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4화
백천범의 얘기는 황제의 마음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어렵게 궁에 들어와서 완의국에 있었다니, 그는 여소쌍을 조사하기 전엔 그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직접 가서 보니 궁녀들이 차가운 물에 옷을 세탁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손이 얼어 당근처럼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천범은 힘든 일을 묵묵히 해 왔을 터였다. 그 생각만으로도 황제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 후, 황제는 그녀의 손을 자세히 살폈다. 역시나 굳은살도 생기고 제법 거칠어져 있었다. 마음이 아팠던 황제는 매일 그녀의 손에 연고를 직접 발라주었고, 세심하게 관리해 주었다. 고운 손으로 돌아온 지금, 그녀의 손을 잡을 때면 부들부들한 감촉이 기분 좋게 감겨왔다.
담소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발길은 어선방에 닿았다. 백천범이 넌지시 그를 말렸다.
“저만 들어갈게요. 당신까지 있으면 다들 허둥지둥할 거예요.”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나는 돌아가리다. 힘들게 일하진 마시오.”
“힘들다니요. 옆에서 보는 것뿐인데요. 기홍의 몸이 불편해서 영 대인의 걱정이 커요.”
황제는 옅은 웃음을 보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군. 그래, 처음 아비가 되는 것인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지.”
한편, 기홍은 몸이 불편해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제와 황후, 태자까지 모두 그녀가 만든 음식을 좋아할뿐더러 곧 명절을 보내야 하니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입덧이 심해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솟구쳤다. 이에 영구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잠깐이라도 가슴을 부여잡고 눈살을 찌푸리면, 그는 바로 그녀를 안고 나왔다. 기홍은 바깥 공기를 쐬고 속을 달랜 후, 다시 들어가 음식을 만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영구는 누구보다 표정이 풍부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늘 무표정하던 얼굴은 오간 데 없었다. 걱정, 기쁨, 긴장… 그리고 의기양양한 모습까지 전부 겉으로 드러났다. 가동이 괜스레 입을 실룩거렸다.
“벌써부터 이러면 출산할 때는 놀라서 기절하겠어.”
영구는 즐거운 마음에 더 으스댔다.
“어쩔 수 없지요. 아버지가 되는 마음을 형님은 알 리 없으니까요.”
가동이 발끈하며 대답했다.
“누가 모른대? 난 너보다 더 빨리 아버지가 되었거든.”
놀란 영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밖에서 낳으셨습니까? 몇 살인데요?”
“밖에서 낳긴. 무슨 헛소리야!”
가동이 손을 치켜들었지만 날쌔게 몸을 피한 영구가 방자하게 웃었다.
“저보다 더 빨리 아이를 보셨다면서요, 밖에서 낳은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때마침 백천범이 들어오다 영구의 말을 들었다.
“응? 가 대인이 아버지가 되었다고요?”
날카로운 녹하의 시선에 가동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영구가 헛소리하는 것이니 믿지 마세요. 일부러 저의 화를 돋우는 것입니다.”
기홍이 영구를 째려보았다.
“당신도 참, 남의 아픈 곳을 그렇게 건드려야겠어요?”
가동의 가장 큰 장점은 장난을 잘 넘기는 점이었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원래 그런 놈인데요, 뭘. 절 괴롭히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계속 당해 와서 익숙합니다.”
녹하는 가동을 질책했다.
“당신이 먼저 시비를 걸지 않으면 영 대인이 그러겠어요?”
욕을 얻어먹은 가동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영구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의 불만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와중에, 태자가 달려 들어왔다.
“사부님, 눈사람 만들러 가요.”
가동은 시원스레 대답하곤 태자를 데리고 나갔다. 밖으로 나간 가동이 태자에게 무어라 속삭였고, 태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게 뭐 어렵다고요.”
태자가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영구! 나오거라.”
영구는 즉시 대답을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오자 묵용린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양아버지!”
영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폐하께서 아시면 저의 목이 달아납니다.”
가동은 눈살을 찌푸렸다.
“날 부르는 소리인데, 모르겠어?”
“태자 전하께서 절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부르라고 했으니 날 부르신 것이야. 내가 전하의 양아버지이지. 이제 알겠어? 내가 먼저 아버지가 된 것이라고.”
“하하, 이렇게 큰 약점을 저에게 잡히시다니, 절 얼마나 믿는 것입니까?”
“…….”
* * *
궁에서 새해 명절을 쇨 때는 따라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나서 자안궁에서 함께 어선을 들어야 했다. 태후가 상석에 앉고 황제와 황후가 태후에게 음식을 올린다. 태후에게 음식을 다 올린 뒤,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 앉으면 황자가 음식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두 시진 이상 걸리는 절차였기에 음식이 식으면 즉시 교체해야 했고, 젓가락, 은수저, 옥 접시 등도 바꿔야 했다. 일손을 도울 궁녀와 태감들이 방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덕에 엄숙하고 성대한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묵용감은 즉위한 후 이 년 동안 한 번도 이 절차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황후가 없었기에 무의미한 절차였다. 이제는 황후가 있었지만, 그는 행사를 치르는 대신 백천범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원했다. 그녀에게는 신분을 떠나 다 같이 즐겁게 식사를 하는 자리가 중요했다.
