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15)화 (614/1,192)

제615화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워낙 고집불통이라 말을 듣질 않으십니다. 제가 황상 대신 효를 다하는 수밖에요.”

그에 녹하가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마마께선 덕으로 원한을 갚으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태후 마마께서도 마마를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기홍도 거들었다.

“마마께선 정말 덕으로 사람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궁 안에 마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거드름을 피우시지도 않고, 늘 상냥하고 친절하시잖아요.”

백천범이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다들 뒤에서는 제가 황후답지 않다고 떠들잖아요. 저는 견식도 없고 규율도 못 배우겠어요. 태자는 평온하고 느릿느릿 걷는데, 저는 아직도 빨리 걸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가동이 몇 번이나 지적해 주었지만 못 고치겠어요.”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하, 무엇 하러 가동 말을 들으려 하십니까? 황상께서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가동이 무슨 자격으로요.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제 사부였잖아요. 게다가 다 절 위해서 하는 말인걸요.”

백천범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황상께선 오늘 어디 가셨어요?”

녹하와 기홍 모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명절이라 공휴일이었다. 황제는 시간이 날 때면 황후 주변을 그림자처럼 맴돌았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녹하도 의아한 표정으로 기홍을 바라보았다.

“너도 몰라? 너희 집 영 대인은 늘 황상 곁을 지키잖아.”

“모르겠네. 황상의 일은 나한테도 안 알려주니까.”

기홍은 불룩한 배를 쓸어내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바깥에서 학평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황제 폐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온통 흙투성이가 되시다니요…….”

백천범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어깨에 금룡이 가득 수놓아진 평상복을 입은 황제가 돌아왔다. 다만 옷자락이 온통 흙탕물에 젖어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영구도 꾀죄죄하긴 마찬가지였다. 영구의 손에는 옻칠을 한 오동나무 통이 들려 있었다. 백천범을 보자 황제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맞혀 보시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얼 가져왔는지.”

백천범이 어찌 알지 못할까. 하지만 그녀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미꾸라지를 잡으러 간 거예요? 왜 절 부르지 않고요. 제가 얼마나 잘 잡는데요.”

“발이 푹푹 빠지는 위험한 곳이었소.”

황제가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그런 곳에 빠졌다간 큰일 아니오. 게다가 이런 건 사내들이 하는 일이오. 당신은 그저 맛있게 먹으면 되오. 부인, 그러지 말고 어서 웃어 주시오.”

그의 말에 백천범은 곧장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환히 웃어 보였다. 아직도 옛일을 잊지 않고 미꾸라지를 잡아 주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온몸이 진흙투성이에요. 우선 가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요.”

“기쁘오?”

“무척 기뻐요.”

두 부부의 애정 행각이 펼쳐지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멀찍이 물러났다. 황제는 둘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리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신이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어떻소?”

백천범은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럴 시간 없어요! 어서 가서 씻어요!”

황제는 화난 척 대꾸했다.

“짐은 황제요. 감히 짐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다른 이들에게 체통 없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좀 보세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 * *

황제는 시종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정초를 보내라는 배려였다. 따로 가족이 없는 월규와 학평관만 남아 시중을 들었다.

묵용린은 또 가동과 몰래 궁에 나갔다. 묵용린을 자유롭게 키우길 원하는 백천범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묵용린이 스스로 처신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고 틈틈이 무술을 익히며 됨됨이를 갖춰 가니 딱히 황제가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는 멍청한 가동을 스승으로 둔 태자가 올곧게 크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역시 그를 닮아 총명한 인재가 틀림없었다. 어릴 때의 그도 스스로를 잘 통제하고 규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술이 몇 차례 오가자 백천범의 얼굴엔 붉은 기가 흐르고 눈망울이 반짝였다. 유리 등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황제를 더욱 설레게 했다. 그는 눈짓으로 월규와 학평관을 내보냈다. 드디어 그녀와 단둘이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백천범이 웃으며 술을 따라주었다.

“이제 제가 시중을 들어야겠네요.”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잔을 건넨 뒤, 자신의 잔도 들어 올렸다.

“이번 잔은 우리 부군을 위한 잔이에요.”

황제가 술잔을 받고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더 할 말 없소?”

백천범은 앞으로 더 출세하고 부자가 되라는 덕담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황제였다. 더 출세했다간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될지도 몰랐다.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 좋은 황제가 되길 바랄게요.”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까진 바라지도 않소. 그저 지금의 백성들에게 욕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소. 공은 세우지 못하더라도 허물은 없길 바랄 뿐이오.”

고개를 끄덕인 백천범이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술만 드시지 말고 음식도 많이 드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뱅어도 있잖아요. 제가 좀 덜어 드릴게요.”

그녀는 자그마한 뱅어 한 마리를 집어 황제에게 먹여 주려 했다. 문득 그녀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황제의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다 또 중간에 멈추고 또 다가오다 멈추길 반복했다. 마치 실에 묶인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황제는 단순히 그녀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백천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황제의 입 가까이 뱅어를 가져갔다. 황제가 입을 벌리는 순간, 백천범의 손에 힘이 풀렸다. 뱅어는 바닥에 툭 떨어졌고, 그녀는 꿈에서 깬 양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황제도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닫고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무슨 일이오? 손이 아픈 것이오?”

