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9화
동월국은 봄, 가을 사냥이 있지만 매년 한 번만 개최했다. 봄에 사냥을 나가면 가을에는 쉬고 가을에 나가면 봄에 쉬는 식이었다. 봄에는 풍경을 보기 위해 사냥을 하고, 가을에는 살집이 좋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나갔다.
사월 말이 되자 가동이 수행 총령으로서 호위 부대를 이끌고 황제와 황후, 비빈들을 황가 사냥터로 호송하였다. 황제는 마차에 앉아 부드러운 베개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차가 흔들리면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와 달리 처음 사냥을 나온 백천범은 알 수 없는 흥분감에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동과 함께 말을 타고 가는 묵용린을 보자 그녀는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묵용린도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묵용린도 마차를 탔어야 했지만 그는 엄숙한 얼굴로 거절했다. 사내는 사내답게 말을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태자가 사부와 함께 말을 탈 수 있게 윤허했고 자신은 마차에 탔다. 방해꾼은 없는 것이 나았다.
황제는 백천범이 제 곁으로 오지 않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내 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뭐 볼 게 있다고, 부군을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소?”
백천범은 그의 볼을 꼬집었다.
“매일 보는 얼굴이 뭐가 좋다고요. 보면 미운 정만 들죠.”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어찌 그리 말하시오? 우리가 어떻게 미운 정이 들 수 있소?”
그는 턱을 들어 올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말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평생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목을 감싸고 열렬히 입을 맞췄다. 참으로 이상했다. 이렇게 익숙한데 그와 입을 맞추면 그녀의 심장은 달음질치듯 마구 뛰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여 계속 이렇게 붙어 있길 바랐다. 궁문을 나서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종묘사직이며 규율, 신분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이곳엔 오직 그와 그녀만이 존재했으니. 둘은 서로를 안고 상대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황가 사냥터는 임안성 교외 지역으로, 궁에서 말을 타고 서두른다면 두 시진도 걸리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황제의 행차를 대규모 의장대가 수행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유지해야 하니 행진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사냥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사냥터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행궁은 깨끗이 정리되어 황제 일행이 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행궁은 반원 모양의 아치형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정중앙에 금으로 벽을 치장한 화려한 방에 묵고, 그 옆에 남색으로 장식된 방은 태자 묵용린이 묵었다. 오른편으로 줄지어 있는 방은 비빈들이, 왼편 방들은 장군 대신들이 사용하였다.
이튿날이 되자 다들 생기가 넘쳤다. 숲에 가서 솜씨를 보여 주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백천범은 붉은색 기마복을 입었다. 가슴 앞 구리 단추가 햇빛에 반짝였다. 아주 늠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조화棗花라고 불리는 검붉은 색 암말을 탔다. 황제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온순한 말이었다.
태자 역시 기마복을 입었지만 두봉을 포기하지 못한 채였다. 혼자서 말을 타지 못할 만큼 어린아이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성인 남자 못지않았다. 태자 뒤에는 사부인 가동이 앉아 있었다.
무인 출신인 황제는 금색 기마복을 입어 용맹함이 도드라져 보였다. 백천범은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고 자신의 지아비보다 멋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앞을 보고 있었지만 백천범의 눈빛을 느낀 황제는 등을 더 꼿꼿이 세웠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백천범은 기마복으로 갈아입은 덕비와 이 귀인을 발견했다. 한 명은 남색, 한 명은 보라색 기마복을 입었다. 평소에는 여려 보이기만 했는데 지금은 기개가 하늘을 찔러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냥을 시작하게 된다. 사냥감을 누가 더 많이 잡는지 겨루는 것이다. 백천범이 빨리 사냥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자, 자연스레 황제는 걱정이 앞섰다.
“아무 곳이나 가지 말고 날 잘 따라오시오. 숲이 아주 크고 뒤에는 다 높은 산들뿐이니 길을 잃으면 안 되오.”
백천범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제가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 먼 남원에서도 찾아왔는데 이 작은 사냥터에서 길을 잃을까 봐요? 당신 부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에요?”
황제도 백천범이 길눈이 밝은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숲 속에는 온순한 동물밖에 없으니 그리 위험하진 않을 터였다. 그저 소중할수록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니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게 됐다.
백천범은 새총을 아주 잘 쐈다. 그녀는 이번 사냥을 위해 태자와 함께 가동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웠고, 특별히 그녀만을 위한 화살이 제작되었다. 홍초로 깃털을 붉게 물들여 황후의 유일무이한 고귀함을 드러냈다.
드디어 호각 소리가 울리자 모두 환호하며 말을 몰았다. 땅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황제는 계속 백천범을 지켜보았지만, 달리다 보니 어느새 사냥감을 쫓기 시작했다. 울창한 숲에서 다들 빠르게 흩어졌고 곳곳에서 활 쏘는 소리만 들렸다.
백천범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두산에 잡혀갔을 때 우가 삼촌들과 꿩을 잡으러 간 적은 있지만, 그때는 구경만 했기에 진정한 사냥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완벽히 무장하고 진짜 사냥에 나섰으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주고 싶었다.
