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6화
옅은 하늘빛 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천지를 밝게 비췄다. 묵용린은 눈을 뜨자마자 미소 짓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양아버지,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양아버지란 말은 가동의 마음을 한없이 간질였다. 눈만 뜨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니 점점 더 친근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양부는 전하께서 일어나시길 기다렸지요. 환복 시중을 도우려고요.”
묵용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희와 장량은요? 어째서 사부님이 제 시중을 들어요? 둘은 어딜 가고요?”
사부라는 말에 가동이 눈을 흘겼다.
“어째서 이번엔 양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태자가 시선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너무 자주 부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입버릇이 되면 큰일이 날 거라고요.”
“그건 그렇습니다.”
사실 가동은 사부라는 말도 상관없었다. 한 번 사부는 아버지처럼 모신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아버지인 건 매한가지였다.
“사희와 장량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 두었습니다.”
태자의 옷 가방을 가져온 가동은 몇 벌 뒤적거리다 월백색의 긴 장포를 꺼냈다.
“오늘은 이 옷이 어떠십니까?”
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밋밋해요. 다른 거요.”
가동이 이번에는 자색 바탕에 기린이 수놓아진 장포를 꺼냈다.
“이 옷은 화려하지요.”
태자는 반짝이는 금빛 기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네, 이걸로 할게요. 양어머니의 솜씨는 정말 최고예요.”
가동은 부인을 치켜세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성이란 성을 다 돌아다녀도 전하의 양어머니만큼 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이름에 ‘린’ 자가 있으니 기린을 수놓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앞으로는 용포를 더 많이 입으실 테니, 기린포는 요 몇 년밖에 입지 못하겠지요. 전하의 양어머니가 황후 마마께 물어보았는데, 당분간 전하께 기린포를 입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태자는 신이 난 얼굴로 기린포에 팔을 집어넣었다.
“좋아요. 모후께서 말씀하셨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부황도 늘 모후의 말씀에 따르시니까요.”
태자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가동을 올려다보았다.
“사부님, 어째서 사내는 어른이 되면 부인을 무서워해요? 사부님도 사모님을 무서워하잖아요.”
“…옛말에 사내는 여인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로 식견이 다른 탓이지요.”
태자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부님은 사모님 앞에서 너무 약해요. 난 나중에 부인이 생기면 말을 잘 들으라고 할 거예요.”
가동이 그를 놀리며 말했다.
“아이고, 아직 솜털도 다 나지 않았는데 부인을 맞을 생각부터 하시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훗날 전하께서 천하를 군림하실 땐 중궁, 서궁, 동궁의 수많은 비빈들이 전하께 고개 숙이지 않겠습니까.”
태자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여인이 많은 건 성가셔요. 전 마음에 드는 여인만 신부로 맞을 거예요.”
가동은 진지한 아이의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묵용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앉으십시오. 이 사부가 머리를 빗겨 드릴 테니까요.”
“사부님은 머리도 빗길 줄 아세요?”
“전하의 사부는 못 하는 게 없습니다. 못 믿겠으면 맡겨 보십시오.”
태자는 가동의 말을 믿고 의자에 앉았다. 빗을 들고 온 가동이 윤기 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빗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동이 언제 머리 손질을 해 봤겠는가. 그저 아비의 마음으로 태자의 머리를 빗겨 주고 옷을 입혀 주고 싶었다.
그때 녹하가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들을 보고 나무랐다.
“자기 머리도 못 빗으면서 누구 머리를 빗겨 주겠다는 거야. 그러다 전하가 아파하시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테야.”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깥의 노비에게 말했다.
“장량, 들어와서 전하의 머리 좀 빗겨 줘요.”
부인이 제 체면을 깎으니 가동이 고집을 부렸다.
“어깨 너머로 대충 배웠다고. 아주 못하는 건 아니다, 뭐.”
말은 그리하면서도 장량이 가까이 오니 가동은 한 발짝 물러났다. 태자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언제 진중해지실 거예요. 이렇게 모자라게 구시면 안 된다고요.”
어린 태자에게까지 모자라다는 말을 들은 순간, 가동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성을 내며 밖으로 향했다.
녹하와 태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가동을 화나게 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잠시 화가 난 척만 할 뿐, 또 금세 시시덕거리며 웃지 않던가.
아침밥을 먹은 뒤, 태자는 정원에서 넝쿨에 달린 자그마한 참외를 발견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청백색 껍질을 두른 참외는 묵용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가 손을 뻗으려 하자 사희가 타일렀다.
“전하, 아직 익지 않아 따시면 아니 됩니다.”
그러나 태자는 들은 체도 않고 참외를 있는 힘껏 비틀었다.
“전하, 옛말에 억지로 딴 참외는 달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리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전하께선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태자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달든 안 달든 난 딸 거야.”
그때, 멀리 있던 십칠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오더니 참외 넝쿨을 끊어 버렸다. 넝쿨과 함께 참외가 바닥을 굴렀다.
“전하, 여기 있습니다.”
태자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따려고 한 건데 네가 따면 어떻게 해. 이걸로 무엇 하라고?”
태자는 소매를 세게 털며 발걸음을 옮겼다.
“궁으로 갈 거야!”
십칠은 넝쿨을 든 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사희가 웃으며 말했다.
“십칠, 전하 곁을 이리 오래 지켰으면서 아직도 전하의 성격을 모르신단 말이오. 자, 그만하고 어서 환궁還宮합시다.”
