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3화
황제가 방에 들어섰을 때, 백천범은 창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일부러 다른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단노.”
살짝 올라간 말꼬리와 부드러운 말투가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싫었던 이름이, 그녀가 불러 줄 때만큼은 기분 좋게 다가왔다. 황제는 그녀의 의자에 비집고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었소?”
“눈이요. 온 세상이 하얘요. 눈이 정말 많이 내렸어요.”
황제가 그녀를 안고 손을 매만졌다.
“창문을 열어 놓다니, 춥지 않소?”
백천범은 고개만 젓고 대꾸하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 황제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힘이 없는 것이, 무슨 일 있소?”
백천범은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 살고 싶던데, 왜 어떤 이들은 쉽게 목숨을 끊을까요?”
황제는 그녀가 말하는 이를 알아차렸다. 비록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진심으로 수원상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해 무얼 하겠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잘 살아가면 되지.”
백천범은 고개를 들어 그의 관冠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되면 정말 좋아요?”
황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황제는 하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산수풍경도 즐기고 자유롭게 살았겠죠. 휴, 전 정말 궁이 싫어요. 크기만 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나요. 좁은 길을 걸어갈 때면 섬뜩한 기분도 들어요.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어 아랫사람을 억압하죠. 대부분 다른 이를 밟고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고요. 그중에서도 노비들이 제일 불쌍해요. 개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으니 죽어서도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해요. 역시 궁 밖이 나아요. 능력에 따라 살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황제는 들을수록 불안해져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또 궁을 떠날 생각이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다른 것은 다 되어도 궁을 떠나는 것만은 안 되오.”
백천범이 그를 흘겨봤다.
“이렇게 저를 꽉 잡고 있는데 어딜 갈 수 있겠어요.”
황제는 콧방귀를 꼈다.
“다른 건 몰라도 도망 하나는 잘하지 않소. 꼭꼭 숨어 버리면 어디서 그대를 찾는단 말이오?”
백천범은 농을 던졌다.
“그게 뭐 대수겠어요? 제가 가도 후궁에 아직 여럿 있는데.”
황제는 식식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꼬집었다.
“또 질투를 하는군, 짐이 비빈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화를 돋우다니. 기다리시오. 하나씩 해결하겠소.”
백천범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결하다니요? 목숨이 달린 일인데 경솔하면 안 돼요. 당신이…….”
그 말에 황제가 언짢은 표정을 보였다.
“그대가 보기에 짐은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극악무도한 사람이오?”
백천범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놔두세요. 다들 후궁에서 잘 지내는데, 당신에게 무슨 해가 된다고 그렇게까지 해요.”
“그들은 가만히 있는데 당신이 나의 성질을 돋우지 않소.”
황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그쳤으니 눈싸움을 하러 갑시다.”
백천범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이시면서 어찌…….”
“황제라고 눈싸움을 못 하는 법이 있소?”
그가 백천범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앞뜰에는 아직 아무도 다니지 않았는지 소복한 눈이 이불처럼 깔려 있었다. 백천범이 지나간 자리마다 깊은 발자국이 파였다.
“짐이 그대를 위해 눈사람을 만들어 줄까 하오.”
백천범은 단번에 웃음 지었다. 기분이 가라앉았던 터였지만, 눈밭에서 마구 뛰어놀 생각을 하니 다시 들떴다. 눈사람을 멋지게 만들고 싶었던 황제는 열심히 눈을 굴렸다. 소태감이 달려와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는 흥을 깨지 말고 멀리 물러나라고 명했다.
백천범은 그가 안 보는 사이 손을 들어 주먹만 한 눈덩이를 던졌다.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없던 황제는 정통으로 눈을 맞았다. 그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둘은 금세 서로 쫓고 쫓기기 시작했다. 눈싸움을 시작한 그들은 웃고 떠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멀리 서 있던 태감들은 날아다니는 눈덩이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늘 무표정한 얼굴의 황제가 일반 백성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학평관만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황후가 있는 한 황제는 자주 흐트러지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왔으니.
실력으로 따지면 백천범이 황제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부인을 아끼는 마음에 몰아붙이는 척만 할뿐, 정작 그녀를 맞춘 눈덩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백천범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계속 눈덩이를 던졌다. 어느새 황제는 머리와 용포에 눈을 잔뜩 맞아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다.
달리다 뒤를 돌아본 백천범은 그의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그만 눈밭으로 넘어져 머리와 얼굴이 눈 범벅이 되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한참을 웃다 지친 그녀는 일어나기도 귀찮아 눈밭에 대자로 누웠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하얀 숨이 연신 피어올랐다.
서둘러 그녀를 일으키려 달려온 황제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절세미인이 하얀 눈밭에 누워 있으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멀리서 지켜보던 소태감이 급히 달려가려 했지만, 학평관이 낮은 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 궁에서, 모처럼 즐거워하는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아닌가. 그들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백천범의 손을 잡아 감쌌다.
