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7화
오해가 풀리고 둘은 평소처럼 다정한 부부 사이로 돌아왔다. 다만 백천범은 여전히 불안했다. 묵용감이 후궁들을 내보낸다고 하였으니 곧 행동에 옮길지도 모른다. 저번 일로 대신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았기 때문에 묵용감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만 숨기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백천범 역시 비빈들의 존재를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박힌 가시는 어찌한단 말인가? 후궁과 관련된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너그러운 그녀였지만 감정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황제의 곁에 다른 여인이 있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비록 명분상의 비빈이라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만 그녀는 내보내더라도 그녀들의 행복을 바랐다.
이 일만큼은 묵용감이 나서지 않았으면 했다. 황제는 여자들에게 매정하니, 그녀가 나서면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늘 묵용감의 뒤에 숨어서 피하고만 싶지 않았다. 묵용감은 언제나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지만, 그녀는 여린 꽃이 아니었다. 그래, 그녀가 직면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승덕전에 온 후 후궁에 가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후궁에 간다는 말을 하자 월규는 놀라 창백해졌다. 황제가 힘껏 차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또 한 번 걷어차였다가는 목숨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백천범을 말릴 수 있는 이가 어디 있을까. 결국 월규는 학평관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묵묵히 백천범을 따라 후궁으로 향했다.
백천범의 발길은 현비가 머무는 소화궁에 닿았다. 황후가 왔다는 말에 소화궁은 한바탕 전쟁이 치러졌다. 현비가 급히 나와 무릎을 꿇었다.
“황후 마마께서 오시는 줄 모르고 바로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첩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백천범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웃었다.
“예를 갖출 필요 없어요. 현비가 이러면 제가 더 어색해져요”
현비는 황후가 어떤 사람인지 줄곧 궁금했다. 황제의 혼례 날 무양 공주를 두 번 보았지만 그때는 차디찬 표정만을 내보이지 않았던가.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아진 후, 자안궁에서 본 그녀는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애정으로 가득하여, 황제가 그녀를 보물처럼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천범도 유일하게 황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다던 소문 속의 현비가 궁금했다. 백천범의 시선이 그녀를 빠르게 훑었다. 동그란 얼굴에 단정한 용모를 지녔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눌해 보였고, 묘하게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어찌 이런 이가 황제의 눈에 띄었단 말인가? 그녀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 내던 현비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백천범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날도 좋고 하여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온 김에 찾아와 봤어요.”
현비는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첩이 마마께 문안드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마마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폐하의 명이 있어…….”
현비가 황제를 언급하자 백천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현비가 보기에 황제는 어떤 분 같아요?”
현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어떤 것 같다니요?”
누구든 뒤에서 황제를 논하면 목숨이 날아가건만… 어찌하여 황후는 황제를 논하려 한단 말인가?
현비는 우물쭈물하다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폐하께서는 정이 많으신 분 같아요.”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솔직한 현비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소첩이 폐하를 몇 번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폐하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였습니다. 하지만 방금 마마의 오른쪽 귓불을 보니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백천범은 자신의 오른쪽 귓불을 만지며 의아해했다.
“내 오른쪽 귓불이 왜요?”
현비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귀를 보여주었다.
“마마의 오른쪽 귓불에 점이 있습니다. 저도 있지요. 이 때문에 폐하께서는 저를 사비로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모두들 황후 마마에 대한 폐하의 정이 깊다고 하였지만 후궁 간택일 날 밤 폐하께서는 소첩의 패를 뒤집으셨지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승덕전에 가 보니 폐하께서는 저를 옆에 세워 두셨다가 곧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튿날 소첩에게 하사품을 내리셨지요.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남서방으로 소첩을 부르셨을 때도 옆모습만, 그것도 오른쪽 모습만 보이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심해 보아도 폐하께서 그리하신 연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자안궁에 오셨을 때, 처음으로 폐하께서 웃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지요. 소첩은 이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방금 용기를 내어 마마의 오른쪽 귓불을 보았습니다. 역시나 답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백천범은 들을수록 마음이 헝클어지는 듯했다. 정말 바보 같았다. 점 하나에 그리운 마음을 풀려 하다니.
“같이 있을 때 폐하께서 아무 말 하지 않던가요?”
“거의 말씀을 안 하시다가 소첩이 배탈이 났을 때 입을 여셨어요.”
“뭐라고 했나요?”
“제 앉는 자세가 틀렸다고 하셨어요.”
백천범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바보 같지 않나요?”
“마마를 향한 폐하의 일편단심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지요. 바보 같지 않습니다. 소첩이 폐하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죠.”
“저를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진 않나요?”
현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폐하를 이해해요. 누구든 감정만큼은 통제할 수 없죠.”
백천범은 뜻밖의 답이 돌아오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하를 좋아하나요?”
