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2화
백천범의 말에 수원상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묵용린을 보자 흐린 눈망울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에 묵용린은 백천범의 다리를 꼭 껴안았다.
“많이 아파서 그런 것이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백천범이 린아의 어깨를 다독였다.
“린아, 어머니가 양비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밖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위와 밖으로 나갔다. 수원상은 정신이 조금 드는지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꼴을 보려고 온 것인가?”
백천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린아를 볼 기회가 없을 듯싶어 린아를 데리고 온 것이에요.”
“착한 척 그만 하시지. 내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행동할 필요 없어. 그래, 인정할게. 내가 졌어. 어쩌겠어.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한 사람만 남아야 하는 것을.”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폐하께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여옥이 당신 손에 있었으니까.”
“그래?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었을 거라고?”
“린아가 알려 줬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조각 맞추기도 같이하고 규율도 알려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고 했죠. 전 그런 당신이 죽길 원치 않았어요.”
수원상의 누런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벌떡 일어난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태자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
“네.”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린아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한 사람은 다 기억해요.”
수원상은 그대로 허물어지며 중얼거렸다.
“린아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말하면 안 돼, 안 돼…….”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그녀는,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로 잠겨 들었다.
밤이 되자 눈발이 날리며 온 하늘을 뒤덮었다. 초겨울엔 비가 내리더니, 연초가 되자 눈이 내린 것이다.
수원상은 창문 앞에 서서 눈꽃 송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미색의 등불에 비친 눈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버들 솜 같았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머지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봄이 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은 영원히 이 추운 겨울날에 머물러 있을 테니.
그녀의 잘못일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을 뿐인데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시집을 왔지만 부군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아이가 생겼지만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힘들게 버텨서 궁까지 들어왔고 황제의 신임도 얻어 목표에 다가가고 있었는데……. 어찌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그녀는 가문의 적장녀이자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가문의 지위를 드높여 백가처럼 명성이 자자한 세도가로 만들고 싶었다. 한데 어찌하여 이런 꼴이 되었을까.
황제는 그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고 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저 목표를 위해, 꿈을 위해 노력했을 뿐. 부친도 그녀에게 일반인은 갖지 못하는 인내심이 있다고 칭찬했었다. 그렇게 모든 마음을 황제에게 쏟아부으며 충성을 보였는데, 어째서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겼을까.
인내심을 가지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기던 그녀였다. 그러나 백천범이 돌아온 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계획은 엉망이 되었고, 오랜 기다림은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그녀는 갖은 노력 끝에 황제의 신임 한 자락을 얻었건만, 백천범은 간들간들한 눈빛 하나로 황제의 마음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다시 모인 세 식구는 화목하기 그지없었다. 황제는 황후를 은애의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들 사이의 태자는 사랑스러웠다. 자안궁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수원상은 강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마음에 가둬두었던 괴물은, 오랫동안 참아왔음에도 결국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 미친 듯이 날뛰는 괴물을, 그녀는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질투심에 이성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천면인의 존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과도 같았으나, 그녀는 모처럼의 기회로 여겼다. 그녀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또다른 기회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일을 꾸몄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자신을 탓해야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긴 자는 왕이 되고 지면 역적이라더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련이 없진 않았다. 안에 갇혀 있으니 의외로 태자가 제일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마마라 부르더니 나중에는 이모라고 불렀었다. 모비母妃라고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은 생모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을 양비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그마저도 큰 위안이 되었다.
의외였던 것은, 백천범이 묵용린을 데리고 온 일이었다. 또한 태자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묵용린이 자신을 좋게 봤다니…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 이제 되었다. 잘된 것이다.
문득 고개를 든 그녀의 눈망울에 잿빛 하늘이 맺혔다. 하늘을 가득 메운 눈송이들은 그녀를 덮어 주려는 듯, 고요히 쏟아져 내렸다. 그래, 묻어 버리거라. 모든 추악함과 악행들을 땅에 묻어 버리거라. 그리하면 내일 아침엔 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볼 수 있을 테니.
그녀는 요대를 풀어 창살에 걸었다. 이윽고 걸상에 올라간 그녀가 요대를 목에 걸었다. 잠시 후, 걷어차인 걸상이 두꺼운 양탄자 위를 굴렀다. 나지막한 신음이 흐른 끝에, 세상은 적막에 휩싸였다.
