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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06)화 (605/1,192)

제606화

자안궁에서 서 태후의 말을 들었을 때, 백천범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 진위 여부를 물을 뻔했다.

자안궁에서 나온 뒤, 바로 경사방敬事房(황제의 시침을 주관함)으로 가서 기록을 찾아보았다. 역시나 정확히 적혀 있었다. 작년 현비의 봉호가 내려진 당일 밤, 현비의 패를 뒤집은 것이다.

그녀는 문득 어화원에 숨어 있을 때 궁녀들이 현비에 대해 이야기하던 날을 떠올렸다. 황제가 현비를 총애하여 패를 뒤집고 낮에는 남서방으로 불러 곁에 머물게 한다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다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다. 파렴치한 인간 같으니라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동정심을 사더니 다 거짓말이었다!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면 이렇게 화도 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의 욕구가 강하다는 건 그녀도 잘 알았다. 함께일 때면 그는 끊임없이 요구하지 않았던가. 다른 여인을 품었다 해도 이해했을 테지만, 이렇게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었다!

이 일을 어찌 논한단 말인가? 황제는 얼마든지 많은 후궁을 거느릴 수 있었다. 묵용감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다 합해도 여덟 명밖에 밖에 되지 않으니. 초왕 시절에도 여러 왕비를 들이지 않는 게 힘들었는데 황제가 된 지금은 더욱더 힘들 테지. 그녀도 황제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후궁을 이미 들였으니 쫓아낼 수도 없고 그저 데리고 있을 수밖에.

자신은 승덕전에, 비빈들은 후궁에서 지내며 각자의 삶에 침범하지 않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비가 승은을 입었다니.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아이가 생겼다면 그녀는 정말 현비를 어찌 대해야 할지 막막했으리라.

예전에는 상관없었지만 연모의 정이 깊어지자 좀처럼 참기 힘들었다. 그녀는 벌레라도 삼킨 듯 속이 거북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고집스레 입을 다문 그녀의 모습에 황제의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갔다. 견디다 못한 그가 월규에게 호통을 쳤다.

“오늘 누가 황후를 저리 화나게 만든 것이냐?”

월규는 황제의 굳은 얼굴에 놀라 몸을 떨었다.

“마마께서 돌아오신 후에 줄곧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황후가 어디를 갔었느냐?”

“자, 자안궁에 갔었습니다.”

격분한 황제가 월규를 걷어찼다.

“정녕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 황후가 자안궁에 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몇 번을 얘기했건만, 어찌하여 말리지 않았느냐?”

바깥의 소란을 들은 백천범이 곧장 달려나왔다. 눈앞의 광경에 화가 난 그녀는 황제를 거세게 밀쳐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왜 월규를 발로 차요? 내 사람인데, 개도 주인을 보고 때린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생겨서 이제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죠? 좋아요, 당신 눈에 안 거슬리게 나가면 되잖아요. 린아는 안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말아요. 린아는 원대한 포부가 있으니 궁에 있으라고 하고 저만 가겠어요!”

그녀가 궁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황제는 얼굴이 빨개지며 격노하였다.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가려는 것이오? 어디로 간단 말이오? 양심도 없지, 날 산송장으로 만들어 놓고 이렇게 쉽게 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오? 절대 그럴 수 없소. 아무 데도 못 가오. 여봐라, 승덕전의 모든 문을 봉쇄하고 궁전 주위에 금군을 배치하라! 당신이 날개를 단다 해도 못 나가게 막을 것이오!”

백천범은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절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간다면 가는 것이에요!”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는 쏜살같이 달려 나가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가 버렸다.

그 광경에 월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제와 황후가 이토록 심하게 다투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와줄 이를 찾아 나섰다.

황제가 문을 잠그자 백천범은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의 주변을 서성였다.

“이제야 알겠소. 짐에게 화가 난 것이었구려. 말해 보시오.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소?”

“잘못한 것 없어요.”

“그러면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오?”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예요?”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까맣고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히 맺혀 있었다. 상심이 거대한 슬픔의 물결이 되어 그녀를 덮쳐왔다. 그러나 풍랑에 휩쓸리는 이는 그녀가 아니라 황제였다. 그는 그녀의 옆에서 한참을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범,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고치겠소.”

결국 백천범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입술만 깨문 채 말을 삼켰다. 당황한 황제는 그녀에게 애원했다.

“천범, 말을 해 보시오. 무슨 말이든 좋으니, 제발 이러지 마시오. 너무 두렵소. 어떤 일이든 말을 해야 풀 수 있는 것 아니오. 궁이 답답해서 그러오? 며칠만 지나면 여유가 생기니 같이 봄 사냥을 갑시다. 당신은 새총을 잘 쏘니 활 쏘는 것도 문제없을 것이오. 사슴을 잡아 그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주겠소, 어떻소?”

