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97)화 (596/1,192)

제597화

서 태후는 기고만장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 삿대질을 했다.

“보세요. 이 무슨 망언입니까? 황제가 얼마나 영민한데 쉽게 당하겠느냐? 요망한 것, 어서 잘못을 시인하거라!”

‘요망한’이라는 말에 월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도 백천범을 향해 했던 말이지만, 막상 서 태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울컥 화가 솟구쳤다.

“태후 노불야, 폐하께서 궁에 계시지 않으니 이렇게 격분하시어 이곳을 찾으신 게 아니십니까? 폐하께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다.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아시면 어찌하실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엄하구나. 궁녀 주제에 애가를 비난하다니. 여봐라, 뺨을 쳐라!”

서 태후 뒤에 있던 마마가 앞으로 나오자 백천범이 월규를 지키듯 막아섰다.

“저의 허락이 있어야 월규를 때릴 수 있습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서 태후의 화를 부채질했다. 황후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일개 궁녀를 어찌하지 못할까? 서 태후는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게야. 저 궁녀를 장살杖殺(매질하여 죽임)하라!”

서 태후와 함께 온 이들은 백천범을 건드리지는 못했지만 월규는 문제없었다. 그들이 움직이려던 찰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들을 막아섰다.

“어명이요.”

자신 때문에 백천범까지 위험해진 것 같아 월규가 후회하던 찰나, 영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백천범과 서 태후 사이에서 난처했던 몇몇 친왕은 어명이라는 말에 즉시 답했다.

“어서 어명을 전하시오.”

영구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전했다.

“황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구족을 멸하겠다. 죽는 게 두렵지 않거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전하라.”

서 태후는 몸서리쳤다. 황제가 저리 직설적으로 내뱉었다면,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구족을 멸한다는 말에는 분노가 일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기에 구족을 멸하면 황제도 죽는 것 아닌가. 정말 제대로 홀린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두면 그 누구도 평온할 수 없으리라. 서 태후가 호통을 쳤다.

“이것이 폐하의 어명이 맞느냐? 증거도 없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영구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믿든 안 믿든 결과는 같습니다.”

서 태후가 영구의 말을 곱씹고 있는데 이번엔 학평관이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엔 황색 성지가 들려 있었다.

“황명이오! 모두 황제의 명을 받들라.”

서 태후와 백천범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학평관이 성지를 펼쳐 읽었다.

“천명을 받들어 천자가 조서를 발포하니, 황후 백씨는 짐과 결발부부의 연을 맺은 짐의 가장 소중한 부인이다. 백씨를 모욕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길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모두를 경악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두 개의 어명은 비슷한 내용과 감정을 담고 있었다. 구두 어명에서는 황제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성지에는 보다 순화되었지만 여전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백천범은 ‘소중한 부인’이라는 말에 얼굴을 붉힌 반면, 다른 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말에 몸을 떨었다.

급히 내려앉은 정적에 미세한 소리마저 크게 울리는 순간이었다. 몇몇 친왕은 두려움에 서로를 바라봤고, 노친왕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노불야, 이 일은 폐하가 오신 후에 다시 결정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서 태후는 지금 물러날 수 없었다. 조급해진 그녀는 친왕을 잡고 나섰다.

“여기 계신 이들은 폐하의 숙부가 아닙니까? 황제가 저 요망한 계집에게 휘둘리는 것을 보고만 계실 겁니까? 폐하는 만백성의 존경을 받는 동월국의 희망입니다. 저 요망한 것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동월국에 재앙이 닥칠 것이란 말입니다!”

궁 밖엔 여전히 비바람이 휘몰아쳤지만, 굳은 듯이 서 있는 병사들을 움직일 순 없었다. 빗줄기는 점차 가늘어져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잦아드는 빗소리를 뚫고, 문밖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후께서는 누구를 요망하다고 하는 겁니까?”

비에 푹 젖은 황제에게서는 오싹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흠칫 몸을 떠는 와중에도, 황제의 시선은 백천범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한 후에야 한시름 놓았다. 영구를 보내긴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터였다. 제방의 수위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내려가자마자 곧장 궁으로 달려온 그였다.

서 태후는 의자에 앉아서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혐오로 가득 찬 눈으로 서 태후를 마주했다.

“여봐라, 태후를 자안궁으로 모셔라! 태후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자안궁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보살피거라.”

황제의 말은 금족령과 다름없었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사색이 된 서 태후가 중얼거렸다.

“감아, 애가는 너를 위해 그러한 것인데 어찌 몰라준단 말이냐?”

“그렇습니까? 매번 짐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저를 처참하게 만드셨습니다.”

황제는 미소는 싸늘하기만 했다.

“도대체 천범의 어디가 맘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다.”

서 태후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애가도 마음을 고쳐먹고 황후와 잘 지내려고 했단다. 부부가 서로 은애하니, 후궁이 무용지물이 된다 한들 아이만 몇 명 더 낳으면 족한 일이지. 하지만 황후는 남원의 첩자이고, 대혼 당일 밤 널 시해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이자를 네 곁에 둔 채론 애가는 잠을 이룰 수도, 음식을 넘길 수도 없다. 널 해치려 하는데 애가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넌 동월국의 황제일 뿐 아니라 애가의 유일한 혈육이다. 널 위해서라면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말을 하면 할수록, 서 태후는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마저도 듣고 싶지 않은 듯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태후를 모시거라.”

