경은 또 얼마나 예쁜지요. 하지만 이 집을 살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 저택이 어느 집안의 것인지 아십니까?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남문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 담이 커서 잘 놀라지 않습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노인은 손가락을 펴더니 햇수를 헤아렸다.

“팔구 년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때 도성에 쟁쟁한 세력을 지닌 문관과 무관 가문이 있었지요. 문은 황보 대학사의 가문, 무가 이 저택에 살던 위지 대장군 집안이었습니다. 그땐 두 가문이 조정을 좌지우지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좋은 게 늘 오래가지는 않나 봅니다. 황권이 크게 요동친 후, 두 가문 모두 희생양이 되었지요. 저는 이곳에서 위지 가문의 번영과 몰락을 직접 보았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가문이 순식간에 추락하고 가족들이 전부 달아나 버리는 것도요.

나중엔 조정에서 저택을 압류하고 저리 방치해 두었지요. 대문에 붙은 봉인 종이도 저리 못 쓰게 되었는데 아무도 관리하지 않습니다. 높으신 분들도 이 저택을 잊으신 게지요.”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노인이 찻물을 따라 주었다.

“보아하니 손님은 도성 분이 아니신 것 같아 이 늙은이가 많은 얘길 했습니다. 그래도 근래에만 황제가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위지 가문의 일을 언급하는 건 큰일이 아니지요.”

“위지 가문의 가족들은 다들 어디로 도망쳤습니까?”

“그것까진 저도 잘 모릅니다.”

노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먼 친척들은 어딘가에서 생계를 이어가겠지만, 대장군의 직계 가족들은……. 에휴, 위지 대장군은 참 좋은 분이셨는데 말입니다. 대장군의 세 아들도 참 용맹했지요. 특히 막내아들 위지문우 도련님은 용모가 뛰어난 데다, 어릴 때부터 태자의 공부 동무가 될 정도로 총명하셨지요. 지금의 황상과도 친분이 깊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전사했지만요. 살아 있었다면 서른쯤 되었을 겁니다.”

남문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자에 가려진 두 눈은 밝게 빛났다. 그는 서른이 아니라 벌써 서른둘이 되어 있었다.

“어르신, 근처에 향을 파는 곳이 있습니까?”

“아이고, 그럼 앞쪽 골목을 가로질러 가셔야 합니다. 예전엔 이 골목도 제법 북적였는데 위지 가문이 화를 당한 뒤로는 썰렁해졌지요. 장사꾼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어르신은 왜 안 옮기셨습니까?”

“이 늙은이는 옛정을 잊지 않으려 자리를 지키는 것이지요. 예전에 위지 가문에서 제게 은혜를 베풀었던 적이 있습니다. 다 늙어 재주랄 것도 없으니 이 자리만이라도 지켜 은혜를 갚는 수밖에요. 개구쟁이들이 문 앞에서 오줌을 누거나 문에 낙서를 하면 제가 혼쭐을 내줍니다. 청소도 한 번씩 하고요. 남들이 볼까 봐 자주는 못 하지만 말입니다.”

남문우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위지 가문에서 어르신께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손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병을 앓았습니다. 하지만 의원을 부를 돈이 없었지요. 해서 제가 막내 도련님의 말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도련님은 저에게 은자 한 덩이를 주셨고 덕분에 손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놈이 벌써 열두 살이 되었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하지요.”

“어르신께서 복이 많으신 겁니다.”

남문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은자 한 덩이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잘 마셨습니다.”

노인은 멍하니 은자를 바라보았다. 차 한 잔은 그저 동전 한 닢에 불과하거늘, 어찌 이리 많은 돈을 낸단 말인가? 그가 난처한 얼굴로 손을 비볐다.

“손님, 제가 거슬러 드릴 돈이 없습니다. 은자밖에 없으시거든 안 주셔도 됩니다. 그저 오늘 이 늙은이가 한 말만 퍼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남문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거슬러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도 마시고 옛이야기도 들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받으셔도 됩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모자 아래로 얼핏 보이는 그의 눈매를 알아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멀어진 후에야, 노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노인은 살면서 딱 두 번, 은자 한 덩이를 받아 보았다. 그것도 매번 같은 사람에게서 받다니. 몇 년이 지나도 막내 도련님의 풍채는 그대로였지만, 돌아갈 집이 사라졌으니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남문우는 향을 산 뒤, 길을 돌아 저택 뒷문에 다다랐다. 뒷문 쪽은 더 외진 덕분에 아무도 오가지 않았다. 그는 훌쩍 뛰어올라 빠르게 담을 넘었다.

후원은 잡초가 무성해 길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잡초 사이를 거닐며 천천히 나아갔다. 허리춤까지 자란 잡초를 밀며 걸으니 황야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황야가 아니라 그의 그리운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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