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1화
“백천범은 순수하단 말씀이십니까?”
수원상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몰래 궁에 잠입해 궁녀로 변장한 여인입니다. 폐하께선 백천범이 무슨 의도로 그리했는지 왜 묻지 않으십니까?”
“몰래 태자를 데리고 궁을 나가려고 했지.”
수원상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뜻밖의 답변이 돌아오고 말았다. 단지 묵용린을 데려가기 위해 입궁했다고? 황후의 자리도, 부귀영화도 죄다 마다하고? 황후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단 말인가? 아연실색하는 그녀를 향해 황제의 냉소가 쏟아졌다.
“당신이 꿈에 그리던 황후의 자리는 천범에게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소. 그녀가 원하는 것과 당신이 바라는 것은 영원히 다르겠지. 당신은 천성이 나쁘진 않으나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소. 그러나 천범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고, 아무리 힘들어도 남을 해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니, 바로 당신과 천범이 다른 점이오. 이제 알겠소?”
순간 힘이 빠진 수원상은 온몸이 수그러들었다. 정녕 그런 것인가? 하지만 쟁취하지 않으면, 남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사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녀는 천천히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해 들었다. 돌연,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추문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이 궁녀를 장형杖刑에 처하라!”
추문은 바닥에 엎드리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주인을 모시는 자로서 주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바로잡아야 하거늘, 공범이 되다니. 어서 이자를 끌고 가라.”
시위 두 명이 추문을 끌고 가려고 하자 수원상이 소리쳤다.
“멈추세요!”
그녀는 즉각 무릎을 꿇었다.
“폐하, 죄를 만든다 한들 구실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제가 천면인을 데리고 있다는 황후의 말은 믿으시고, 저의 결백은 믿지 않으신 채 제 몸종을 죽이려 하시다니요. 증거는 찾으셨습니까? 천면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데 황후께서 어찌하여 제게 죄를 덮어씌우는지 신첩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 입 다물라!”
황제가 격분했다.
“황후가 궁녀로 변장해 몰래 궁에 잠입한 의도를 물었지. 이는 황후를 가짜와 몰래 바꿔치기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더냐? 짐이 직접 들었음에도 아직 발뺌을 하는 것이냐?”
수원상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황제의 말에 흥분하여 진상을 폭로한 꼴이 된 것이다. 황후가 궁녀로 변장한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그녀가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시위에게 붙들린 추문은 겁에 질려 발버둥을 쳤다.
“살려 주세요. 마마, 저 좀 살려 주시어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수원상은 그만 넋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눈가에 물안개가 차올랐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추문은 끌려가며 바닥을 손가락으로 할퀴었다. 그녀의 비명과 마찰음은 가슴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추문은 수원상을 향해 애절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렇게 충성을 바쳤던 주인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실망을 금치 못한 추문이 다급히 소리쳤다.
“말할게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황제가 손을 들자 시위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황제 앞으로 구르다시피 달려갔다.
“폐하, 다 말하겠습니다.”
번뜩 고개를 돌린 수원상이 그녀를 때리려 했다.
“쓸모없는 것, 널 곁에 둬서 무엇을 하겠느냐!”
그때, 황제가 재빠르게 수원상의 손을 짓밟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가위가 허망하게 떨어져내렸다. 추문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마마, 어찌하여…….”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이 제대로 보았구나.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자는 누구든 없애려 드는군.”
수원상은 머리를 헝클어트린 채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충성하지 않는 노비를 남겨 무얼 하겠습니까?”
추문은 상심이 극에 달했다.
“마마, 소인은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돌아가시는 것도 원치 않고요. 차라리 다 자백해서 마마를 용서해 달라고 폐하께 빌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울며 황제 앞에 엎드렸다.
“폐하, 제가 다 말할 테니 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후궁을 관리하고 태자 전하를 보살핀 점을 헤아리시어, 부디 저희 마마를 살려 주세요.”
그때, 수원상이 갑자기 일어나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려는 듯 허겁지겁 장막을 뜯어 버렸다.
황제의 시선이 한 곳에 차갑게 머물렀다. 잠시 후, 그가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침상을 뜯어 보거라.”
황제의 추측대로였다. 영구조차 천면인을 찾지 못한 건, 수원상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천면인의 시체를 침대 밑에 숨겨 놓았을 줄 누가 예상했을까. 아무리 대담하여도 고귀하게만 살아온 궁비가 어찌 시체와 같이 잘 수 있단 말인가.
병사들이 침대를 부수자 수원상은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녀는 이미 실성이라도 한 듯, 산발이 된 머리에 헝클어진 복장으로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추문은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며 황제에게 계속 애원했다.
“폐하, 마마를 살려 주십시오. 천면인을 숨길 때 소인도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마마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께선 이미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불쌍하지 않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살려 주십시오.”
황제는 병사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수원상을 힐끗 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추문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 보거라. 왜 사람을 바꾸려고 한 것이냐?”