이윽고 황제의 매서운 시선이 몇몇 친왕에게 향했다.

“숙부님들은 짐이 직접 배웅을 해드릴까요?”

“아닙니다. 신은 물러나겠습니다.”

친왕 무리는 예를 갖춘 후 급히 물러났다.

대리시경은 사태가 불리해졌음을 깨닫고 급히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황제가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매섭게 호통쳤다.

“여봐라, 이자를 대리시로 압송하라! 짐이 직접 심문하겠다!”

바닥을 나뒹굴던 대리시경은 부하의 손에 끌려나갔다. 올 때는 위풍당당한 일품 관리 대리시경이었는데, 갈 때는 어찌하여 죄인이 된 것인가? 그는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울부짖었다.

“폐하, 억울하옵니다. 폐하,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일을 망치는 것들은 시야에도 담기 싫었다.

온몸이 푹 젖은 학평관은 추위에 떨다, 상황을 보고 급히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십시오. 젖은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고뿔에 걸리십니다.”

그는 학평관을 무시한 채 내전으로 향하는 백천범을 뒤따랐다. 백천범이 푹신한 의자에 등을 돌리고 앉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부인, 억울하게 해서 미안하오. 이런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못 했소. 화가 나거든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나에게 푸시오. 그대도 알지 않소. 제방을 두고 떠날 수 없으니 불 위에 놓인 사람처럼 괴로웠소. 할 수만 있다면, 날개를 달아 날아가고픈 마음뿐이었소…….”

그는 백천범의 얼굴을 조심히 만졌다. 그러나 보드라운 감촉만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녀를 돌려세워 보니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황제가 눈을 깜박였다.

“부인, 이 무슨……?”

백천범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까 그 성지, 저한테 주실 수 있으세요?”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성지는 왜 달라는 것이오?”

“저는 지금까지 황제가 성지에 ‘소중한 사람’이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니까 그런 말을 쓰죠.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도 안 돼요?”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이 짐의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짐은 똑같이 말했을 것이오.”

백천범은 수줍어하며 그를 밖으로 밀었다.

“당신은 그렇다 쳐도 전 부끄러운걸요. 어서 목욕부터 하세요. 몸이 흠뻑 젖었잖아요. 저도 좀 씻어야겠으니 월규에게 물을 받으라고…….”

황제는 팔을 들어 단숨에 그녀를 안았다.

“물을 왜 받소. 목간통에 이미 있지 않소. 같이 합시다.”

백천범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줄 알고요? 안 돼요. 전 따로 할 거예요.”

황제는 억울한 표정을 보였다.

“당신은 어째 그쪽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오. 부부가 같이 목욕하는 것이 어떻다고, 다른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일까. 백천범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진짜 다른 생각 안 했어요?”

“정말 안 했소.”

황제는 자신 있게 말했다. 백천범은 믿지 않았지만, 더 실랑이를 벌이다 그가 병이라도 들까 봐 그만뒀다.

목간통에 도착하자 황제는 다른 이들을 물렀다. 백천범이 멀리 떨어져 옷을 벗는데 황제가 불쑥 다가와 그녀의 요대를 풀었다. 겉옷, 겹옷, 속옷, 두두가 차례차례 바닥으로 떨어졌고, 황제는 그녀를 안아 물속에 앉혔다. 그녀에게 벽을 보게 한 후, 수건에 향정유를 묻혀 세심히 몸을 닦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등 위에서 원을 그렸고, 조금 거친 손끝이 피부를 쓸었다. 그녀의 마음을 미세하게 흔드는 손길이었다. 믿음을 저버릴 줄 알았던 황제는, 정성껏 그녀의 등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씻겠다고 했지만, 황제에게 가로막혔다.

“오늘 짐이 그대의 시중을 들겠소.”

그녀는 몰래 그를 관찰했다. 눈에서는 불씨가 활활 타올랐지만 표정은 더없이 경건했다. 그는 더없이 섬세하게 그녀를 닦아 주었다. 어렸을 적 유모가 씻겨준 것보다 더 세심했다.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진 백천범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정작 황제는 자신의 몸을 얼른 씻어 낼 뿐이었다. 이내 천으로 그녀를 감싸 안은 뒤 함께 침전으로 향했다. 그가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잘 참는 모습이 새로웠다. 백천범이 주저하다 입술을 떼었다.

“그게, 당신이, 하고 싶으면, 사실, 괜찮아요.”

황제가 그녀를 안고 걸을 때마다 무언가가 그녀를 찔렀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이렇게까지 참는 게 안쓰러울 정도였다.

황제는 묵묵히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대충 닦은 황제가 그녀의 옆에 누웠다.

젖은 머리칼이 그녀의 어깨에 쏟아졌다. 백천범은 단단하게 굳은 그의 몸이 점차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황제가 노곤한 피로에 잠겨 있기에, 그녀 또한 잠이 솔솔 쏟아졌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 그의 목소리가 스쳤다.

“부인, 미안하오. 고생이 많았소.”

백천범은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몸을 돌려 황제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순히 대리시로 갔다면 고문을 당했으리라. 궁의 잔혹함과 매정함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오직 손익만이 남았다. 이익이 충돌하면 사생결단을 내려고 드는 곳이 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