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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13)화 (612/1,192)

제613화

덕비가 이를 꽉 악물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거늘, 어찌 이리 모독한단 말이오!”

“만약 이 귀인을 살해하지 않으셨다면 저 또한 이런 결론을 내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먼저 이 귀인에게 손을 쓰셨습니다.”

“난 아니오. 이 귀인을 죽이지 않았소. 이 귀인은 그저 독약을 먹고 자결한 것이오.”

“살해인지 자결인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어찌 자결이라고 단정 지으십니까?”

그때, 가동이 손뼉을 치며 발을 걷어 올리자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덕비는 그 얼굴을 보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아 있었다니!”

조금 전 죽었다던 이 귀인이었다. 그녀의 안색도 창백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반짝이는 눈망울로 덕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런 악랄한 여인 같으니, 형님으로 모셨더니 날 죽이려 해? 가 대인이 미리 언질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네 손에 죽을 뻔했어.”

이 귀인이 한 발짝 한 발짝 덕비에게 다가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화살은 네가 나한테 준 거잖아. 화살이 많을수록 승산이 있다면서 말이야. 넌 내가 황후를 질투하는 걸 보았지. 그러니 네 말에 따를 줄 알고 날 이용한 거야. 내가 정말 바보였지. 네 말에 그렇게 홀딱 넘어가다니. 난 황후를 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저 조금 망신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황후의 목숨을 앗아 가려던 건 바로 당신이었어!”

점점 뒷걸음치던 덕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간 아주 잘 숨겨왔다고 여겼다. 평소 다툼을 피하고 누구에게나 온화하게 대하며 눈에 띄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어떤 소란을 피우든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방관해 왔다. 양비와 숙비가 목숨을 잃는 것도 지켜보기만 했다. 사비가 삼비가 되고 결국 한 사람만 남자, 후궁 관리도 그녀에게 넘어갔다.

권력을 손에 쥐니 상상보다도 큰 짜릿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좋은 사람을 가장했으나, 속으로는 권력을 장악한 쾌감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녀는 더 많은 게 필요했다. 황상의 사랑은 필요 없었지만, 황상의 자식은 갖고 싶었다. 이 일에 유일한 장애물은 황후였다. 황후를 없애면 황상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올 거라 믿었다. 그리되면 후궁엔 자신 홀로 남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리석고 또 어리석었다. 그녀 또한 양비의 전철을 밟게 되었으니.

결국 여덟 명의 후궁 중 분수를 아는 자들은 제 살길을 찾았고, 심보가 못된 이들은 합당한 결말을 맞았다. 황제는 이 귀인 역시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러나 백천범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는 생명을 중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존귀하며 되돌릴 수 없다고 여기는 그녀였다. 결국 황제는 황후의 뜻을 따라 이 귀인을 비구니로 출가시켰다. 평생 죄를 뉘우치며 참회할 수 있으리라.

결국 후궁은 텅 비고 말았다. 이 일로 충격이 컸던 학평관은 밖에서 월규, 녹하와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든 시간이 흐르면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지. 그건 아무리 숨겨도 숨길 수 없는 것이야. 사실 사람은 그저 생긴 대로 살아야지, 괜히 계략을 쓰지 말고.”

“맞습니다.”

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마마처럼 말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으시잖아요. 얼마나 자유로워요.”

월규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을 흘겼다.

“언니, 우리 마마와 그자들을 무엇 하러 비교해요. 마마는 얼마나 단순한 분인데요. 창자가 꼬일 대로 꼬인 그런 사람들이랑은 비교가 안 되죠.”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눈썰미가 좋은 녹하가 마침 밖으로 나오는 황제를 발견했다.

“이미 다 해결된 일인데 황상께서는 왠지 근심이 더 깊어 보이십니다.”

후궁의 일을 다 해결했으니 황제의 마음을 억누르던 바위가 전부 사라진 게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묘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했다.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묵용린이 표범이 있는 방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랬다, 표범 점박이 일이었다.

처음 그 표범을 만났을 땐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번엔 백천범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제대로 챙겨 주어야 했다. 따로 돌봐 줄 사람을 배치해 살뜰하게 보살피니 표범은 기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그 먼 남원에서 어찌 동월까지 홀로 왔단 말인가?

그의 의문과는 별개로, 표범은 음식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상태가 나아지더니 사나흘 후에는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표범에게 관심이 지대했던 묵용린은 문 앞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이따금 괴성을 지르며 표범의 관심을 사려고 했다.

가동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혹여 사고라도 날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늘 태자의 곁을 지키고 더 많은 호위병을 배치했지만 태자가 표범이 있는 곳으로 가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표범은 늘 초조해 보였지만 백천범만 오면 편안히 바닥에 엎드려 온순한 태도를 보였다.

백천범은 표범의 목을 끌어안고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부러웠던 태자는 문 앞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안으로 뛰어 들어와 맹수를 만지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태자가 나긋하게 백천범을 불렀다. 이제는 애교를 부릴 때만 어머니라고 불렀다. 백천범은 태자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손짓했다.

“들어와서 인사해 보렴.”