사슴을 잡으면 묵용감이 놀랄 테고, 묵용린에게도 멋진 어머니로 기억되리라. 숲을 내달리면서 토끼를 발견한 그녀는 화살을 쏘려고 했지만 활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토끼는 도망가 버렸다. 그녀는 고삐를 다잡고 쫓아갔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면 이 얼마나 체면을 구기는 일인가?
달리다 보니 누군가가 화살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몰랐는데, 별안간 말이 날뛰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말은 여기저기 발길질을 하며 뛰어다녔고, 그럴수록 백천범은 말 등에 바짝 엎드려 말의 배를 잡았다. 말은 여러 차례 그녀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녀는 말에 달라붙은 채 힘을 풀지 않았다.
산세가 가파른 것을 보니 숲에서 벗어나 산을 향해 가는 듯했다. 사냥터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을 버릴 수는 없었다. 숲은 산맥을 따라 이어져 수십 리에 달했기에 걸어간다면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조화는 힘든 기색이 역력해 보였고 점차 속도를 늦추다 멈추었다. 그제야 백천범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렸다. 화살이 꽂힌 말 다리를 보자 말이 날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의든 아니든 이 화살로 인해 그녀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준비성이 철저했던 백천범은 상처에 바를 수 있는 고약을 챙겨왔고 말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다. 화살을 뽑지 않으면 말이 달릴수록 고통스러워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녀가 말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조화에게 부드러운 어투로 한참을 설명하였고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말에게 다가가 얼굴을 부볐다.
“착하지, 내가 화살을 뽑아 줄게. 아파도 참아야 해.”
조화가 경계심을 풀고 있을 때 순식간에 화살을 뽑았다. 말은 고통에 발을 들었고 백천범은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뽑았으니 안 아플 거야. 약을 바르면 나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가 말의 머리를 안고 계속 위로하자 말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은 쉬웠다. 약을 발라 지혈하고 치마를 찢어 상처를 동여맸다. 치료를 마친 백천범은 숨을 크게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면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가자.”
그녀는 조화의 머리를 토닥였다.
“우리 지금 낙오돼서 어서 돌아가야 해.”
백천범은 조화를 끌고 산 아래로 향했다. 조화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온순하게 그녀를 따랐다.
아래로 내려가니 길이 없었다. 말이 이런 곳까지 어떻게 도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나마 공간이 있는 쪽으로 가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말도 놀라 말발굽으로 땅을 파며 거친 숨을 내쉬었고, 목을 들어 고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백천범은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시작임을 깨달았다.
집채만 한 대호가 그녀의 길을 막고 있었다. 방울처럼 큰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던 호랑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백천범은 조심히 뒤로 물러나 조화에게 속삭였다.
“내가 놓아줄 테니 너는 최대한 빨리 가서 날 구해 줄 사람을 데리고 와. 내가 방금 널 구해 줬으니 이제 은혜를 갚아야지.”
그녀는 고삐를 풀며 외쳤다.
“어서 가!”
말은 몸을 돌려 내달렸다. 호랑이는 멀어져 가는 말을 바라만 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매서운 시선이 백천범에게 꽂혔다.
맹수를 기른 적이 있는 백천범은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대치 상태는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호랑이도 인내심이 대단했지만 백천범도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등을 꼿꼿이 세우려고 노력했다. 절대로 겁먹은 모습을 내비쳐서는 안 됐다.
짐승은 대부분 약육강식에 따르니,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피해가기 마련이다. 그녀는 호랑이가 자신의 기에 눌리기를 바랐지만, 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호랑이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등에 손을 뻗어 화살을 꺼낸 뒤 빠르게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 한 발로 이렇게 큰 맹수를 쓰러뜨리기란 역부족이었다. 덩치가 큰 짐승을 잡기 위해서는 여러 발을 연달아 쏴야 했지만 그녀는 아직 실력이 부족했다. 활시위가 당겨지자 호랑이는 두려운 듯 걸음을 멈추었다. 백천범이 매섭게 소리쳤다.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쏠 거야. 알겠어? 앞으로 더 오면 쏠 거야!”
잠시 발걸음을 멈춘 호랑이는 다시 앞으로 다가왔다. 백천범은 앞뒤 잴 것 없이 화살을 힘껏 당겨 활을 쐈다. 그러나 호랑이는 민첩하게 몸을 틀어 화살을 피했다.
백천범은 급히 화살을 쐈지만 호랑이는 가뿐히 화살을 피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백천범은 화살이 명중했는지 보지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조금 전 둘러봤을 때 주위가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봐둔 터라, 나무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녀가 나무에 오르는데, 매섭게 질주하던 호랑이가 어느새 나무 밑에 다다라 그녀의 발을 물려고 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백천범의 심장은 튀어나올 듯했다. 그러나 당황하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더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나무가 너무 올곧게 자라 있어 빠르게 올라가기 쉽지 않았다.
신발을 있는 힘껏 벗어 던지고 발바닥과 발등의 마찰력으로 조금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친 나무 껍질은 금세 그녀의 양말을 해지게 만들었다. 발등이 벗겨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녀는 조화가 사람을 데려와 자신을 구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