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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98)화 (597/1,192)

제598화

황제는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가볍게 만지며 한탄했다.

“황제가 되면 아무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다 내 잘못이오. 당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구려.”

백천범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잘하고 있는걸요. 비밀 호위들이 없었으면 정말 잡혀갔을 거예요.”

황제는 희미한 불빛에 비친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천범, 많이 컸구려. 이전보다 강해졌소.”

백천범은 가볍게 웃었다.

“맞아요. 예전에는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규율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여전히 작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보호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녀의 변화가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머리를 숙여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춘 그가 탄식을 내뱉었다.

“황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정한 곳이오.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서로 속고 속이는 게 일상이지. 황제는 그런 궁에서도 가장 외로운 존재요. 후궁이 여인들로 가득 차도 연정을 품어서는 안 되오. 하지만 우리는 역대 황제, 황후들과는 다를 것이오.

당신이 있기에 짐은 사랑을 알았소. 지금 이 궁은 생기로 넘치고 있소. 천범, 우리가 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지만 날 믿어 주시오. 나도 당신을 믿을 테니. 서로 믿음이 있어야 모든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오.”

백천범은 그와 손을 맞잡았다.

“전 당신 곁에 계속 있을 거예요. 우리 같이 헤쳐 나가요. 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요.”

황제가 가볍게 웃었다.

“어떤 때는 나보다 강한 것 같소.”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가동이 또 린아를 데리고 출궁했소?”

“네, 하천 둑에 가서 용대두龙抬头(용이 머리를 드는 것)를 본다고 나갔어요. 린아가 없어서 다행이었죠. 어린 나이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황제가 불만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가동은 생각이 있는 것이오? 무슨 용대두를 본다고 위험한 곳에 태자를 데리고 가다니, 홍수에 쓸려 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가동 말로는 많은 이들이 보러 간대요. 걱정 마요. 당신만큼 린아를 걱정하니까요. 게다가 그렇게 많은 암위暗衛들이 따라가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아이가 없으니 다른 아이를 자식으로 삼으려고 하는군.”

아이 얘기가 나오자 백천범은 걱정이 앞섰다.

“혼례를 올린 지 오랜데 소식이 없으니 녹하가 여러 의원을 찾아갔나 봐요. 그래도 원인을 모르니 정말 걱정이에요. 린아가 옆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죠. 옆에 아이가 있으면 회임할 가능성도 커진대요. 어쩌면 린아 덕분에 아이가 생길지도 모르죠.”

황제는 또 코웃음을 쳤다.

“가동 이 녀석, 아주 대단한 인물 나셨군.”

백천범은 웃으며 그를 놀렸다.

“당신이 가동을 린아의 사부로 명했잖아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저리 좋은데 왜 질투를 해요.”

“그 바보 같은 놈이 자꾸 당신의 스승을 자청하지 않소. 그렇게 따지면 내 스승이 되는 게 아니오? 꿈 깨라지, 스승이 되고 싶어 안달이니 짐이 직접 정해 준 것이오. 더는 헛소리하지 못하게 말이오.”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생각이시란 거 다 알고 있었어요. 린아도 가 대인을 좋아하니 영구보다는 낫겠죠.”

백천범은 황제가 잘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슬쩍 물었다.

“그 일은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원칙대로 해야지. 누구든 잘못이 있으면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오.”

이번 일을 풀어보면 사실 복잡하진 않았다. 수원상은 여옥과 백천범을 바꿔치기했고 혼례 당일 밤 일어난 일을 밝혔지만 천면인의 존재는 숨겼다. 여주의 죽음은 천면인을 숨기기 위함이겠지. 그러나 아무리 일을 덮은다 한들 수원상은 결국 책임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다만 혼례 날의 일이 새어 나간 경위와 퍼트린 자를 밝혀야 했다. 동시에 여옥도 찾아야 이 일이 끝나리라.

다음 날,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남원의 첩자 무양 공주를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격노한 황제는 의자 팔걸이를 내리쳤다. 모두의 뺨을 쳐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신하들의 얼굴에는 한 점 두려움도 없었다. 후궁을 들이라고 압박할 때보다 더 강경하게 맞섰다.

언관뿐만 아니라 모든 문무 관료들이 한목소리로 처단을 외쳤다. 그들은 군주 곁의간신을 몰아내고 군주의 근심을 덜어내는 게 신하의 도리라고 여겼다. 군주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로써 신하로서의 충심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죽더라도 역사에 길이 남아 후대의 추앙을 받을 테니.

황제의 화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백천범을 죽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신들을 죽일 수도 없었다. 지금의 기세라면, 한두 명 죽이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모두를 죽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심란해진 황제가 퇴조를 명했지만 일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격분하며 자리를 떴다. 무릎을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 얼마나 가나 지켜보면 될 일이다.

서 태후는 자안궁에 갇혔고, 경수궁은 병사들로 포위되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건만, 대신들의 방해로 일이 까다롭게 되어 버렸다.

