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9화
묵용린이 대신들을 흘겨봤다.
“어머니를 욕했으니 다들 나쁜 사람들이에요.”
“자초지종을 모르고 나쁜 사람의 꾀에 넘어갔을 뿐이란다. 하지만 다들 좋은 의도에서 그런 거야.”
이윽고 백천범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의 황제가 혼군이라면 어찌 직접 동쪽 교외로 가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성실하게 정무를 보겠습니까. 이렇게 시비를 가리지 않고 황제를 압박하는 것만이 신하의 도리입니까?”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에 대신들은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했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출궁을 꺼렸던 역대 황제와는 달리, 지금의 황제는 직접 동쪽으로 나가 홍수를 막기 위해 힘썼다. 이런 황제를 어찌 혼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황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태자가 대신들을 훑어보더니 부황의 말투를 따라 했다.
“바보 같은 것들!”
백천범은 태자의 입을 막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멀찍이 서 있던 가동이 얼른 그녀에게 뛰어왔다.
“마마, 절 구해 주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았다.
“태자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다고 쳐도, 대인까지 철부지처럼 구시면 어떡해요? 태자를 내버려 두다니요. 신하를 때리는 일이 재미있단 말이에요?”
가동은 은근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전하께서 군주가 죽으라면 신하는 죽어야 하고, 군주가 신하를 때리면 신하는 맞고 있어야 한다고 그러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맞는 말 같아서 따랐습니다.”
“태자는 아직 군주가 아니에요. 군주는 황제뿐이죠. 황제라 할지라도 신하를 마음대로 벌할 수 없어요. 그럼 다들 실망하지 않겠어요? 이번에는 저도 구해 드릴 수 없겠네요.”
가동은 태자를 힐끔거렸다. 태자는 백천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하품을 했다.
“어머니, 배고파요.”
“그래, 돌아가서 간식을 먹자.”
백천범은 태자를 안고 승덕전으로 향했다.
“…….”
여우 같은 것, 자신이 책임진다더니…….
황제가 무슨 말을 남겼는지는 모르나, 무릎을 꿇고 있던 대신들은 하나둘씩 대전을 떠났다. 그러나 승덕전으로 돌아온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오후가 되자 황제는 남서방에서 상주서를 읽었다. 학평관이 들어와 아뢨다.
“폐하, 백 장군이 뵙기를 청합니다.”
황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중추절 저녁, 백장간은 가짜 무양 공주에게 상처를 받아 사흘에 한 번꼴로 조정에 모습을 비췄다. 며칠 동안 모습을 감출 때도 허다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로 찾아왔단 말인가?
“들라 하라.”
학평관은 대답하고 황제의 말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장간이 들어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손히 예를 갖췄다.
“소인 백장간,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눈을 치켜떴다.
“아주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천범이 남원의 첩자로 혼례 당일 밤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다는데, 맞습니까?”
“자네는 그 말을 믿는가?”
백장간은 잠시 주저하더니 답했다.
“천범은 무양 공주가 된 후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건 폐하를 시해하진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의 무양 공주가 가짜였고, 혼례 당일 밤 짐을 해하려 했다면 어떤가?”
“가짜요?”
백장간은 크게 놀랐지만 그제야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짜였군요. 어쩐지 너무 매정하게 변했다 했습니다. 하면 대신들이 요망한 공주를 죽여야 한다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반대하십니까?”
“그때는 가짜였지만 지금은 진짜인데, 짐이 어찌 찬성하겠는가?”
백장간은 반색하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엄하구나!”
백장간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넉살 좋게 웃었다.
“폐하, 천범이는 어딨습니까? 신이 만나 보고 싶습니다.”
“바빠서 자네를 볼 시간이 없을 걸세. 다른 일이 없거든 물러가게.”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앞에서 백천범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라버니!”
백장간은 가슴이 사납게 날뛰었다. 문 앞엔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단숨에 뛰어갔고, 백천범은 웃으며 달려왔다. 그녀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백장간은 어렸을 때처럼 그녀를 안으려 했다. 서로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그림자 하나가 끼어들더니 백천범을 안았다.
“…….”
황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백천범을 보고 말했다.
“이것 참, 어머니라는 사람이 툭하면 울고. 누가 보면 비웃겠소.”
백천범은 멋쩍은 듯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기뻐서 그래요.”
넋을 놓고 있던 백장간은 황제의 뜻을 이해하고 물러나 예를 갖췄다.
“신 백장간,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이 급히 그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황제가 막아섰다.
“가족 아닌가, 예를 갖출 필요 없네. 앉아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백장간은 황제의 방해에 그녀를 부둥켜안고 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장포를 걷고 자리에 앉은 그는 백천범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중추절에 보았던 가짜 공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드디어 마주한 진짜 백천범은 활짝 핀 얼굴에 부드러운 눈빛을 담고 있었다. 좋고 싫은 표정도 분명했고,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기억 속의 가짜 공주는 차디찬 표정뿐이었다. 그때 그는 백천범이 남원 공주가 되어 동월의 가족에게는 소원하게 대하는 줄만 알았다. 어쨌든 백천범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오라버니, 잘 지내셨어요?”
