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05)화 (604/1,192)

제605화

백천범에게 제 얼굴을 부빈 묵용감이 작게 속삭였다.

“나에게 절을 하면 세뱃돈을 주겠소.”

백천범이 기뻐하며 물었다.

“저도 주시는 거예요?”

어린 시절, 그녀는 다른 자매들이 세뱃돈을 받는 걸 부러워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이씨 부인은 모두에게 세뱃돈을 주었지만 그녀는 꼭 빠트렸다. 유모와 큰오라버니만이 그녀를 챙겨 주곤 했다. 금액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소중히 받은 세뱃돈은 절대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어서 주세요.”

“아직 세배도 하지 않았잖소.”

“폐하, 항상 좋은 일이 함께하시고 건강하시어요.”

황제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매일 얼마나 많이 듣는 말인지 모르오. 다른 말이 듣고 싶소.”

“새해 인사로 다들 이렇게 하지 않나요?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요?”

별안간 황제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당신이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이 있는데, 지금 듣고 싶소.”

“뭔데요?”

황제가 귓가에 속삭이자 백천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쑥스러운데.”

“낯짝이 두꺼우니 잘할 수 있을 것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황제의 격려에 백천범은 입술을 깨물고 부끄러운 듯 이야기했다.

“단노, 당신을 은애해요.”

황제는 가슴이 저릿했다.

“나도 그렇소. 아주 많이 은애하오.”

그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망울은 별빛이 머무르는 바다와 같았다. 그는 이불 밑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백천범은 문득 손목에 무엇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팔을 들어보니 비췻빛의 옥 팔찌였다.

“당신 것은 여소쌍에게 주었으니 내가 하나 주리다. 계속 차고 다니시오. 다른 이에게 줘서는 아니 되오. 끈으로 당신을 묶을 수 없으니 팔찌로 대신하겠소. 영검한 옥이니 당신을 지켜 줄 것이오.”

* * *

봄이 오니 버들 솜이 흩날렸다. 태자 묵용린은 올해로 세 살이 되었다. 세 살에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가훈에 따라, 황제는 선생을 초빙했다. 태자는 매일 서재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태자는 한 살 더 먹었다고 지적 수준이 부쩍 달라졌다. 글공부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태자는 황제와 같이 매일 인시에 일어나 묘시에 서재로 향했다. 점심을 먹은 후엔 잠시 쉬었다가 가동과 함께 기마 자세를 하면서 기본 동작을 수련했고, 신시가 되어서야 수련을 마쳤다.

태자는 이제 백천범과 자겠다며 어리광을 피우지도 않았다. 같은 궁에서 지냈지만 어쨌든 다른 방에서 생활했다. 황제는 사희를 태자 곁에 보냈고 진중한 소태감을 골라 태자의 시중을 들게 했다. 가동은 여전히 태자의 스승으로서 매일 붙어 다녔다.

태자의 선생은 한림원의 대원사 양승해楊承海였는데 고지식하고 엄격한 성격이었다. 고귀한 태자의 신분을 봐주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면 목판으로 손바닥을 때렸다.

황제는 엄격한 아버지가 되어 태자의 글공부를 검사하였다. 책을 외우지 못하거나 글씨가 비뚤면 벌을 주었다. 엄격하게 가르치니 태자도 점점 신분에 걸맞게 행동했다. 황제는 자안궁에 가지 않았지만 태자는 매일 아침 서 태후에게 문안을 드린 후 서재로 향했다. 저녁에는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추고 부황, 모후라고 칭했다. 사고뭉치였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의젓한 모습만이 남았다.

황제는 매우 흡족해했지만 백천범은 걱정이 앞섰다. 아이라면 많이 놀아야 즐겁게 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에 반대했다.

“황실에서 태어났으면 짊어져야 할 사명감이 있소. 당연히 일반 백성의 아이와는 다르지.”

백천범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에게는 아이의 즐거움이 더 중요했다. 태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니, 태자는 고개를 들고 어른스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자는 커서 큰일을 해야 하는걸요. 고기심지苦其心志(사람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다)하지 않으면 큰일을 할 수 없다고 부황께서 말씀하셨어요.”

“힘들지 않니?”

“네, 부황께서 정성을 다해 소자를 가르쳐 주시는데 소자가 어찌 게으름 피울 수 있겠어요? 모후께서도 지켜봐 주세요. 언젠가는 소자가 부황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테니까요.”

묵용린에게서는 군주의 기질을 엿보였다. 백천범은 자신의 생각과 상황이 다름을 깨닫고 넌지시 물었다.

“린아는 황제가 되고 싶어?”

태자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녀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다. 묵용린은 황권을 갈망했고 목표를 달성할 길도 알고 있었다. 더욱이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천범도 더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그녀에게 골치 아픈 일은 딱 한 가지만 남았다.