황제가 승덕전에 돌아왔을 때 백천범은 묵용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어두운 안색을 알아차리고 가동에게 태자를 데리고 놀라고 분부했다.

“왜요? 일이 순조롭지 않아요?”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커져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졌소. 그래도 짐이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걱정 마시오.”

“사실 다 들었어요. 린아를 데리고 잠시 밖에 나갔는데 대신들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더라고요.”

“무엇을 들었소?”

“군주 곁의 간신을 몰아내고 요녀를 처단하라.”

“다 헛소리요!”

황제가 이를 갈았다.

“누가 헛소문을 퍼뜨렸는지, 찾아내면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오.”

* * *

가동은 묵용린을 데리고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잔뜩 풀이 죽은 태자는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전하, 출궁해서 나가 놀까요? 제가 과일 꼬치를 사 드릴게요.”

묵용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데도 안 갈래요. 이제 제가 어머니를 지켜 드려야 해요.”

어제 일은 가동도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묵용린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께서 어찌 아셨습니까? 아닙니다. 누가 감히 황후 마마를 괴롭히겠습니까?”

“아침에 총관리와 소복자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또, 대신들이 소리치는 것도 들었고요. 제가 어리다고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여기지 마세요. 어머니를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제 목숨을 걸고 처단할 거예요.”

“폐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마마를 보호해 주실 겁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저는 어머니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이 세상에서 제가 어머니와 제일 가까운 사이예요. 아버지는 비교도 안 되죠.”

태자는 주머니 속 유리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앞쪽으로 가요.”

“앞에 가서 무엇을 하시려고요?”

“나만 따라와요.”

묵용린이 그를 흘겨보더니 다부지게 말했다.

“왜요? 못하겠어요? 뭐가 두려워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져요.”

“…….”

아직 꼬맹이가 책임은 무슨. 사고 칠 때마다 내가 다 책임졌지.

* * *

황제는 대신들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신들은 누구도 대전을 떠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였다.

반 시진마다 시위가 보고를 해 왔지만,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우물쭈물하며 더듬거렸다.

“다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음, 대인 두 명은, 음,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순간 당황했다.

“금란전에서 습격을 받았다고? 누구 짓이냐?”

시위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간도 큰 게 누구겠어요. 린아 말고 더 있겠어요?”

“허, 조그만 것이 아비를 번거롭게 하려고 작정을 했군.”

황제는 분노하며 밖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묵용린이 사고를 친 셈이다. 백천범은 얼른 그를 쫓아갔다.

상보대전에 이르니 대신들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제가 나갈 때만 해도 침착했던 이들은 무슨 일인지 두리번거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몇몇은 이마를 문지르거나 어깨를 문지르면서 고통스러워했고, 간간이 원망의 말이 들려왔다.

황제는 묵용린을 찾기 위해 대전 밖을 수색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가동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묵용린의 짓이 틀림없었다. 묵용린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한창 찾고 있는데 대전에서 또 나지막한 비명이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둘러보니 언제 올라간 건지 태자가 단폐에 있었다. 태자는 옥좌에 숨어 몸을 낮춘 채 머리만 절반쯤 내놓고 있었다. 황제는 문 앞에 조용히 섰다. 잠시 후, 태자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유리구슬을 장착한 새총을 꺼내 대신들을 겨냥했다. 곧 ‘슉’ 하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날아와 한 대신의 이마를 맞췄다.

황제가 준엄하게 소리쳤다.

“그만, 내려오거라!”

묵용린은 황제를 보더니 단폐에서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사부님, 잡아 주세요.”

숨어 있던 가동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뛰쳐나와 태자를 받았고, 둘은 각자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가동은 대전 밖으로 나갔고 태자는 꾀를 내어 대신들을 방패 삼아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부자가 대신들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 정신이 혼미해진 대신들은 황제와 태자가 주위를 빙빙 도니 어지럼증이 났다. 두 바퀴를 돈 끝에, 황제는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뛰어올라 묵용린을 잡았다.

“어디로 도망갈 수 있나 보자. 말해 보거라. 왜 이리 한 것이냐?”

묵용린은 작은 머리를 들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를 욕했으니 때린 것입니다. 부황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니 소자가 나서야지요.”

놀란 황제는 태자를 내려놓고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들었느냐? 이 작은 아이도 어미를 보호할 줄 아는데, 부군인 짐이 부인을 보호하지 못하면 황제는 해서 무엇 하겠느냐!”

황제의 추상 같은 말에 대신들은 바로 엎드렸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황상. 황공하옵니다!”

“짐이 명군인지 여인에게 홀린 혼군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사건의 정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부인을 죽이라고 압박하다니! 짐과 태자의 기분을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묵용린은 분한 마음이 들어 다시 새총을 들었다. 황제가 태자의 손을 막으며 낮게 호통쳤다.

“일을 더 키우고 싶은 것이냐?”

문 앞에 계속 서 있던 백천범이 들어와 묵용린의 손을 잡았다.

“린아, 여기는 부황께 맡기고 어머니와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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