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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10)화 (609/1,192)

제610화

시간이 흘렀지만 호랑이는 나무 밑을 맴돌 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어느새 몸이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랑이가 뛰어올랐지만, 간발의 차이로 물지 못했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호랑이는 나무에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이 계속 나무에 부딪히자 나뭇잎이 요란하게 바스락거렸다.

백천범은 이대로 물릴 바에는 뛰어내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내 그녀가 허리에 있던 비수를 꺼내 함성을 지르며 아래로 뛰었다. 호랑이는 그녀의 함성에 놀라 멈추어 섰다. 백천범은 햇빛에 반짝이는 비수를 허공에 두 차례 휘두르며 매섭게 소리쳤다.

“꼭 이래야겠어? 각자 갈 길 가면 좋잖아! 날 잡아먹고 싶겠지만 내 칼도 그리 만만치는 않을 거야!”

호랑이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백천범은 몸을 피하며 비수를 던졌다. 공교롭게도 비수는 빗나갔고, 호랑이의 큰 입이 그녀의 머리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그만 땅에 주저앉았다. 건장한 사내 셋도 당해내지 못하는 맹수를 그녀가 어찌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힘들게 돌아와서 겨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가 싶더니 호랑이 밥이 될 줄이야. 백천범은 제 운명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이런 제기랄!”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그녀를 물려는 찰나, 또 다른 포효가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가르며 호랑이를 덮쳤고 단숨에 목을 물었다. 두 맹수는 관목 덤불 위를 나뒹굴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 틈에 도망치려던 백천범은 눈에 들어온 광경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점박아!”

금색에 검은 반점 무늬가 있는 표범이었다. 날렵한 몸매를 하고 있어 호랑이보다는 몸집이 작았지만,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사납게 호랑이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백천범의 목소리에 표범은 고개를 들었고 호랑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져나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 맹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대치했다.

백천범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눈물을 닦은 그녀는 비수를 주워 허리춤에 다시 차고 땅에 떨어진 화살을 주웠다. 떨리는 손으로 화살 세 촉을 활시위에 놓고 호랑이를 향해 조준했다. 여러 발을 쏠 줄은 몰랐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저 맹수를 맞출 수 있으리라. 그녀는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가 손을 놓을 때 외쳤다.

“점박아!”

둘은 손발이 잘 맞았다. 표범은 몸을 틀어 자리를 옮겼고 호랑이 역시 민첩하게 움직여 피했지만 한 발이 등에 맞았다. 호랑이는 고통에 포효하며 백천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시 표범도 뛰어올라 몸을 아치형으로 만들어 호랑이 앞을 가로막았다. 두 맹수는 또다시 서로를 물며 뒤엉켰다.

짐승이 포효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굵은 나무들도 두 맹수에 의해 부러졌다. 백천범은 옆에서 벌벌 떨면서 이를 지켜봤다. 누가 이길지 모르니 도망가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점박이는 자신의 아이와 같았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간단 말인가? 그녀는 비수를 쥐고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엿보았다. 눈이라도 찌른다면 승산이 있을 터였다.

화살을 맞아 붉게 물든 호랑이의 등은 섬뜩함을 안겨 주었다. 점박이는 점점 지쳐 갔고, 어느새 호랑이 밑에 깔린 채 물어뜯기고 있었다.

백천범은 급한 마음에 비수를 들고 호랑이의 머리를 향해 내달렸다. 호랑이는 재빠르게 피했고 발을 세워 백천범을 눕혔다. 날카로운 이빨이 닿으려는 찰나, 표범이 다시 호랑이의 입을 막아섰다.

점박이는 힘에 겨워 바닥에 쓰러졌고, 결국 백천범과 함께 호랑이 밑에 깔리고 말았다.

백천범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폐가 터질 것 같던 그녀는 힘겹게 손을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박아, 일어나야 해!”

표범은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백천범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비수를 호랑이 배에 꽂았다. 힘을 너무 세게 준 바람에 손까지 같이 들어가 뜨거운 내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호랑이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표범은 피범벅이 되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 틈을 타 호랑이 위로 올라간 백천범이 비수를 휘두르자 호랑이의 배가 갈라지면서 창자가 튀어나왔다.

황제가 왔을 때는 혼비백산할 만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온통 쑥대밭이 된 곳에 호랑이가 피와 내장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숨이 끊어져 가는 표범 한 마리가 옆에 누워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은 엉망이 된 황후가 그 옆에 누운 채였다. 그녀의 온몸도 피범벅이었지만, 다행히 눈을 뜨고 있었다.

“천범!”

황제는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호위 병사들도 바로 뒤를 따랐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표범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병사가 표범에게 활을 쏘려고 하자 백천범이 기다시피 달려가 표범 위를 막아섰다. 그리고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쏘지 마!”

황제는 이를 보고 바로 손을 들었다. 모두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백천범을 품에 안고 울먹이며 말했다.

“천범, 잘했소. 내 부인!”

백천범은 중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탈진한 상태였다. 황제의 품에 무너진 그녀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점박이가, 구해 줬어요. 당신이… 꼭 살려 놓아야 해요.”

“알겠소. 말하지 말고 나머지 일은 나에게 맡기시오.”