태자는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발을 내딛어도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가동이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가동은 태자를 붙잡은 채,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마마, 그리하는 건 좋지 않을 듯합니다. 황상께서 아시면 신을 용서치 않으실 것입니다.”

백천범이 그를 놀리며 말했다.

“이번 일로 그리 큰 공을 세웠는데, 황상께서 책망하실까 두려운 거예요? 괜찮아요. 들여보내 주세요. 제가 잘 지켜볼게요.”

사실 황제는 구실에 불과했고, 가동 본인이 느끼기에 너무 위험한 일이어서였다. 태자는 그의 주인이자 제자였다. 게다가 자신을 양부로 여기기도 했다. 그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자식에게 줄 사랑을 전부 묵용린에게 주었다. 그러니 누구보다 태자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후의 말에 그는 손을 놓았다. 어쨌든 황후는 태자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결국 태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표범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낮게 포효했다. 깜짝 놀란 가동은 곧장 태자를 데리고 뒷걸음질 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백천범이 표범을 다독이며 안심시켰다.

“괜찮아. 내 사람들이야, 착하지.”

그녀가 토닥이자 표범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빛나는 두 눈으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겁이 난 태자는 주춤거리며 표범의 꼬리 앞으로 다가갔다. 가동은 줄곧 태자 뒤를 지켰다.

“물지 않으니까 겁내지 말고 이리 와.”

백천범이 묵용린을 북돋웠다.

“점박이가 린아보다 어리니까 린아가 형이네.”

어른스럽게 보이는 걸 좋아했던 태자는 형이란 말에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니, 얘는 몇 살이에요?”

백천범이 기억을 되짚었다.

“아마 린아보다 한 살 정도 어릴 거야.”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표범 아우가 생겼네요.”

“이리 와서 린아 냄새를 맡게 해 줘. 앞으로 익숙해지면 가깝게 여길 거야.”

태자는 앞으로 조금 다가와 털을 쓰다듬으려 했다. 가동은 순간 가슴을 졸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여 표범을 놀라게 할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곧, 묵용린의 손끝에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았던 태자는 활짝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표범을 만졌어요.”

“우리 린아, 정말 대단하구나!”

백천범은 아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태자는 고개를 돌려 가동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제가 표범을 만졌어요.”

“예, 전하께선 정말 용맹하십니다. 신,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입니다.”

“사부님도 만져 볼래요?”

“…다음에 하겠습니다.”

표범을 만지고 나니 태자는 더 이상 표범이 무섭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표범의 몸에 기대 배를 훑었다. 그러자 표범은 고개를 내밀고 태자의 얼굴을 핥더니 아이의 냄새를 맡았다. 간지럼을 잘 타는 태자는 깔깔거리며 한쪽으로 도망쳤다.

가동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이렇게 빨리 가까워지다니,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 * *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황제와 황후는 함께 마차를 탔고 가동은 말을 몰았다. 다만 가동 곁에 있어야 할 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동은 묘하게 상심한 표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자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표범의 등에 올라탄 채 아는 얼굴과 마주칠 때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장군님.”

“아이고, 전하. 어찌 이리 늠름하십니까! 신은 타라고 해도 못 타겠는데 말입니다.”

“백 장군님, 외숙부.”

“전하, 정말 기상이 넘치십니다. 저희는 말을 타는데 전하께선 표범을 타시다니요.”

“시랑 대인.”

“전하, 정말 멋지십니다!”

“이 대인.”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

태자는 기세등등했다. 부황도 타 본 적 없는 표범을 자신이 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가는 길 내내 힘을 많이 쏟은 탓인지, 결국 부드러운 털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표범은 태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자 봄날의 정취를 더했다. 길에 심어진 커다란 나무에는 푸른 잎이 무성했다. 커다란 몸집의 표범은 어린 태자를 태운 채 천천히 대열 옆을 걷고 있었다. 유리구슬 같은 두 눈은 눈 부신 햇살에 실처럼 가늘어졌다. 꼭 표범이 아니라 커다란 고양이 같았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초여름이 되었다. 눈 부신 햇살과 녹음 속에서 백천범은 즐겁고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사랑하는 아이와 부군, 자매처럼 가까운 시녀들이 늘 곁을 지키니 강남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녀의 의매義妹 여소쌍도 건강을 회복했다. 여소쌍은 궁을 나가고 싶어 했기에 황제는 그녀를 다격군주多格郡主에 봉한다는 조서를 써 주었다. 원래는 그녀가 살 집을 하사하려 했지만, 백천범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여소쌍이 전처럼 홀로 지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생각 끝에 여소쌍을 백장간의 저택으로 보냈다. 비록 성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백천범의 마음이 편해지니 황제도 편안해졌다. 다만 표범 점박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표범은 황제를 눈엣가시로 여기는지 호시탐탐 그를 노렸다. 한번은 그가 백천범을 다정히 껴안으며 친근함을 표했는데, 구석에서 낮은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그를 시도 때도 없이 훔쳐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존귀한 황제가 어찌 이런 수모를 겪을 수 있겠는가?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당장 표범을 끌고 가라고 호통쳤다. 그 사이에서 난처했던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태자에게 점박이를 데려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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