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1화
밤이 깊었지만 황제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백천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는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깊은 눈망울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늘 일이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소행인가? 말 다리에 화살을 쏜 것은 실수인가, 고의인가? 점박이라 불리는 표범은 어떻게 남원에서 동월로 올 수 있었던 걸까. 이렇게 시의적절하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황제가 밖을 나서자 행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동은 호랑이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제를 발견한 가동이 얼른 예를 갖췄다.
“폐하,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그래, 태자는 잠이 들었느냐?”
“네, 사희와 장량長良이 전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가동은 평소와는 다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폐하, 신이 조화의 상처를 보았는데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이는 실수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다만 말이 날뛰며 질주할 정도는 아니니 이상하옵니다.”
황제는 말을 이어서 하라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가 산에 가서 화살을 찾을 수 있도록 명을 내려 주십시오.”
황제는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호각을 불었을 때 돌아오지 않은 자가 누구였느냐?”
“한 장군, 이 위위衛尉, 덕비 그리고 이 귀인 이렇게 네 명이옵니다.”
“내일 날이 밝거든 병사들을 데리고 산에 가거라. 조화가 길을 알 터이니 조화를 타고 가거라. 화살을 찾는 것 외에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짐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네, 알겠습니다.”
가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신이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겠습니다.”
“내일 네가 떠나면 태자의 안위는 누가 책임질 예정이냐?”
“십칠十七입니다. 영구가 직접 가르친 아이로 실력이 뛰어납니다.”
가동이 웃어 보였다.
“다만 영구와 성격이 똑같아 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십칠은 비밀 무사이기에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고 있었다. 영구는 금군 총령일 뿐 아니라 인재를 활용하기 위해 재능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무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황제는 곧바로 눈을 흘겼다.
“너처럼 실실거리면 태자가 좋아하더냐?”
가동은 실실 웃었다. 당연히 좋아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를 양아버지라고 불렀겠는가!
황제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도포를 벗고 침대에 누웠다. 백천범이 잠결에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황제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심란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이튿날, 일찍 눈을 뜬 황제는 바로 품을 살폈다. 백천범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힘들었을 테지. 오밤중에 꿈을 꿨는지 잠꼬대까지 해 댔다. 그는 그녀가 내뱉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백 발을 쏘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리면… 내가 두려워지겠지?”
그는 빙긋이 웃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무사했지만 운이 나빴더라면 일이 크게 틀어졌을 것이다. 그녀를 발견했던 상황을 떠올리면, 극도의 불안감이 그를 휘감곤 했다.
그는 한참 동안 백천범의 옆을 지키다 일어났다. 나가 보니 묵용린이 오고 있었다. 그를 본 태자가 예를 갖추었다.
“소자, 부황을 뵈옵니다.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황제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어디를 가는 길이냐?”
“소자, 모후께 문안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모후는 아직 주무시니 갈 필요 없다.”
“소자가 깨우겠습니다.”
“어제 큰 놈을 잡느라 피로가 남아 있을 터이니 더 자게 두거라.”
묵용린은 알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오늘 아침엔 글공부를 하지 않아 소자는 물러나겠습니다.”
“가 보거라. 모후가 일어나거든 다시 오거라.”
묵용린은 예를 갖춰 물러나더니,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며 나갔다. 아이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첩, 폐하께 문안드리옵니다.”
이곳은 궁과는 달리 궁문이 없어 황제를 보고도 지나치면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었다. 비록 황제가 비빈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지만, 책잡히지 않으려면 비빈들은 문안 인사를 드려야 했다.
“일어나시오.”
덕비가 몸을 일으켜 황제의 방을 쳐다보았다.
“황후 마마께도 문안을 드리고자 하는데, 아직 기침 전이십니까?”
“어제 피곤했을 테니 더 자게 두시오.”
황제는 비빈들을 훑어보더니 덕비에게 물었다.
“어제 무엇을 잡았소?”
덕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첩, 오랜만에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 호각 소리에도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오?”
덕비가 얼버무렸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매다 왔습니다.”
황제가 이번에는 이 귀인을 바라보았다.
“그쪽도 길을 잃었소?”
이 귀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고 여러 발을 쏘았지만 맞히지 못했습니다. 순간 오기가 생겨 쫓아가 잡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이때 학평관이 왔다.
“폐하, 가 대인이 병사들을 데리고 산에 갔습니다. 소인이 대신 보고 드리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자리를 떴다. 이 귀인이 학평관에게 물었다.
“총관리, 가 대인께서 어찌 산에 가시었소? 설마 또 사냥을 가신 것이오?”
“어제 누군가가 황후 마마의 말을 화살로 쐈습니다. 폐하께서 가 대인에게 화살을 주워 오라 하셨지요. 실수든 아니든 황후 마마께서 놀라셨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 죄를 물으시려는 것입니다.”
덕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은 화살이 다 똑같은데 어떻게 찾아낸단 말이오?”