음식이 차려지기 전, 다들 황제와 황후에게 절을 올리며 예를 갖췄다. 백천범은 세뱃돈이 든 빨간 봉투를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 앉은 후 다른 이들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신분 차이 때문에 다들 제대로 앉지 못하고 의자 끝에만 겨우 걸터앉았다.
엉거주춤했던 자리는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모두가 발개진 얼굴로 담소를 나누었고, 황제는 탁자 밑에서 몰래 부인의 손을 잡았다. 백천범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보냈다. 달콤한 기분이 서로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호숫가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신이 난 태자는 기다란 향을 가져와 폭죽 심지에 불을 붙이려 했다. 깜짝 놀란 학평관이 태자가 멀찍이 떨어지도록 거듭 말렸다. 혹여 폭발하면 큰일이 아닌가.
역시 가동이 태자를 잘 알았다. 그는 태자를 안고 나가 불을 붙이고 재빨리 피했다. 태자는 그의 품에서 즐거워 춤을 추었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백천범도 폭죽 하나에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일렁인 순간, 그녀는 몸을 돌려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폭죽이 힘찬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곧 수많은 금은색 줄기가 하늘을 수놓았고 수면에는 금빛 점들이 아른거렸다.
황제는 그녀의 손에서 향을 넘겨받아 직접 불을 붙였다. 행여 불꽃이 그녀의 손에 튈까 걱정이었다. 백천범은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폭죽에 불을 붙이는 모습마저도 호기로웠다. 성큼성큼 나아갔다 돌아오는 그는 허둥거리기는커녕 여유가 넘쳤다. 폭죽 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듯했다. 침착한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차분히 안정시켜 주었다.
어느새 한 무더기씩 쏘아올린 폭죽은 밤하늘을 색색의 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백천범은 그 사이에서, 금은색 광채를 눈에 담으며 곱게 웃고 있었다. 황제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을 잡은 황제가 낮게 말했다.
“들어갑시다.”
“아직 폭죽이 이리 많이 남았는걸요.”
“남은 이들에게 터뜨리라고 하고 우리는 들어갑시다.”
“돌아가서 뭐 하시려고요?”
황제가 무어라 속삭이자 백천범은 목까지 발개지며 눈을 흘겼다. 황제는 웃으며 그녀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곳곳에 걸린 붉은 등이 겨울밤을 환히 빛내 주었다. 황제는 백천범의 손을 잡고 옅은 붉은 빛이 도는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떠들썩하게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폭죽 터지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꼬리를 물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황제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황홀하게 닿았다. 입맞춤은 눈에서 코로 이어져, 다시금 입술에 머물렀다. 천천히, 그녀의 요대가 풀려나갔다. 손길을 느낀 백천범이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게요.”
“오늘은 내가 시중을 들겠소.”
황제는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꽃잎이 하나씩 벌어지고 여린 꽃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천천히 누워 황제의 목을 감싸고 부끄럽지만 대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느긋하게 몸을 숙였다.
“날 부르시오.”
“단노.”
물을 머금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감겨 오는 목소리는 황제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켰다. 황제는 들찬 표범 같았고 그녀는 여린 꽃인 듯했다. 그의 땀이 그녀를 적셨다. 진줏빛이 도는 그녀의 몸이 그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단노, 아, 단노, 단노…….”
그는 천천히 격해져 갔다. 더 이상 억누르지 않았고, 쉬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모든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을 보상받고 싶었다.
멀리서 폭죽 소리가 선명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귓가에는 머무르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맴도는 소리만이 그의 세상을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문득, 그는 그녀도 자신처럼 행복에 잠겨 있음을 느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 밝았다. 황제는 다리로 백천범을 누르고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독단적이라니, 백천범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은 안 일어나도 되지만 전 일어나야 해요. 세뱃돈을 나눠 줘야 한다고요.”
황제는 눈을 감고 나른한 듯 말했다.
“어젯밤에 나눠 주지 않았소?”
“어제는 월규 쪽만 주었고 다른 이들에겐 주지 못했어요. 이미 다 준비해 놓았으니, 안부 인사를 하러 올 때 줄 거예요.”
정월 초하루 아침이 되면 태감과 궁녀들은 황제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서로 새해 덕담을 주고받은 뒤, 황후가 세뱃돈을 주는 것까지가 궁의 풍습이었다. 황제는 새삼 놀라워했다.
“그런 건 어찌 알았소?”
“총관리가 알려 줬어요.”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허, 이 늙은이가…….”
백천범은 그가 새해 아침부터 불길한 말을 할까 봐 급히 입을 막았다.
“총관리 탓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물어봤어요.”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다 넌지시 물었다.
“황후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오?”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웠다.
“저는 하고 싶지 않은데 당신이 억지로 떠밀었잖아요. 그래도 어차피 해야 하는 거면 잘해야죠. 당신도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성실히 임하고 있잖아요. 당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해요. 저는 경험이 없지만 그렇다고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우리는 부부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죠.”
황제는 감동하여 그녀를 안고 힘껏 입을 맞췄다.
“역시 내 부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