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4화
평소 태자는 서재에서 서책을 읽고, 표범은 복도 바닥에 엎드린 채 태자를 기다렸다.
묵용린은 표범과 함께 서재에 있는 게 좋았다. 교습 선생 양승해楊承海 원사院士가 더는 목판으로 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표범을 데리고 간 첫날, 태자가 답을 하지 못하자 양 원사는 평소처럼 목판으로 태자를 벌했다. 그 순간, 복도에 있던 표범이 낮게 포효했다. 표범의 존재를 몰랐던 양 원사는 손을 흠칫 떨며 목판을 떨어뜨렸다.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가동은 표범을 데리고 더 멀찍이 떨어졌고, 양 원사는 그제야 겨우 수업을 이어 나갔다.
이 일이 조금 못마땅했던 황제는 백천범과 상의를 하려 했다.
“어쨌든 점박이는 맹수이니 흉포한 야생성은 고치기 어렵소. 이리 풀어 놓았다간 언젠가 사달이 날 것이오.”
백천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남원에 있을 때부터 저리 길렀어요. 심지어 점박이랑 출궁도 했는걸요.”
“남원은 저런 맹수를 기르는 문화가 있다지만 동월엔 없소. 점박이를 데리고 거리를 활보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얼마나 난장판이 되겠소?”
백천범에게 점박이는 사람과 같은 존재였다. 예전엔 점박이를 안고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우리에 가둔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황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동월은 남원과 상황이 달랐다. 점박이는 온순했지만 종종 짓궂게 굴 때도 있었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에게는 더 심하게 겁을 주었다.
며칠 전에는 한 궁녀가 점박이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허둥대다 호수에 뛰어드는 일도 있었다. 곧장 물에서 건져 올리긴 했지만, 궁녀는 며칠이 지난 뒤에야 제정신을 회복했다.
황제는 그간 품어왔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점박이가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구려. 표범이 남원에서 동월까지 어찌 그 먼 길을 홀로 찾아왔단 말이오, 그것도 정확히 당신 앞에?”
백천범이 똑 부러지게 대꾸했다.
“저도 먼 남원에서 동월로 돌아왔어요. 그것도 정확히 당신을 찾아서요.”
“…….”
그게 서로 같은 이치란 말인가? 어찌 비교할 게 없어서 본인을 표범에 견준단 말인가.
“당신을 죽이러 온 것일까 봐 걱정이에요?”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기른 애니까요. 저 애의 품성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당신이 제 지아비인 걸 알고 있으니 당신에게 못된 짓을 할 리는 절대 없어요.”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황제인 이 몸이 고작 표범 한 마리를 무서워할까 봐? 난 그저 궁에서 키우기엔 불편할 것 같단 말을 하는 것이오. 어제는 호부 상서를 놀라게 했다고 하오. 덕분에 조정에 점박이의 명성이 자자해졌소. 대신들을 남서방으로 부르면 다들 금군 뒤에 숨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단 말이오.”
백천범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은 어수원御獸園(황실 동물원)에 보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그곳에는 다른 호랑이와 표범들도 있으니 궁보다 좋지 않겠소? 분명 점박이도 기뻐할 것이오. 만약 점박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가도 좋소.”
한참 동안 황제에게 설득을 당한 백천범은 결국 표범을 어수원에 보내는 데 동의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태자는 표범을 어수원에 보냈다는 소식에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황제의 어두운 안색 앞에서 곧장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자리를 뜬 뒤에야 묵용린은 백천범에 품에 안겨 애교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점박이는 제 아우예요. 아우를 어떻게 다른 데 보낼 수 있어요? 어수원에 있는 범들은 무섭잖아요. 분명 점박이를 괴롭힐 거예요. 겨우 상처가 아물었는데 또 물리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거긴 점박이가 아는 범들도 없잖아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백천범은 태자의 말에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하지만 또다시 황제에게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망친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우리 린아, 착하지. 점박이가 보고 싶은 거 어머니도 다 알아. 며칠만 참으면 어머니가 어수원에 데려갈게.”
태자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이틀 뒤, 백천범은 약속대로 태자를 데리고 어수원으로 향했다. 어수원 관리는 그녀를 보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백천범이 표점의 상태를 물으니, 관리는 우물쭈물하다 겨우 답했다.
“마, 마마께 아룁니다. 그, 그것이, 조, 좀처럼 먹이를 입에 대지 않습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무엇을 주었는가?”
“다른 범들이 먹는 것처럼 생고기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더 귀한 몸이기에 최상급 소고기로만 주었지요.”
백천범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누가 생고기를 주라 하였는가? 처음 보내졌을 때 익힌 고기를 주라는 말 못 들었는가?”
“…모, 못 들었습니다.”
“어서 안내하게. 내가 직접 가서 봐야겠네.”
관리는 서둘러 길을 안내했다. 맹수 구역에 도착하니 한데 모여 있는 맹수들과 달리 점박이는 홀로 독방을 쓰고 있었다.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바닥에 엎드린 점박이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본 점박이는 곧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 가까이 달려들었다. 우리가 굉음을 내며 흔들리자 관리가 소리쳤다.
“어서, 창을 가져와 마마와 태자 전하를 보호하라.”
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자가 곧장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멍청한 놈! 창은 무슨 창. 과인의 표범 아우를 이리 굶기다니, 네 죄를 물어야겠다!”
태자가 불같이 성을 내자 깜짝 놀란 노비들은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천범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꼴을 만들어 놓다니. 털에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갈비뼈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턱조차 뾰족해 보일 정도였다.
“먹이를 먹지 않는데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단 말인가?”
관리가 허둥대며 말했다.
