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08)화 (607/1,192)

제608화

이어서 백천범은 영구의 표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영 대인이 왜 저를 그런 표정으로 본 것이죠?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소. 지레짐작하지 마시오. 당신 뜻대로 모황이 물러나고 남제화가 뒤를 잇도록 하였소.”

백천범은 남류청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죽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녀는 대답만 간단히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침묵이 가장 두려웠던 황제는 곧장 그녀의 배를 매만졌다.

“아직 조용한 것을 보니 짐이 더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오?”

백천범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치웠다.

“어떻게 그리 빨리 생길 수가 있겠어요.”

“기홍은 이미 배가 산만 해졌는데 당신은 깜깜무소식이구려. 짐이 영구에게 뒤처져서는 안 될 일이지.”

“이미 늦었잖아요.”

“아니오. 영구는 첫째이지만 우리 린아는 올해 벌써 네 살이오. 지금 시급한 것은 빨리 둘째를 만드는 것이오.”

여럿 낳으면 그녀도 궁을 나간다는 말을 못 할 것이다. 백천범은 그의 표현이 저속하게 들려 흘겨보았다.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나요? 부모자식 간에도 인연이 있어야지요.”

황제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인연이 닿아야지. 한데, 아버지가 된다고 영구의 태도가 확 바뀌었소. 어제는 통현通縣에 다녀오라고 분부했는데, 이삼일이면 되는 거리인데도 명을 거역하는 게 아니겠소? 기홍이 배가 불러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오.

짐의 명을 한 번도 거역한 적 없는데,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고 이리 달라지다니. 아무리 단단한 이라 하여도 부드러운 면은 있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소.”

백천범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지금 자화자찬하는 거예요?”

황제는 그녀를 간지럽히며 행복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웃기는, 짐은 평생 당신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 * *

며칠 뒤, 황제가 조정에 나가 있는 동안 현비는 백천범에게 궁녀를 보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백천범은 혹여 다른 변화가 생겼나 싶어 현비를 찾아갔다. 그녀가 궁에 들어서니 현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후궁은 승덕전에 가면 안 된다는 황제의 명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마마를 여기까지 행차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니…….”

“괜찮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백천범은 현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옆에서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인, 마마를 뵙사옵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지위가 낮은 네 명의 후궁 중 한 명이었다. 낮은 지위 때문에 자신을 ‘소인’이라 칭하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백천범은 그녀를 일으키며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 곱게 생긴 얼굴이었다. 현비가 옆에서 그녀를 대신 소개하였다.

“교 미인입니다. 교 미인이 마마께 부탁할 일이 있다 하여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입니다.”

평소 교 미인과 사이가 좋았던 현비는 출궁 계획을 그녀에게 말했고, 교 미인 역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부탁을 하고 싶어 했다. 백천범은 비빈들이 궁을 나가길 바랐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이렇게 아리따운 여인은 더더욱 거절할 리가. 그녀는 둘에게 앉으라고 한 다음 웃으며 교 미인을 바라보았다.

“말해 보세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폐하께 말씀드릴게요.”

교 미인은 황후가 이렇게 흥미로워할 줄 몰랐다. 역시나 현비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마마, 소인 마음에 둔 이는 없습니다.”

백천범은 당황스러웠다.

“없으면…….”

교 미인이 황급히 해명했다.

“마마, 소인은 어렸을 때부터 약초에 관심이 많아 의술로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요. 부모님은 제가 의관이 되는 대신 가문을 빛내 주길 바라셨습니다. 작년 간택 때 저를 강제로 궁에 보냈는데, 정말 간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궁에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저를 내보내 주신다면 마마야말로 저의 부모와 같으신 분이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백천범은 생각에 잠겼다.

“태의원에도 여의관 자리가 있다고 하던데, 정말 하고 싶다면 위중청 대인에게 말해 볼게요.”

교 미인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마마님은 저의 부모와도 같아…….”

백천범은 그녀를 다시 일으켰다.

“부모라니요. 그래봤자 교 미인보다 고작 몇 살 정도 많을 텐데. 절 너무 나이 든 사람처럼 여기지 말아요.”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늙는 것은 무서운 법이었다. 그렇게나 높아 보이던 황후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사실에 교 미인과 현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가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니, 모두의 마음이 편했다.

백천범이 물었다.

“언제 출궁하고 싶어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교 미인은 기대로 가득 찼다. 모두 그녀가 높이 날아올라 봉황이 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아무도 그녀의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 궁에서 시간을 낭비해야 함은 물론이고 지위가 낮아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후궁이 많지 않았지만 세 명이 모이면 소문 하나쯤은 간단히 만들어졌다. 그런 연극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현비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싶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얼굴만 믿고 도도하게 군다는 험담을 했다. 무고하게 뒤통수를 맞으니 그녀도 궁 밖의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빠르면 좋다는 교 미인의 말에 황제는 기뻐하며 칭찬했다.

“알아서 걱정을 덜어주는군. 의관이 되고자 하니 짐이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 주겠소.”

이로써 교 미인은 현비보다 일찍 출궁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황제와 황후의 평안을 위해 보영암菩寧庵에 가서 수행을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죽은 언니의 신분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교 가문의 여식으로 태의원 의관이 된 것이다.