십칠은 참외를 흙 위에 던져 두고 빠르게 태자 뒤를 쫓았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인파로 붐볐다. 거리 곳곳에서, 상인들이 노점을 열고 장사에 한창이었다. 발을 걷고 밖을 바라보던 묵용린은 마차를 세웠다. 가동이 무슨 일인지 묻자, 묵용린이 한 노점상을 가리켰다.
“모후께서 저 집 간식을 좋아하세요. 좀 사 가야겠어요.”
가동이 그를 칭찬했다.
“역시 마마께서 아들을 잘 두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 사부가 가서 사 올 테니까요.”
묵용린은 자신이 마차에서 내리면 일이 번거로워진다는 걸 알았기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그동안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시선이 문득 만둣국을 파는 노점에 멈췄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만둣국을 먹는 한 사내에게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사내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 꼭 강호의 협객 같은 차림이었다. 이따금 고개를 들 때마다 모자에 가려진 예쁜 봉안鳳眼(봉황의 눈처럼 가늘고 길며 붉은 기운이 있는 눈)이 언뜻 보였다.
모르는 사내이건만, 묵용린은 어디선가 그를 본 것만 같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사내가 깊은 눈망울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때마침 가동이 간식을 사서 돌아왔다. 묵용린이 그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부님, 저기에서 만둣국을 먹는 사람 누군지 알아요?”
묵용린이 가리키는 곳에는 커다란 모자를 쓴 사내가 보였다. 모자에 가려진 탓에 가동은 사내를 알아볼 순 없었다.
“아뇨. 왜요? 아시는 분입니까?”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서요. 날씨가 덥지도 않은데 무엇 하러 저렇게 큰 모자를 쓰겠어요? 꼭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봐 무서워하는 것 같잖아요.”
가동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풍류를 즐기는 문인들이 저런 모자를 즐겨 씁니다. 고상한 척하는 거지요. 그러니 이상할 것 없습니다.”
마차는 다시 나아갔다. 묵용린은 발을 내리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봉황을 닮은 사내의 눈매는 묵용린의 가슴속에 선명히 새겨졌다.
* * *
“마마, 마마.”
월규가 백천범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백천범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무슨 일이야?”
“소인이 묻고 싶은 말입니다.”
월규가 말을 이었다.
“그리 넋을 놓으시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냥 조금 정신이 없네. 잠시 누워야겠어.”
그녀가 방으로 향했다.
“태자는?”
“전하께선 서재에 계세요.”
“황상은?”
“황상께선 남서방에서 상주서를 읽고 계시고요.”
백천범은 월규에게 겉옷을 건넨 뒤 침대에 누웠다. 월규가 장막을 내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자 백천범은 오른손을 유심히 살폈다. 어째서 그날 밤, 황제의 목을 누르려 했단 말인가?
다행히 그녀가 그리 힘을 주지 않았고, 황제도 피곤했는지 몸을 뒤척였다. 잠에 빠진 그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아 버렸다. 그녀의 오른손은 그의 품에 묶였지만, 마치 의식이 있는 듯 자꾸 황제의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잠에서 깨고 나니 그저 꿈인 듯했다. 그녀가 어찌 황제의 목을 조를 수 있을까? 더욱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건 더욱더 말이 되지 않았다. 황당한 꿈을 꾼 게 분명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황제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있었다. 백천범이 아직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오셨어요?”
“당신과 잠시 낮잠을 청하려 왔소. 월규 말로는 당신 몸 상태가 좋지 않다던데, 불편한 곳이라도 있소?”
“아뇨. 잠시 자고 일어났으니 괜찮을 거예요.”
황제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쓸어내리다 자그마한 배에 손을 얹었다.
“아이가 생긴 것은 아니오? 위 태의를 불러 진맥을 하라 해야겠소. 지난번처럼 아이가 생긴 것도 모르는 부모가 되진 말아야지.”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속옷 위를 쓸어내리다가 점점 안으로 파고들었다. 백천범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 말아요. 정신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황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저 당신과 더 가까이 있고 싶은 것뿐이오.”
그녀의 배 위로 커다란 손이 놓였다. 살갗을 서로 맞대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백천범을 짓누르고 있던 답답함을 단번에 녹여내는 듯했다. 그녀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문질렀다.
“더 주무실 거예요? 전 일어나야겠어요.”
황제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짐도 잠시 눈을 붙여서 괜찮소. 같이 일어납시다. 당신에게 줄 게 있소.”
“뭔데요?”
백천범은 금세 신이 났다. 황제가 준비했다면, 그녀의 마음에 쏙 들게 틀림없었다. 황제는 뜸을 들이며 일단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조급해할 것 없소. 가져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겉옷을 입은 백천범이 급히 침대를 내려왔다. 월규가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 주며 웃었다.
“마마, 여전히 어린아이 같으십니다. 황상께서 선물을 주신다는 말에 그리 기뻐하시다니요.”
학평관도 황제에게 용포를 걸쳐 주었다. 황제가 말했다.
“되었다. 나머진 짐이 알아서 입을 테니 가서 황후의 선물을 가져오너라. 황후가 저리 초조해하지 않느냐.”
대답을 올린 학평관이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금세 돌아온 그의 품에는 새하얀 파사波斯(페르시아)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지난번에 자안궁에 다녀와서는 태후의 고양이가 좋다며 쉴 새 없이 떠들지 않았소. 해서 짐이 한 마리 구해 왔소. 보시오, 태후의 고양이보다 부족한 점은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