학평관은 몸을 숙이며 웃었다.
“당연히 방법이 있으니 폐하께서 가 대인을 시켜 화살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지요. 네 분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황제를 따라갔다. 네 명의 후궁들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멀어지는 학평관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이 귀인이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이 뭐 있겠어요. 우리가 쏜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황후 마마의 말이 놀라 산으로 뛰어갔다가 공교롭게 호랑이를 만난 것인데요. 설마 누군가 호랑이를 풀었겠어요? 폐하가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아요.”
덕비가 말했다.
“황후 마마를 은애하는 폐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지요.”
이 귀인은 입을 삐죽하며 비꼬듯 말했다.
“우리에게 어제 같은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걸요.”
덕비는 그저 웃었다.
“이 귀인도 참, 입 조심하세요.”
“사실인데 두려울 거 뭐 있나요?”
이 귀인은 눈을 흘기고는 손수건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나머지 두 사람인 재인才人과, 상재常在는 지위가 낮은 터라 입도 벙긋 못했다. 그들은 귀인과 같은 궁전에 머물면서 그녀의 괴롭힘을 받는 처지였다. 제齊 재인이 덕비에게 조심히 물었다.
“형님, 교 형님이 태의원에서 의원으로 있다는 것이 사실이에요?”
덕비가 되물었다.
“어찌 안 것입니까?”
“며칠 전 두통이 도져 소덕자에게 약을 지어오라 했는데, 관모를 쓴 교 형님이 여의관으로 있더래요. 소덕자가 직접 본 일이에요.”
“그래요? 그 사실은 모르고 있었어요.”
옆에 있던 상재도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우리를 다 내보내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나가고 싶어요. 궁에 남아 봤자 좋은 것도 없고요. 교 형님처럼 제 갈 길 찾아서 조정의 녹봉을 받는 것이 훨씬 낫죠. 교 형님은 태의원에 갔으니 저는 어사원禦史院에 가고 싶어요.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았으니, 매일 책을 볼 수 있다면 이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거예요. 제 형님은요?”
제 재인은 얼굴을 붉혔다.
“나갈 수만 있다면 은애하는 낭군을 만나 시집가고 싶네요.”
덕비는 둘의 얘기를 듣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황후 마마를 찾아가 보세요. 마마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겁니다.”
* * *
가동이 산에서 화살을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에 다들 의견이 분분했고 각종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이 귀인은 덕비의 방으로 급히 들어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형님.”
덕비는 고개를 저으며 시종들을 물렸다.
“모두 나가 있거라.”
궁녀들이 다 나가자 덕비는 문을 닫고 이 귀인을 바라보았다. 평온해 보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덕비는 손을 누르며 말했다.
“뭐가 두려운 거예요? 안심하세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 귀인은 한시름 놓으며 우물거렸다.
“형님, 사실 제가…….”
덕비가 손을 저었다.
“아무 말 마세요. 말해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쓸데없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자매처럼 여겨왔는데 설마 이 언니가 아우를 남 취급하겠어요?”
이 귀인은 겨우 웃었다.
“그럼 형님 말만 믿고 이 아우는 마음 놓을게요. 제가 시인하지만 않으면 아무도 절 어쩌지 못할 거예요. 설마 고문이라도 하겠어요?”
“그렇지요. 안심해요. 지금은 위험하니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궁에 돌아가 다시 말하도록 하죠.”
이 귀인은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덕비는 문 앞까지 그녀를 배웅하였다.
“조심히 가요.”
* * *
백천범은 사시巳时(오전9시-11시)까지 자고 일어났다. 눈을 뜨자 황제의 얼굴이 보여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두고 소리 없이 웃었다.
“당신 잠꼬대를 듣고 있던 중이오.”
백천범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당신이나 잠꼬대를 하죠.”
그녀가 입술을 내밀자 황제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바로 입을 맞추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당신이 먼저 시작한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반항했다. 하지만 어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 황제는 그녀를 꽉 안고 뜨겁게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춘 후 그는 백천범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백천범은 이상한 느낌에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세요?”
황제가 긴 숨을 내쉬었다.
“부인, 정말이지 놀랐소.”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돌아온 후, 그녀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던 터였다. 황제에게는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었으리라. 그녀는 황제가 안심할 수 있도록 등을 토닥였다.
“뭐가 겁나요? 운이 좋아서 위험한 순간을 잘 넘겼잖아요. 맞다!”
그녀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점박이는요? 괜찮아요?”
“부상이 심해 상황이 좋지 않소. 하지만 위중청에게 살리지 못하면 의원직에서 물러나라 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보러 가야겠어요.”
백천범이 급히 침대를 내려오려 했지만 황제가 막았다.
“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소?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린 뒤에 보러 갑시다.”
황제의 두 눈은 걱정으로 가득했기에 백천범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익은 소고기를 준비해 주세요. 점박이에게 먹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