태의원은 들어가는 것부터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여성 의관은 무척 보기 드문 존재였다. 교씨 집안은 녹봉을 받는 여의관이 나오자 가문을 빛내는 일이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부친보다 여식이 더 높이 올라갈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여식을 궁에 보내는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부귀영화는 차치하고서라도 다시 만나는 일도 어려운데, 어느 부모가 혈육과 생이별을 하고 싶겠는가? 지금의 상황이 교씨 가문에는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서북에서 임안성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 현비의 일을 처리하기엔 시일이 꽤 걸릴 터였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 것일까, 황금을 이송하는 부대가 서북에서 출발했는데, 그중 양영호가 배치되어 있었다. 황제는 그를 남서방으로 직접 불러 반 시진가량 밀담을 나눴다.

밖으로 나왔을 때, 양영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나 감읍했는지 문을 바라보며 세 번 절을 하였다. 학평관은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소화궁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소화궁에서 나왔을 때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기쁨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현비는 갑작스레 병사했다는 명목으로 본가에서 데려갔고, 기쁜 마음으로 신부가 되었다. 단기간에 비빈 둘이 나갔으니 남은 이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가 돌아온 후 여덟 명의 비빈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분명 누군가의 소행이었다. 눈에 거슬려 내보내는 것이라면 무사히 나가면 좋지만 어디로 보내지는지 모르기에 불안할 따름이었다.

이 귀인은 품계가 높았지만 참을성이 제일 없었다. 방 안을 서성이던 이 귀인은 견디다 못해 덕비를 찾아갔다.

덕비는 사비 중 마지막으로 남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평소 눈에 잘 띄지 않아 이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사비 중 혼자 남아 있었기에 후궁을 관리하게 되었다. 어느 궁에서 궁녀와 환관이 필요한지, 누가 생일인지, 아픈 사람은 없는지부터 매월 지급하는 녹봉과 각종 물품까지 모두 그녀의 관리가 되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인 만큼 그녀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잘못하여 책잡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귀인이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마침 향의 구매 계획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귀인을 발견한 그녀가 급히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마침 잘 왔어요. 혹시 진 재인才人은 어떤 향을 좋아했는지 기억하나요?”

이 귀인은 덕비를 늘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덕비의 지위가 더 높긴 했어도 공경하는 마음은 거의 없었다. 이 귀인이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진 재인이 무슨 향을 좋아하는지 뭘 그리 신경 쓰십니까. 고를 필요 있나요, 주는 대로 쓰는 거죠.”

덕비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사람 좋은 모습으로 웃었다.

“이제 몇 없는데 서로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죠.”

이 귀인이 그제야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나갈지 모르겠네요. 현비는 죽고 교 미인은 출가했다는데… 정말일까요? 제가 총명하지는 않아도 쉽게 속아 넘어가지는 않지요.”

덕비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모습에 이 귀인은 짜증이 났다.

“형님, 사비 중 형님 혼자 남았는데 자신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셔야지요. 일이 일어난 후에는 늦어요.”

“궁에 갇혀 있는 것이 뭐가 좋다고요. 정말 바깥 공기 좀 마시고 싶네요. 폐하께서 봄 사냥을 나가신다는데 우리를 데리고 갈까요?”

이 귀인은 입을 삐죽거렸다.

“황상 눈에 저희가 보이겠어요? 황후야말로 황상의 보물이죠.”

덕비가 이 귀인을 놀리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가 서로 은애하는 게 질투가 나나 봐요?”

“제가 그럴 자격이라도 있나요? 다 형님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지요. 황후가 너그러운 분이라 말이 잘 통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질투가 너무 심해요. 우리를 한 명씩 내보내는 것 봐 봐요.”

“폐하의 뜻일 수도 있지요.”

“황후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폐하가 이렇게까지 했겠어요?”

덕비는 화제를 돌렸다.

“어렸을 때 오라버니를 따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배웠는데, 봄 사냥에 같이 갈 수 있으면 시원하게 말을 타고 달리고 싶네요. 얼마나 좋을까요.”

“형님은 진짜 가고 싶은 거예요?”

“그럼요.”

덕비는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쩌면 안 돌아올 수도 있죠. 폐하께서는 찾지도 않으실 거예요. 그럼 궁에는 또 한 명의 비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이 귀인은 생각에 잠겼다.

“형님이 정말 가고 싶어 하면 이 아우가 방법을 궁리해 볼게요.”

“어떻게요?”

“그건 관여치 마세요.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해 볼게요.”

이 귀인이 생각한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는 황후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꽃이 만발한 어화원에서 꽃을 꺾어 꽃병에 꽂아 놓는 등 매일 어화원을 배회하였다. 승덕전에는 못 가도 황후를 우연히 만나는 것쯤은 가능했다.

황후가 말을 붙이기 쉬운 성격임을 잘 아는 그녀의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결국 황후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안부를 물으며 궁 밖을 동경하는 척했다.

황후는 역시 걸려들었다. 그녀에게 봄 사냥에 함께 가서 답답함을 풀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귀인은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일단은 거절했다.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리란 핑계를 대었지만, 황후는 오히려 저를 믿으라고 말했다. 이 귀인은 일이 성사됐음을 느꼈다.

사냥 갈 시일이 다가오자 승덕전의 총관리가 직접 덕비에게 황제의 뜻을 알렸다. 이번 봄 사냥에 모든 후궁들을 데리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모두들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궁에 갇혀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바람이라도 쐴 수 있으면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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