“보시오. 궁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최악은 아니오. 이렇게 즐겁게 놀 수 있지 않소.”
백천범은 고개를 돌려 입술을 내밀었다.
“단노, 입을 맞춰 줘요.”
몸을 일으킨 황제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사이, 고요하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눈송이들은 소리 없이 두 사람의 몸에 내려앉았다.
세상에 단둘만이 남은 듯했다. 마주친 두 쌍의 눈에 서로의 모습이 떠올랐고, 따스한 감정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요하고도 충만한 시간이 이어졌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위가 길목을 막아섰다. 눈치 빠른 영구는 황제와 황후를 방해하는 이가 생기면 알아서 형벌을 받고 오라는 명까지 내려 두었다.
한참 후, 황제는 마음을 추스르고 백천범을 일으켰다.
“갑시다. 만날 사람이 있소.”
“누구요?”
황제가 일부러 뜸을 들였다.
“가면 알게 될 것이오.”
그는 백천범을 데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좁은 길을 지나니 여러 곁채가 모여 있었다. 황제가 그중 한 곳을 가리켰다.
“들어가 보시오.”
백천범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문발을 걷고 들어가 보았다. 약 냄새가 조그마한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창가 쪽의 침상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천범의 커다란 눈에 놀라움과 기쁨이 떠올랐다.
“소쌍!”
여소쌍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누구이신지?”
화려한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을 제가 알겠는가? 기이하게도, 저를 보는 두 눈이 낯설지 않았다.
“나야, 나! 대쌍.”
백천범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세히 봐봐, 알아보겠어?”
얼떨떨한 눈으로, 여소쌍이 백천범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비록 모습과 목소리는 변했다고 하나, 반짝이는 눈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자신의 언니, 여대쌍이 눈앞에 서 있었다. 기쁨이 차올라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언니!”
백천범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울지 마. 네가 살아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문 앞에 선 황제는 둘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어김없이 찾아온 한 해의 마지막 날, 백천범에게는 두 가지 기쁜 소식이 있었다. 하나는 여소쌍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홍의 회임이었다.
황제에게도 뜻깊은 날이었다. 한 가족이 모인 첫해를 마무리하는 날이니, 어찌 특별하지 않겠는가? 그는 기쁜 나머지 대신들에게 며칠간의 휴가를 주었고, 자신도 백천범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하였다.
여소쌍은 상처가 심해 오래 서 있지 못했지만,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계급이 가장 낮은 궁녀여도 두꺼운 비단 요를 깐 커다란 의자에 앉았고, 황제가 와도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었다. 옆에 선 태자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더니 물었다.
“이분도 이모예요?”
백천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마라고 부르렴.”
여소쌍이 놀라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마마. 태자 전하께서 어찌 소인을 마마라 부르실 수 있겠습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우리가 자매의 연을 맺었으니 당연히 마마라 불러야지. 그리고 궁녀면 어때. 나도 해 봤으니 그런 걸 따질 필요 없어.”
백천범이 살갑게 말했다.
“마마에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렴. 마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으니까.”
묵용린은 그녀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여소쌍을 보았다.
“마마, 이야기해 줘요.”
여소쌍은 불안한 듯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전하께 귀신 얘기를 들려 드릴게요.”
옆에서 듣던 월규가 뭔가를 알려 주려는 찰나, 태자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좋아요. 전 귀신 얘기가 좋아요.”
백천범은 웃으며 어선방으로 향했다. 기홍이 입덧이 심하니 가서 도와줄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황제가 학평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황제 옆에 섰고, 황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학평관은 서둘러 물러났다. 최근 황제와 황후는 애정 표현을 하지 않으면 못 살 것처럼 보였다. 학평관은 이럴 때는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이라고 여겼다.
“궁이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최악은 아니라고 했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황제는 절로 의기양양해졌다.
“천자의 말이 어디 틀린 적 있었소.”
“당신 덕분이에요.”
백천범이 그의 눈을 올려보았다.
“당신이 있으니 이 차가운 궁도 따뜻하게 느껴져요. 소쌍을 구해 줘서 고마워요.”
진지한 그녀의 인사에, 황제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한테까지 예를 차릴 것 뭐 있소. 그녀가 아니었으면 당신도 궁에 들어오지 못했을 터이니 큰 공을 세운 것이오. 연말이 지나면 여소쌍을 군주郡主(친왕의 여식)에 봉할까 하는데, 어떻소?”
“그럼 여소쌍을 대신해 제가 감사드릴게요.”
백천범은 그를 이끌며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아주 가여운 아이예요. 부모를 잃고 홀로 지냈는데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지요. 군주가 되면 아무도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당신을 만났으니 저 애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소.”
“저도 마찬가지예요. 입궁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원래는 개숫물을 대는 마차에 숨어서 들어오려고 했는데 몇 번이나 실패했어요. 소쌍이를 만나 궁녀의 신분으로 들어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도 궁 주변을 서성거렸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