“소인은 그저 배가 너무 고프면 자연스레 먹이를 먹을 줄 알았습니다. 몇몇 동물들은 어수원에 보내진 뒤,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 며칠간 먹이를 먹지 않기도 합니다.”
백천범은 대충 넘어가려는 듯한 그의 말에 더욱 화가 났다.
“그 며칠 동안 일이 잘못될 수도 있네. 우리를 열게. 내가 다시 데려가야겠으니.”
황후의 말이라면 황제도 무서워하는데, 일개 관리가 어찌 거역하겠는가. 황후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그녀가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우리를 열자 표범은 곧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다들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백천범과 태자는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표범을 끌어안더니 낮게 무어라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곧 표범은 태자의 옷을 물고 자신의 등에 내던지더니, 금세 기운을 차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백천범을 따라갔다.
궁으로 돌아온 백천범은 표범을 두 번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이, 황제가 절충안을 생각해냈다. 어화원 뒤편에 있는 숲에 대나무 울타리를 세운 뒤, 내부에 연못과 석가산, 자그마한 집을 만들어 표범의 보금자리로 삼은 것이다.
* * *
오월 초닷새엔 집마다 쑥을 꽂거나 웅황 가루를 뿌리고 귀신을 그리며 액막이를 했다. 또 한편에선 댓잎 밥을 먹거나 배를 타며 떠들썩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백천범은 소태감들에게 문마다 쑥을 꽂으라고 분부했다. 짙푸른 잎이 걸리니 주황색 문이 더욱 돋보였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제법 어울리며 정취를 자아냈다. 고개를 돌리니 월규가 오색실을 엮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 손이 멈춰 있었다. 그녀는 몰래 다가가 힘껏 월규의 어깨를 쳤다. 월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실타래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돌려 백천범의 모습을 확인한 월규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혼이 쏙 빠져나가는 줄 알았잖아요.”
백천범이 그녀를 놀렸다.
“귀신한테 치여서 이리 화가 나 있는 거야? 다들 명절이라 들떴는데 왜 이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월규는 실타래를 주워 먼지를 털었다.
“날이 더워지니까 조금 갑갑해서요.”
백천범이 말했다.
“저번에 위 태의가 정신을 맑게 하는 향낭을 줬어. 방에 있으니까 하나 가져가.”
“됐습니다. 향낭은 저도 만들 수 있어요.”
“직접 만든 거랑 태의원에서 만든 거랑 같아? 위 태의가 그러는데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방법대로 만든 거래. 몸에 지니고 다니면 정신도 맑아지고 액막이도 할 수 있대.”
월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굼뜬 사람이 무슨 향낭을 만들겠어요.”
“약재는 위 태의가 달이고 향낭은 교 의관이 만든 거야. 예전에 교 미인 있지, 아주 예뻤던 여인 말이야. 위 태의가 교 의관을 칭찬하더라고. 총명하고 이해력이 빠른 인재라나 봐. 조만간 크게 성장할 거라던데.”
월규가 번득이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꽃이 쇠똥에 꽂히겠네.”
아니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상황을 이해한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여쁜 의관이 위 태의 곁을 맴도니 질투가 나나 보네.”
월규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뇨, 질투라니요. 저랑 그자가 무슨 상관이라고요? 그자가 내일 혼사를 올린다고 해도 전 전혀 상관없습니다. 부조를 내면 그만이지요.”
“위 태의가 혼사를 치른다면 울상을 짓고 있을 거면서, 우기긴.”
월규가 발을 굴리더니 자리를 피했다.
“소인은 우기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두고 보셔요.”
그때, 곁채에 있던 기홍이 밖으로 나오더니 백천범을 불렀다.
“마마, 떡이 다 쪄졌으니 와서 붉은 점을 찍어 주셔요.”
백천범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이내 기홍의 배에 손을 올려놓더니 짓궂게 말했다.
“우리 큰조카, 오늘은 어머니 말 잘 들었어?”
기홍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마마도 참, 어머니가 되셨는데도 어찌 장난이 심하십니까. 오히려 태자 전하께서 마마보다 더 진중하십니다.”
“부황 앞에서만 그런 척하는 거예요. 다른 땐 얼마나 개구쟁이인데요. 못 믿겠으면 가동에게 물어봐요.”
기홍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것도 마마의 성격을 닮으셨네요.”
“난 그렇게 앞뒤 다르게 못 하겠던데, 린아는 저보다 더 똑똑한가 봐요. 아마 전생에 원숭이였나.”
녹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아들을 그리 욕보이는 어머니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마마께서 황후이시니 다행이지, 안 그랬음 전하께서 가만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원숭이라니요, 전하께선 용자龍子이신 걸요!”
백천범은 젓가락으로 떡 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그녀의 얼굴에 닿으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 올랐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었다. 뜨거운 떡이 입안에 들어오자 곧 그녀는 뜨거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을 본 기홍과 녹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흘러도 마마의 먹성은 여전하십니다.”
기홍은 백천범의 손에 들려 있는 떡을 가져오더니 입김을 불어 식혀 주었다.
“솥에서 방금 꺼낸 것이라 뜨거우니 천천히 드십시오. 누가 빼앗아 먹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백천범이 겸연쩍게 웃었다.
“갓 쪄냈을 때 맛보고 싶어서 급했네요.”
그녀가 녹하에게 말했다.
“뜨거울 때 자안궁에 좀 가져다주세요. 조금 이따 제가 뵈러 가겠다는 말도 함께 전해 주시고요.”
녹하는 알겠다 대꾸하고는 찬합에 떡을 담기 시작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녹하가 조용히 백천범에게 물었다.
“황상께서는 여전히 태후 마마를 용서치 않으신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