백천범은 그의 관복에 시선을 주었다.
“장군이 되신 거예요?”
백장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부지게 답했다.
“황상의 보살핌으로 전원정대장군이 되었습니다.”
백천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역시 대단해요.”
그때, 황제가 끼어들었다.
“당신의 큰오라버니시니 짐이 당연히 중시해야지.”
“…….”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장군이 된 것이 다 제 덕이란 소린가.
“그것도 다 능력이 있어야지요. 오라버니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어요. 일찍이 군대에서 경험을 쌓았고요. 예전에 아버지께서 산서 군영에 서신을 보냈는데, 다들 오라버니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칭찬이 자자했었다고요.”
“흠, 젊은 나이에 공을 세우긴 했지요. 몽달국을 공격할 때 동료들이 군신이라고 치켜세웠는데, 사실 저는…….”
“자네가 군신이던 시절, 짐에게 지지 않았나.”
백천범은 황제의 말을 무시하고 기뻐하며 물었다.
“군신이요? 그렇게 대단하니 폐하께서 오라버니를 전원정대장군에 임명하신 거군요.”
황제의 시선이 백천범을 향했다.
“선황제도 짐을 군신으로 명했소, 잊었소?”
백천범은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땐 너무 난폭해서 흉신이라고 명하신 것 아니었어요?”
“…….”
흉신이라는 작위도 있단 말인가?
백장간은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어두운 황제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눈치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폐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지금 임안성은 황제 곁에 있는 요녀를 죽여야 한다는 말로 시끄럽습니다. 이미 이런 내용의 연극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천범이에게 불리해지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문무백관이 폐하를 압박하고 나섰다지요?”
그 말에 황제는 치를 떨었다.
“어리석은 것들!”
백장간이 얼른 말했다.
“자고로 백성은 물이요, 군주는 배라 하였습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폐하께서 백성들에게 해명하지 않으면 수습이 불가할 것 같습니다. 아예 시해 사건을 인정하고 천면인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여 백성의 불안을 잠식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이 잠잠해지면 그때 천범이를 궁으로 다시 데리고 오심이 어떻습니까.”
마지막 한마디에, 황제의 인상이 한없이 구겨졌다.
“천범을 다시 궁으로 데려오다니, 그녀가 어디를 간단 말인가?”
“사태가 심각하니 천범이는 친정에 피신해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폐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마마는 신의 동생이니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호하겠습니다.”
황제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대놓고 황후를 넘보고 있는 게 아닌가. 혈연관계도 아닌 오라버니가 무슨 친정을 논한단 말인가? 사장풍을 보냈더니 백장간이 나타나고 말았다! 연적이 끝도 없이 등장하니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차라리 남쪽 변방 지역을 지키라고 보내 버릴까 싶었다. 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천범이 맞장구를 쳤다.
“오라버니의 생각이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출궁해 있는 동안 민중을 다독여야지, 안 그럼 해결이 어려울 거예요.”
황제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관료들의 압박보다 더 화를 돋우는 말이 아닌가. 그는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 장군, 자네의 뜻은 알겠지만 황후는 여기에 있을 것이네. 짐의 곁에 있어야지! 짐이 부인조차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냥 머리를 박고 죽는 것이 낫네!”
백장간은 황제가 분노 앞에서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노여워 마십시오. 신은 그저 의논을 하기 위해 황상께 제안을 드린 것뿐입니다.”
“의논할 것도 없네. 이만 돌아가게.”
황제가 일어서며 명했다.
“여봐라, 백 장군을 배웅하라.”
백천범이 못내 아쉬워했다.
“오라버니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늘 식사라도 같이 드시고 가세요. 할 얘기가 많…….”
황제는 아예 그녀를 데리고 내전으로 향했다.
“다음에 합시다. 오늘은 날이 아니오.”
백장간은 황제의 질투심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다른 의도는 없었다. 백천범이 궁에서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 자신의 집에 피해 있으라고 했을 뿐인데, 그리 잘못된 것인가?
백천범 역시 황제가 화가 났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화가 난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동생이 오라버니의 집에서 며칠 지내는 일이 화낼 일이란 말인가? 그녀는 황제의 손을 뿌리쳤다.
“오라버니께서는 좋은 의도로 그런 것인데 왜 화를 내요? 잠시 나가 기분 전환도 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황제는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가면 나는 어떡하오? 또 날 버리고 떠나려는 것이오?”
백천범의 눈에는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안 되오. 날 떠날 수 없소. 한 발자국도 말이오.”
그는 너무도 두려웠다. 그녀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한단 말인가?
“왜 이렇게 독단적이에요.”
“어려움이 닥치면 함께 헤쳐나가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사람이 누구요? 서로 믿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또 누구고? 이제 시작인데 날 버리고 가려는 것이오?”
분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소리쳤다.
“게다가 백장간은 친오라버니도 아닌데, 그자의 집에 갔다가 구설에 오르는 것이 두렵지도 않소?”
“아…….”
백천범은 뒤늦게 깨달았다. 남류청에게 친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 남류청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그리하여 그녀도 더는 묻지 않았던 터였다. 사람들은 각자 슬픈 일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사는 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