백천범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 보았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멀쩡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일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황제가 그녀의 팔을 주물러 주었다.

“힘이 없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조금 전엔… 아무래도 오늘 녹하랑 오색실을 엮어서 손이 피로했나 봐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황제는 그녀의 옷소매를 걷고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주물러 주었다.

“시큰거리거나 아프지 않소? 내가 좀 주물러 주겠소. 아니면 위 태의를 불러 살펴보는 건 어떠오?”

“이미 괜찮아졌는걸요.”

백천범은 소매를 내리며 웃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그리 놀라면 어떡해요. 그리고 위 태의도 모처럼 쉬는 건데 이런 일로 부를 수야 없지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질을 해 보였다. 그제야 황제는 마음을 놓았다. 부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술을 즐겼다. 술기운이 제법 오른 백천범은 턱을 괴고 나긋하게 그를 불렀다.

“단노.”

그녀의 얼굴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망울은 아득하면서도 어여뻤다. 어느덧 황제의 가슴 속에 자그마한 불길이 일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짓궂게 웃었다.

“나를 이렇게 홀리다니.”

그는 그녀를 품에 안으려 일어났다.

“늦었으니 그만 쉽시다.”

하지만 백천범은 탁자에 엎드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먹자마자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 안 가요.”

“자는 게 아니라 할 일이 있소.”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았다.

“씨름이라도 하려고요? 맨날 내가 지는데… 안 해요.”

“이번엔 내가 봐주겠소. 그대가 이길 것이오, 어떻소?”

“거짓말.”

“정말이오. 이번엔 그대가 위에 있게 해 주겠소. 날 힘껏 누르면 분명 그대가 이길 것이오.”

황제가 어르고 달래자 백천범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은 조금의 허물도 없는 사이였다. 백천범이 돌아온 후, 황제는 정무보다 이 방면의 일에 더 성실히 임했다. 품에 있는 아름다운 이 여인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두 눈은 언제나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보물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 시대의 남자는 여자의 근간이며 여자들은 남자에 의존한다고 하지만, 이제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야말로 그의 근간이자 지배자였다. 그녀가 있으면 아무리 황량한 곳도 따뜻한 집이 되었고, 그녀가 없으면 호화로운 궁전도 짐승들이 사는 우리에 불과했다.

그는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고 늘 그녀만 생각했다. 이 짙은 감정은 오래된 술 같아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맛을 냈다. 백천범은 그의 건장한 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황제가 되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아직도 이렇게 탄탄하다니.”

황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어째서 또 눕는 것이오. 오늘은 그대가 위에 있겠다 하지 않았소? 이렇게 금방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오?”

그는 곧장 그녀를 들어 제 위에 앉혔다. 백천범은 곧장 소리를 내질렀다.

거센 바람과 폭우가 지나간 후, 침대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장막 밖으로 새하얀 팔 하나가 보였다. 바닥에 축 늘어진 게 아니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손바닥은 꼭 무언가를 받으려는 듯 젖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굵직한 팔이 불쑥 튀어나와 섬섬옥수를 장막 안으로 거둬들였다. 잠긴 목소리가 장막 너머에서 들려왔다.

“손을 뻗고 무얼 하는 것이오? 힘드오?”

여인은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니 두 사람의 호흡도 일정해지며, 깊은 잠에 빠져든 듯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눈만은 어둠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남자의 목 가까이 가져갔다. 손가락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눈동자엔 기이한 빛이 반짝였다…….

* * *

황궁과 가까운 성 동쪽, 한밤중임에도 불을 밝힌 집이 한 채 있었다. 집 안엔 한 사내가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봉황을 닮은 두 눈에 하얀 피부가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러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고, 두 눈은 흐리멍덩했다.

그는 바닥에 은빛의 두꺼운 종이를 펼치더니 관형 모양의 작은 병 몇 개를 꺼내 놓았다. 병 안에 담긴 붉은색, 황색, 흑색, 녹색, 흰색 가루가 전부 종이 위에 쏟아졌다. 이윽고 가루로 원을 만든 그가 왼쪽 중지를 깨물었다. 흘러나온 피가 은색 종이 한가운데에 툭툭 떨어져 내렸다.

이내 합장을 한 사내가 오른손 중지로 왼손 중지에 난 상처를 꽉 쥐었다. 살짝 감긴 두 눈 아래로, 입술이 쉼 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종이에 쏟아진 오색 가루는 생명이 깃든 것처럼 가볍게 떨리더니, 중심의 피를 향해 모여들었다. 가루가 피에 닿은 순간, 피는 두 배 가까이 불어나더니 둥글게 원을 그리며 가늘게 떨렸다. 그렇게 오색의 가루들은 한 톨도 남김없이 피에 녹아들었다.

비로소 눈을 뜬 사내가 멍하니 핏방울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상처가 난 중지를 핏방울에 가져갔다. 천천히, 핏방울이 생명체처럼 상처로 스며들다 그의 손가락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