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0화
백여름은 그녀에게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편히 쉴 곳을 제공해 주었다. 그녀 때문에 백 부인과 다투기도 했으니 백여름은 그녀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백장간도 그녀의 오라버니였다.
낳아 준 것과 길러 준 것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돌아온 후에도 수원상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닌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떠한 악감정을 품었든, 수원상은 묵용린을 잘 보살펴 주었으니까.
황제의 분노가 가시지 않자, 백천범은 그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간지럽혔다.
“그만 화 푸세요. 주름살이 하나 더 늘었어요.”
황제는 무의식중에 눈가를 매만졌고, 백천범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사실 질투하는 거죠? 백 장군이 제 친오라버니가 아니니까요.”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를 못 믿는 거예요? 아니면 자신을 못 믿는 거예요?”
황제는 눈앞에 보이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황제요. 이 세상에 더 잘난 사람이 있겠소?”
* * *
성벽에 썩은 계란을 던지는 등 백성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대신들은 이제 황제를 압박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승덕전은 근심에 휩싸였다. 월규는 입술에 포진이 생길 정도로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마의 명성이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지다니, 정말 화가 나 죽겠습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랑 한 판 붙고 싶다니까요.”
기홍이 콩국을 체에 거르며 말했다.
“참아야 해. 폐하를 믿어야지. 마마를 위해 진상을 밝혀 주실 거야.”
문 쪽을 힐끗거리던 월규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경수궁이 포위돼서 출입이 금지됐다고 하던데… 양비가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을까요?”
기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관련이 있다면 너무 안타까워.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후궁도 잘 관리하고 태자 전하도 성심성의껏 돌보고 말이야. 모름지기 사람은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나올 수가 없는 거지.”
그러나 월규는 콧방귀를 꼈다.
“전 좋은 사람인지 모르겠던데요. 개과천선한 줄 알았더니, 마마께서 돌아오시자마자 음험해지는 것 봐요.”
“같은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일 수는 없지.”
그때, 녹하가 들어왔다.
“마마가 돌아오니 양비가 위기를 느끼고 움직이는 걸 거야. 하지만 우리 마마와 겨룰 수 있겠어? 마마는 폐하께서 가장 은애하는 분이시고 태자의 생모이신데 가당키나 한가?”
비로소 월규가 웃어 보였다.
“그렇죠.”
기홍이 콩국 그릇을 쟁반에 올려놓았다.
“다 됐다. 어서 가지고 가. 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거야.”
월규는 바로 가지 않고 녹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태자 전하께서 가 대인을 따라다니지 않으세요? 매일 마마 곁에 계시기만 하고.”
녹하가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어리시지만 속이 얼마나 깊으신지! 마마께서 괴롭힘을 당하니까 아무 데도 안 가시고 마마 곁에만 계시는 거야. 며칠 전 금란전에서 새총으로 대신들을 쏜 일, 알고 있지? 태자 전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니까.”
기홍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쩐지 요 며칠 가 대인이 안 보인다 했더니… 전하 대신 벌을 받으러 가셨구나.”
월규도 상황을 파악하고 웃었다.
“가 대인이 고생이 많네요. 요즘 누워만 계시겠어요. 녹하 언니, 가 대인께 맛있는 것 좀 해 드려야겠어요. 아무나 태자 전하의 스승님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녹하는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벌을 받긴 했지만 폐하께서 정말 죄를 물으신 건 아니었어. 그저 보여 주기 식으로 혼내셨으니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야. 요즘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온다니까. 무엇을 하고 다니는 건지 궁에도 오질 않고. 폐하께서 다른 임무를 주셨나 봐.”
* * *
그 시각 자안궁. 황유도가 허둥지둥대며 내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노불야, 큰일 났습니다. 금군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서 태후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영 마마에게 황망한 시선을 보냈다.
“이미 금족령을 내렸는데 또 무얼 하려는 것인가? 그 요녀 때문에 애가를 정말 죽이려는 것인가?”
영 마마가 얼른 그녀를 위로했다.
“노불야, 겁내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서 사리 분별을 잘하시니, 저희가 잘못 알았다고 하더라도 피를 보려 하진 않으실 거예요. 황후 마마도 잘 계시잖습니까.”
서 태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는 정말 폐하를 위해 그러한 것이네. 타국 첩자를 곁에 뒀다가 해라도 당하면 어쩐단 말인가?”
영 마마는 성심성의껏 그녀를 달랬다.
“노불야, 황후가 황후답진 않지만 폐하를 시해할 것 같진 않습니다. 부부간의 은애와 모자간의 정은 꾸며낼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인은 시집을 오면 부군을 중시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황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좋은 부군과 아들이 있는데 어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서 태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일찍 말해 주지 않았나?”
영 마마가 힘없는 미소를 보였다.
“소인은 예전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 말씀드렸는데, 노불야께서는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실까 불안하시어 소인의 말은 듣지 않으셨습니다.”
서 태후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금군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 이리 조용한가?”
황유도가 허리를 숙여 답했다.
“소인이 다시 가보겠습니다.”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급히 나갔다 오더니,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노불야, 금군이 저희 쪽이 아니라 경수궁으로 갔습니다.”