백천범의 입술은 진주를 지키는 조개처럼 굳게 다물려 있었다. 황제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용포를 걷고 나갈 자세를 취했다.

“오늘 자안궁에 갔었다고 들었소. 좋소, 짐이 직접 가서 물어보겠소. 태후가…….”

그제야 백천범의 입술이 열렸다.

“태후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태후께선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황제는 그녀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내가 당신을 조상으로 모시겠소. 말해 보시오. 날 말려 죽일 셈이오?”

“말 못 할 이유도 없죠.”

백천범은 비로소 눈물을 닦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날 속인 거예요?”

“무엇을 말이오?”

“아직도 속인다 이거죠?”

백천범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현비의 패를 뒤집었잖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잔뜩 화가 난 백천범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웃다니, 웃음이 나와요? 딴마음을 품었으니 때려죽일 거예요…….”

그녀가 막말을 내뱉자 황제는 더 크게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됐소, 그만 때리시오.”

“흥, 아픈 줄은 아나 보죠?”

“당신 손이 아플까 그러하오.”

백천범이 다시 그를 때렸다. 황제는 여전히 웃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만하시오. 당신은 성급한 면이 있소. 내 죄를 확신해도 해명은 들어야 하는 것 아니오?”

한편, 월규는 학평관과 녹하를 불러왔다. 그들은 바깥에서 서성거렸지만, 문 너머에서는 황제의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황제의 설명이 끝난 뒤에도, 백천범의 침묵은 끝나지 않았다. 조급해진 황제가 말을 이었다.

“믿지 못하겠소? 그러면 현비를 찾아가 확인해 보시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정말 그녀를 방패막으로 삼았다고요?”

“그렇소.”

그러나 백천범의 질투심은 여전히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현비가 슬퍼했겠어요.”

“짐이 봤을 때는 전혀 슬퍼하지 않았소. 오히려 하사품을 많이 받아 좋아했지.”

백천범은 의아할 뿐이었다.

“왜 현비를 선택한 것이에요?”

그녀가 기억하는 현비는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았고 다른 비빈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였다.

황제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맹해 보이는 게 번거롭게 큰일을 만들지 않을 것 같았소.”

사실 황제가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묵용감을 믿는 만큼 그를 잘 알았으니까. 비록 그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지만, 이렇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영원히 함구할 터였다. 여전히 그녀의 마음 속에는 가시가 남은 듯했다.

“그래도 남녀가 한 방에 있었는데 정말 아무런 마음이 안 들었어요?”

황제는 남자의 자존심까지 버린 채 이를 악물었다.

“사실대로 말하겠소. 당신이 아니면 안 되었소.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아서…….”

백천범이 곧바로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안 된다니요? 누구한테 시도해 본 거예요?”

“…….”

“말실수 했죠?”

백천범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빨리 사실대로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린아의 방에서 지낼 거예요.”

황제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백을 증명하려다 약점을 잡히고 말았다.

“진왕이 짐에게 약을 먹였소. 하지만 걱정 마시오. 일이 성사되진 않았으니.”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남문우에게 시집갈 뻔하지 않았소. 나는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소.”

“저는 향 때문에 정신이 흐릿해져서 기억이 안 나요.”

황제가 중얼거렸다.

“내가 약을 먹은 것과 같은 이치 아니오?”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다 지난 일이었다. 묵용감이 자신을 속이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황제가 슬쩍 떠보듯 손을 만져 왔다. 백천범이 손을 빼자 그는 뻔뻔스럽게 다시 다가와 손을 만졌다. 백천범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황제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화가 좀 풀렸소?”

백천범은 자신이 화낸 것을 생각하자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그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뒤끝 없는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황제는 이 일도 해결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백천범을 품에 안고 진지하게 말했다.

“천범,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 솔직히 말해 봅시다.”

백천범은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다 말했는데 뭘 더 말해요?”

“짐이 잘못한 부분이오. 비록 아무 일도 없었지만 당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소? 오랫동안 고심했는데, 비빈들을 내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요? 다들 원할까요? 대신들은 또 어떻고요?”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대신들이 압박해서 이리 된 것 아니오. 강제로 몰아붙일 때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었어야지. 태후만 아니었어도.”

태후가 떠오르자 황제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서두르지 말아요. 후궁을 비우면 황후의 질투에 대해서 손가락질할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질투심이 심하지 않아 방금 그렇게까지 한 것이오?”

백천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신이 알면 됐어요. 다른 마음을 품었다가는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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