다음 날 아침, 시위가 창살에 목을 맨 수원상을 발견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 사실은 은폐되었고, 대외적으로는 병사로 처리되어 급히 장례를 치렀다.
대신들이 황제를 몰아세울 때 수민은 병을 핑계로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중 날아든 수원상의 부고에, 그는 안채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있었다. 황제의 밀지 앞에서 오열이 터져나왔다. 비록 황제가 관용을 베풀어 가문의 체면을 살려 주었고, 영항에 있던 수원비를 돌려보냈다지만, 수가는 임안성을 떠나야만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타지로 쫓겨난 것이다.
그는 땅을 치며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묵인하는 동안, 수원상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가 막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지 않았는가. 수민은 자신이 백여름과는 다르다고 여겼지만, 결국 똑같은 길을 걸은 셈이었다.
숙비의 진상 역시 밝혀졌다. 천면인에 관한 정보는 시위로 있는 그녀의 사촌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사촌은 숙비를 연모하였지만, 숙비가 입궁하는 바람에 마음을 접어야 했던 터였다.
숙비는 이 점을 이용했다. 혼례 당일 밤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수원상의 허락을 받아 친정에 돌아갔고, 사촌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몸을 섞었다. 이후 이를 무기로 협박하니, 사촌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둘의 최후는 사형이었다.
백장간은 자신의 동생을 위해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진왕과 함께 갖은 방법을 동원해 유언비어의 출처를 찾았고, 마침내 범인을 색출해 냈다. 이야기꾼을 고문하니 역시나 사례를 받고 이야기를 만들어 냈음이 밝혀졌다. 숙비와 수원상의 측근이 사주한 일이었다. 관련자들은 모두 성문 앞에서 편형鞭刑(죄인을 매로 치는 형벌)에 처했고, 유언비어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천면인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가짜 황후를 언급하는 이들도 사라졌다. 다들 황후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고, 이제는 결백이 증명되었다는 사실만 기억하였다.
이번 사건으로 사비가 둘로 줄었지만, 다른 비빈들은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황후에 대한 총애가 아무리 부러워도 마음속으로만 삭혀야 했다.
황제와 황후는 정식 부부니, 은애하는 것은 당연했다. 비빈들은 수를 채우기 위해 입궁했을 뿐이니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 봉황이 되는 것은 헛된 망상일 따름이었다.
서 태후는 또다시 몸져누웠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설마 수원상이 일을 꾸미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녀를 믿고 중궁의 위치까지 올리려 했건만, 수원상은 믿음을 저버렸다.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모자간에 간극은 더더욱 벌어져 버렸고,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겨우 갈등을 메웠건만, 또다시 이렇게 되어 버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서 태후는 또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르다니, 아직도 시비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녀였다.
자신을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하냐는 황제의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들었다. 그녀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았지만, 생각해 보면 황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계략을 쓰지 않았던가. 황제를 위함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백천범이 싫었다. 그 속내를 간파한 황제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또다른 두려움이 서 태후를 사로잡았다. 손자와도 관계가 소원해지면 어찌한단 말인가? 애지중지하는 손자가 자신을 부르는 건, 그녀를 종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한데 이렇게 멀어져만 가니, 슬픔만이 밀려왔다. 차라리 선황제를 보러 가 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할마마마.”
그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서 태후는 환청인가 싶어 몸을 뒤척였다. 어느새 묵용린이 침상 가까이에 다가와 까만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마마마, 왜 울고 계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서 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착한 것, 린아를 보니 할미가 다 나았습니다. 한데 여기는 어떻게 온 것입니까?”
“어머니께서 할마마마가 아프시다고 병문안을 가보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어찌 같이 오지 않으셨지요?”
또 한 번 그녀를 힘들게 했으니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테지.
“어머니는 할마마마께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지 않으셨어요.”
묵용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마마마, 왜 어머니를 싫어하세요? 다들 좋아하던데.”
“할미가 못나서 그래요. 어머니의 좋은 점을 못 보고, 할미가…….”
서 태후는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눈물을 떨구었다.
“할마마마, 울지 마세요.”
묵용린은 속 깊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플 때 울면 안 된대요. 그러니 할머니를 잘 다독이라고 어머니께서 당부했어요.”
그 작은 아이의 말이, 서 태후를 오열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