현비는 깜짝 놀랐다. 황제가 누구를 은애하든 후궁은 모두 황제를 연모해야 했다. 당연하게 여겨졌기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비는 그를 은애하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기엔 주변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녀가 한참 주저하고 있는데 백천범이 재차 물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궁에서 내보내면 나갈 거예요?”
현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에요? 궁을 나갈 수 있어요?”
평소에는 반응이 느린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마, 소첩은 폐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이가 따로 있어요.”
백천범은 그녀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현비가 좋아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현비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어서 말해 보아요.”
현비는 쑥스러웠지만 궁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다 말할 수 있었다. 눈앞의 황후는 한 번도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묘하게 신뢰를 주었다.
“소첩은 북쪽 운용雲龍에서 살았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던 청매죽마가 있었습니다. 그 애의 부친과 소첩의 부친은 조정에서 함께 일하시면서 사이가 아주 좋았지요. 간택만 아니었으면 그 애가 제 정혼자가 되었을 거예요. 그는…….”
현비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께서 절 궁에 보낸 것에 화가 나 서북 군영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누구인지 이름을 알려 줘요. 내가 알아볼게요. 장가를 들지 않았다면 폐하께 말해서 혼사를 주관하라고 할게요. 어때요?”
현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마, 정말 그래도 되나요?”
“왜 안 돼요?”
백천범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사실 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당신도 행복하고 나도 근심을 덜고요,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저는 봉호를 받은 몸입니다. 궁에서 나간다면, 집에서도 절 다시 받아 줄지 모르겠어요. 부친께서는… 저를 통해 더 높이 오르고자 하셨으니까요.”
“당신의 행복은 나 몰라라 하고요?”
현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천한 가문 출신인 제가 폐하의 눈에 들어 사비에 올랐으니, 가문의 영광이지요.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다들 번지르르한 겉모습만 보지 제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는답니다. 이대로 쓸쓸하게 사느니 궁에서 나가 신분을 숨기고 제 삶을 살고 싶어요.”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남류청이 떠올라 탄식이 나왔다. 본인의 눈에만 좋은 것들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부모도 있었다. 그녀는 자식의 행복을 고려해 본 적이 있을까?
“집안사람들 신경 쓸 것 없어요. 당신만 원한다면 내가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알려 줄게요.”
약간 흥분한 현비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이름은 양영호楊榮皓예요. 오영 순포에 있다가 작년에 서북 군영으로 갔어요. 구체적으로 어디로 갔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서북군은 이 장군 지휘 아래 있으니 이 장군에게 찾아보라고 하면 돼요. 그나저나 출궁에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현비는 방 안에 둘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마마, 출궁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부고를 내고 나가거나 수행을 위해 나갈 수 있다고 들은 적 있어요.”
백천범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부고는 무엇이고 수행은 무엇이에요?”
“부고는 간단합니다. 폐하께서 윤허만 하시면 병사하였다고 속이고 출궁하는 것이지요. 궁 밖에서 신분을 바꾸고 살면 됩니다. 수행은 암자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폐하의 평안을 빌지요. 이 역시 수행을 명분으로 나가 신분을 바꾸고 살면 됩니다.”
백천범은 그녀를 보았다.
“아는 것이 많은 걸 보니 일찍부터 준비한 것이에요?”
현비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다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여기지만, 전 다른 비빈들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어요. 마마께서 돌아오시자 후궁은 유명무실해졌지요. 폐하와 마마의 골칫거리가 될 바에는 출궁하는 일이 서로에게 좋다고 여겼어요. 궁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단 제 삶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소첩, 헛되게 살기를 바라지 않아요.”
백천범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도 현비처럼 생각하면 좋겠어요. 폐하께서는 제가 괴로워할까 봐 다들 궁에서 내보내려고 하는데, 원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폐하와 마마의 사이를 봤으니 다들 원할 것입니다. 소첩이 물꼬를 잘 트면 다른 비빈들도 확실히 깨닫게 되겠지요.”
* * *
조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황제는 길가에 서 있는 백천범을 발견하였다. 황제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봄바람이 불듯 웃음꽃이 피어났다.
“날 마중 나온 것이오?”
“네.”
백천범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황제는 과분한 총애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즐거워 보이오. 무슨 좋은 일이 있소?”
“가서 말씀드릴게요.”
백천범은 아이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방에 들어서자 백천범은 현비의 일을 말해 주며 즐거워했다.
“본인이 나가고 싶다고 했어요. 제가 강요한 게 아니에요. 이 장군에게 양영호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하세요. 가능하면 둘을 이어 주고 싶어요.”
황제는 곧바로 붓을 들어 서신을 쓰더니 봉랍하고 영구를 불렀다.
“최대한 빨리 이천행에게 보내거라.”
영구는 백천범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몸을 돌려 나갔다.
“급할 것은 없어요. 촌각을 다투는 군사 상황 같잖아요.”
“짐에게는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없소. 빨리 해결해야 우리 둘 다 괴롭지 않을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