그는 나뭇가지와 줄기로 들 것을 만들어 표범을 들고 내려왔다. 호랑이는 내장을 걷어 내고 나뭇가지로 말에 묶어서 내려왔다. 호랑이는 황후의 전리품이 되었다. 이번 사냥에서 황후보다 대단한 사람은 없으리라. 이렇게 사나운 맹수를 사냥했으니.

황제는 백천범에게 물을 먹이고 자신의 품에서 쉬게 하였다. 한 손으로는 그녀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잡아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행궁에서 대기하던 위중청은 소식을 듣고 처치할 준비를 마쳤다. 황후가 도착하면 정성을 다해 치료에 임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는 시종들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분부한 뒤, 곧장 황후를 방으로 데려가 직접 상처를 살폈다. 피로 범벅이 된 옷을 벗길 때 황제는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자세히 보니 혈흔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어 가까스로 마음을 놓았다. 그는 상처를 피해 가며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닦아 주었다. 그녀가 새털만큼이라도 아파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또 졸였다.

백천범은 눈을 감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기력이 다 빠진 그녀는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황제는 그녀를 깨끗이 닦아 주었고 옷도 갈아입혀 주었다. 이윽고 그가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정말 다 컸다. 맹수와 싸울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다른 이였다면 호랑이를 보고 기절했을 테지만,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표범을 지키기 위해 호랑이를 무찔렀다.

표범이 구해 주었다고 했지만 호랑이 배를 보니 그녀가 비수로 그은 흔적이 선명했다. 그녀의 용감함에 황제는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혔다.

위중청은 뒤늦게 황제가 황후를 방에 데리고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치료 도구를 챙겨 방에 가보려고 했지만, 호위 병사 몇 명이 표범을 들고 들어왔다.

“위 의정님, 폐하께서 표범을 치료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표범을 보고 놀란 위중청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수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치료를 합니까?”

“의정님, 폐하의 명입니다.”

조금은 도도한 성격인 위중청은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저는 사람만 치료합니다. 폐하가 오셔도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때, 가동이 문발을 걷고 들어왔다.

“위 태의, 이 표범은 황후 마마를 구한 생명의 은인입니다. 치료하지 않았다가 죽기라도 하면 마마께서 상심이 크시겠지요. 그럼 폐하께서 태의를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서 고생하실 필요 뭐 있습니까? 게다가 의원님께서는 예전에 토끼를 치료하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

위중청은 이 표범이 황후를 구했다는 말에 태도를 바로 바꾸었지만, 고상함은 유지해야 했다.

“마마를 구했다니 당연히 치료를 해야지요. 이는 폐하가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자, 제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눕혀 주세요.”

병사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표범을 탁자에 올렸다. 위중청은 여전히 두려워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표범이 미동도 하지 않음을 깨달은 그가 병사들에게 당부했다.

“상처를 치료할 때 표범이 아파할 수 있으니 옆에서 표범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소란을 피우기라도 하면 수습이 어려워져요.”

가동은 그가 우스울 뿐이었다.

“위 태의, 지금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 뭐가 그리 무섭습니까?”

위중청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아파서 움직이면 치료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말하면서 손으로 상처 주변을 눌렀다. 역시나 표범이 이빨을 드러내자 그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위중청은 표범에게 호통을 치며 허세를 부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별것도 아닌 것에 왜 이러는 것이냐?”

그는 병사에게 상처를 깨끗이 닦으라고 지시하고 옆에서 약을 만들었다. 혈흔이 다 지워지니 상처가 드러났고, 맹수 간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 주었다. 상처는 깊어도 너무 깊었다. 등의 살점은 군데군데 뜯겨 나갔고, 목에는 뼈가 보일 정도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빠르게 지혈약을 뿌리고 상처 부위를 동여맸다. 상처가 심해,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가동은 위중청이 표범을 무서워하지 않는 걸 보고 밖으로 나갔다. 태자를 돌봐야 하니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불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태자를 찾는데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고 있었다. 죽은 호랑이를 보며 왈가왈부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가 보니 태자 묵용린이 잔뜩 흥분해서 호랑이 주변을 돌고 있었다. 손에는 막대기가 들려 있었고 이따금 호랑이를 찔러 보기도 했다.

가동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도 담이 컸지만 아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었다. 맹수를 보고 울지도 않고 막대기로 찔러 보다니, 정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묵용린은 가동을 보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사부님, 모후가 잡아 온 것이에요.”

가동은 바로 백천범을 치켜세웠다.

“마마께선 정말 용맹하시지요. 천하에 둘도 없는 여장부이십니다!”

태자는 웃으며 물었다.

“사부님, 전에 했던 말씀 아직도 지킬 수 있어요?”

“무슨 말이요?”

“이번 사냥에서 사부님이 일등을 해서 금궁金弓을 상으로 받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당연하죠.”

가동은 이번 사냥 때 태자 앞에서 체면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태자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지 않으면 스승의 위엄이 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묵용린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호랑이를 가리켰다.

“이것보다 더 큰 사냥감을 잡을 수 있어요?”

가동은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태자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호랑이는 금수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더 큰 사냥감이 있겠는가? 태자는 그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자 크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더 큰 사냥감이 힘들면 비슷한 거라도 괜찮아요.”

사방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나는 너의 스승이다. 너의 스승이라고! 스승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제자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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