작년 초겨울 서 태후가 소란을 피운 후, 황제는 지금까지도 서 태후의 금족령을 풀지 않았다. 그의 단호한 처사에는 조금의 용서도 없었다. 서 태후가 나오게 되면 백천범에게 해를 가하리라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백천범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서 태후도 깨달은 바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연로한 그녀를 계속 갇혀 지내게 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이는 평생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잘못을 인지하고 고치는 이에게마저 기회를 뺏어야 할까. 이미 서 태후는 묵용린을 통해 백천범에게 몇 차례나 사죄의 뜻을 전했다. 자존심 강한 태후가 체면도 마다하고 호의를 보이는 데다, 묵용감의 어머니이니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 태후를 보러 가려고 할 때마다 황제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기홍을 진찰하러 온 위중청은 서 태후 이야기가 나오자 탄식을 내뱉으며 한 가지 소식을 전해주었다. 태후가 거동이 조금 불편하여 약을 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백천범은 고심 끝에 서 태후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황제가 조정에 나가 있는 틈을 타 자안궁으로 향했다. 여전히 금군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감시가 많이 느슨해진 참이었다. 서 태후의 출입만 제한될 뿐, 다른 이들은 쉽게 오갈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황유도가 급히 나와 무릎을 꿇었다.

“소인,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예를 갖출 필요 없어요. 듣자니 태후 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던데 좀 나아지셨는지요? 인삼과 제비집을 가져왔으니 매일 달여 드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황유도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렇게 걱정해 주시니 소인이 대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옵니다. 노불야께서 요 며칠 황후 마마를 보고 싶어 하셨는데 마침 와주셨군요.”

“저를요?”

“마마의 성품을 칭찬하셨습니다. 태자 전하가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만 봐도 황후 마마의 넓은 도량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마마께 잘못한 것이 많아 다시 만나게 되면 사죄하고 싶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백천범은 묵묵히 웃기만 했다. 침전에 들어서니, 부드러운 의자에 기대어 담요를 덮은 서 태후가 보였다. 백천범을 마주한 서 태후는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황후가 왔군요.”

“몸이 불편하시다고 하시어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좀 어떠신지요?”

“약을 먹어서 많이 좋아졌어요. 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염려를 끼치게 되었네요.”

“아니에요. 제비집을 가지고 왔으니 매일 드세요. 회복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백천범은 과거의 일은 잊고 서 태후를 살갑게 대했다. 그녀의 태도에서 서 태후는 자신이 모르는 백천범의 모습을 보았다. 이전에는 백천범이 단정하지 못하고 가벼워 보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백천범은 지혜롭고 너그러웠다. 예전의 일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서 태후의 체면을 살려 주고 퇴로를 열어 주지 않는가. 그녀의 남다른 포용력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서 태후는 얘기를 꺼내야 했다. 이 고비를 잘 넘겨야 마음속 응어리도 풀리지 않겠는가. 눈을 내리깐 서 태후가 탄식을 내뱉었다.

“황후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이전 일만 생각하면 애가는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황후가 너그러워 이리 넘어가 주니, 애가는…….”

“태후 마마, 다 지나간 일인걸요. 사람은 앞을 봐야 한다고 저희 유모가 그랬어요. 계속 과거에 얽매이면 마음에 곰팡이가 자란대요.”

서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묵용감이 백천범의 유모에 대해서 말했을 때는 대수롭게 넘겼었다. 시골 여인네가 그녀의 눈에 찰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자신은 시골 여인네보다 못했다. 그녀는 백천범의 손을 잡은 채 창피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 말이 옳아요. 과거의 일은 묻어 둡시다. 그래도 애가가 황후에게 미안한 짓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애가는 이제 황후와 황제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황후가 오니 황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어요. 아들의 마음에 황후뿐이라는 것을 잘 아니, 이제 황제를 압박하지 않을 것이에요.

후궁들은 다 애가가 몰아붙여 들인 것입니다. 현비의 패를 뒤집은 적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황후가 돌아온 후로는 현비도 찾지 않았고요. 부부의 사이가 이리 좋으니 린아에게 남동생을 만들어 주는 것도 어렵지 않겠죠. 여동생도 좋아요. 손주가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지,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린아 혼자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형제자매가 서로 의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백천범은 그저 웃었다.

“순리에 따라야지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인연이 필요하니 연이 닿으면 생기겠지요.”

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 태후가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백천범은 그만 몸을 일으켰다. 서 태후는 아쉬운 마음에 말을 더듬거렸다.

“시간이 나거든, 린아와 함께 오세요. 어찌 되었든, 우린 가족이잖습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백천범은 담요를 세심하게 덮어 준 뒤, 자안궁을 나왔다.

승덕전에 돌아온 백천범은 성질을 부렸다. 황제가 건넨 장신구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깜짝 놀란 황제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부인, 누가 화나게 하였소? 짐에게 말해 보시오. 구족을 멸하겠소!”

백천범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돌려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 광경은 황제의 하늘을 무너뜨렸다. 온순하던 그녀가 오늘은 왜 이런단 말인가? 그는 장신구를 주우면서 그녀를 힐끗 보았다.

“이 머리장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조판처造辦處에 다시 만들라고 하면 되는데 어찌 화가 난 것이오?”

황제는 백천범의 얼굴을 보고 웃어 보였다.

“부인, 왜 이러는 것인지 짐에게 말해 보시오. 짐은 황제이지 않소. 짐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없소.”

백천범은 식식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말하면 자신이 옹졸하게 비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그가 그녀를 속이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애당초 그는 후궁들에게 눈길을 주지도, 그들을 만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동안 어떻게 참아 왔냐며 되묻기까지 했는데! 그는 그녀가 없었기에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았다고 답하지 않았던가.

그 대답에 크게 감동한 그녀가 어찌했었나. 그를 안쓰럽게 여기고 잠자리를 최대한 맞춰 주었건만, 사실은 후궁의 패를 뒤집었다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