추문은 울며 답했다.
“마마께서는 서화궁의 천면인이 가짜인 줄 모르셨습니다. 한데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사이가 좋아져 태자 전하를 데려갈까 봐 두려워하셨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태자를 빼앗아 갈까 봐… 그래서 황후를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태자 전하를 데려가지 못할 테니까요.”
황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태자가 황후 곁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빼앗다니! 태자가 제 것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마마께서는 태자 전하를 진심으로 아끼셨습니다.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해도 태자 전하만 있으면 괜찮다고…….”
황제는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미친 것이 분명하구나.”
* * *
모든 정황을 알게 된 백천범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가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다 지난 일이오.”
황제는 그녀의 귀밑머리에 입을 맞췄다.
“걱정 마시오. 아무도 린아를 데려가지 못하오. 우리의 아이 아니오.”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엾기도 하네요.”
“그저 뿌린 대로 거둔 것이오.”
황제가 천천히 읊조렸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니, 죽어 마땅하오.”
백천범은 여전히 마음이 약했다. 그녀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실성했으니 이미 큰 벌을 받은 셈이죠.”
“진짜 미친 것인지 알 수 없소. 당신은 다 좋은데 마음이 너무 약하오.”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아들을 빼앗길 뻔했는데 수원상을 가엾어하다니.”
“그래도 린아에게는 진심으로 대했잖아요. 유모가 그랬어요. 원한보다는 은혜를 더 새겨야 마음이 병들지 않는다고.”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소. 당신의 유모를 일품 고명 부인으로 추봉하려고 하오. 내년 봄에 묘지를 다시 수리합시다.”
“정말요?”
백천범의 눈이 밤하늘에 떠오른 별처럼 빛났다.
“너무 좋아요! 유모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좋아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머뭇거렸다.
“유모는 시골 여인에 불과한데 그렇게 높은 봉호를 내리시면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요?”
“입을 놀리는 자가 있으면 매질을 할 것이오.”
“폐하.”
“폐하라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부르시오.”
“감아.”
“감이면 감이지, 왜 ‘아’를 붙이는 거요. 아이를 부르는 것 같소.”
“감!”
“더 부드럽게 부를 수는 없소? 딱딱하여 돌이 떨어지는 소리 같소.”
백천범은 몸을 꼬더니 입을 삐죽였다.
“안 부를래요. 그냥 폐하라고 부를게요.”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릴 적 부르던 이름이 하나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소. 그대에게만 알려 줄 테니 그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어떻소?”
백천범이 그를 올려보았다.
“뭔데요?”
황제는 말하기도 전에 얼굴부터 빨개졌다. 이내 그가 용기를 내어 이름을 말했다.
“단노檀奴요.”
백천범은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남자아이 이름에 ‘노奴’자가 들어가는 것은 흔한데, 왜 하필 단노예요? 단향목을 뜻하는 글자를 넣은 걸 보니 당신이 향기롭지 않았나 보죠?”
발끈한 황제가 손을 뻗어 그녀를 간지럽혔다.
“웃지 마시오. 어릴 때부터 짐을 단노라 부르는 자가 있으면 때려 줬었소. 그러니 태후도 감히 못 불렀지. 당신만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준 것인데 비웃다니, 좀 혼나야겠소.”
백천범은 그의 품에서 이름을 되뇌며 웃기 바빴다.
“단노, 단노, 단노…….”
“한 번만 부르면 되지, 일부러 이러는 것이오?”
황제는 그녀를 의자에 눕혀 간지럽히면서 은근슬쩍 가슴과 허리를 더듬었다. 둘은 한참을 시시덕거리다 제 자리에 앉았다.
“방금 짐을 불렀는데 무슨 할 말이 있소?”
백천범은 너무 웃어 시큰한 볼을 만지며 말했다.
“린아를 데리고 양비를 만나고 싶어요.”
황제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만나려는 것이오? 안 되오.”
“단노.”
백천범은 그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리다 단노라는 이름에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만 만나게 해 줘요. 네? 단노.”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름을 들으면 늘 주먹부터 나갔는데, 백천범이 부르니 마음이 간질간질하게 피어올랐다. 참으로 색다른 기분이었다.
“알겠소. 린아가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걱정 마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백천범은 그의 귀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단노.”
이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기 바쁘다니. 황제가 그녀에게 벌을 주려고 하자 백천범은 곧장 도망갔다. 그러면서도 입으론 ‘단노’라고 말하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백천범은 묵용린을 데리고 수원상에게 향했다. 며칠 만에, 수원상의 모습은 딴판이 되어 있었다. 누런 낯빛에 눈은 움푹 파여 있고 머리는 산발인 채였다. 무릎을 감싸고 의자에 앉은 그녀는 누가 오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묵용린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어머니, 이모가 이상해요.”
“병에 걸려서 그런 거야.”
백천범은 수원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섰다.
“양비, 린아를 데리고 당신을 보러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