서 태후가 놀라 중얼거렸다.
“설마 양비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영 마마가 말했다.
“그때 황후 마마도 천면인이 양비에게 잡혀 있다고 하였지요. 아마도 이 일과 관련이 있는 듯 보입니다.”
“정말 천면인이 존재한단 말인가?”
“노불야, 신경 쓰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금족령을 내리신 것도 마마께서 더 이상 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조용히 지켜보시면 폐하께서 시비를 가려주실 것입니다.”
서 태후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정말 늙었나 보군. 요즘 들어 머리가 멍한 것이 잠시 누워 있어야겠네.”
* * *
경수궁 주변에 금군이 배치됐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은색 갑옷이 스산하게 빛났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추문은 수원상을 힐끔거렸다.
“마마, 병사들이 더 추가되었어요. 저희를 가둬 죽이려고 하나 봐요.”
수원상이 즉각 호통을 쳤다.
“당황할 것 없다. 본궁은 결백하다. 증거도 없이 폐하께서 본궁을 어찌하겠느냐!”
추문은 그녀의 질책에 몸을 웅크리더니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먹을 것도 주지 않으니 이대로 가다간 마마께서 못 버티실 것입니다.”
수원상은 여전히 냉담하게 말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죄를 시인하지 않을 것이다.”
추문이 망토를 가져와 수원상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숯도 다 떨어져 손화로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정말 화가 나셨나 봐요. 소인은 괜찮지만, 마마께서 이런 고생을 하시니 가슴이 아픕니다. 폐하께 충성을 다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다니요.”
수원상은 잠시 넋을 놓았다. 긴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 운명인 것이지, 본궁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배치된 금군은 일제히 괭이와 삽을 들고 경수궁 주변의 흙을 파헤쳤다. 석가산과 연못, 수원상이 심어 놓은 화초들이 모두 파헤쳐졌다. 정갈하게 꾸며 놓았던 경수궁이 진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영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흙 속을 일일이 다 확인했다. 수원상이 천면인을 살해했다면 시체를 묻었을 터인데, 어찌 찾을 수가 없단 말인가? 설마 죽이지 않고 궁 밖으로 빼돌렸단 말인가?
이어 궁 문 출입 기록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치밀한 성격의 수원상은 천면인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천면인은 경수궁 내에 있을 텐데…….
영구는 경수궁 내 노비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신분을 확인한 노비들을 모두 뒤채에 가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수원상 곁엔 추문만 남게 되었다.
추문은 수원상의 심복이니, 내막을 알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력이 아주 좋은 시위들을 몰래 배치해 두었지만 그 어떠한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수원상은 누군가 엿듣고 있다고 여겼는지, 입만 열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영구는 황제가 다가오자 급히 예를 갖췄다.
“폐하.”
“단서를 찾았느냐?”
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양비는 죄를 시인하지 않았고, 천면인과 관련된 단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동은 진전이 있더구나. 시위 한 명이 누설을 했는데 옥미궁과 관련이 있다고 해 짐이 옥미궁을 포위했다. 백장간과 진왕도 실마리를 찾아 조사 중이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천면인이 있다면 황후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텐데.”
“신이 천면인을 찾아내어 마마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황제는 계단 아래서 생각에 잠긴 듯 서 있다가 돌연 성큼성큼 위로 올라갔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황급히 길을 터주었다. 추문은 멀리서 황제가 오는 것을 보고 바들바들 떨었다.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수원상은 그 자리에 앉은 채 미동도 없었다.
황제가 방에 들어서니 망토를 입은 수원상이 평온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예를 갖추지도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황제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 아니오. 빨리 털어놓아야 짐이 옛정을 생각해 가문의 체면을 봐줄 것을 잘 알 터인데.”
수원상은 냉소를 지었다.
“폐하와 신첩 사이에 옛정이 있긴 합니까? 신첩, 열여섯의 나이에 시집을 와서 지금 스무 살이 넘었습니다. 합방 한번 못 해 봤는데 옛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신을 품은 뒤에 내쳤다면 짐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게 아니오? 애당초 당신에게 사죄하고자 의남매를 맺어 좋은 이에게 시집을 보내려 했소. 그러나 당신이 고집을 꺾지 않으니,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당신처럼 고집이 센 여인은 처음 보오.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리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소? 초왕 시절에는 당신을 믿고 집안 살림을 맡겼는데 당신은 천범의 목숨을 노렸었지. 그 때문이라도 다시는 믿어선 안 되었는데.
입궁 후엔 당신이 변했다 생각하여 후궁을 맡겼고, 태자를 보내 가르침을 받게 했소. 분수를 잘 지키면 부귀영화는 물론 가문의 위상도 높아졌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민 것이오? 천면인을 이용해 황후를 곤경에 빠트리기나 하고. 볼수록 참 대단하오. 당신의 부친보다 배포가 크니, 사내로 태어났다면 분명 큰일을 했겠소.”
이제껏 묵용감이 수원상에게 한 말 중 가장 긴 말일 터였다. 수원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 백천범이 없었다면 폐하께서 저를 봐주셨을까요?”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천범이가 없었어도 당신을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오. 당신의 마음은 순수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