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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96)화 (595/1,192)

제596화

초겨울, 보기 드문 함박눈이 여러 차례 내렸다. 지하수가 역류했고, 동쪽 교외에 있는 저수지 부근에 산사태가 일어나 사상자가 속출했다.

격노한 황제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직접 시찰에 나섰다. 그는 폭우가 내리는 제방에서 며칠을 머물며, 허물어진 곳을 막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동쪽 교외 지역은 고지대인 만큼, 홍수가 나면 끔찍한 재앙이 될 터였다.

그렇게 동쪽 교외 지역에 머무르는 동안, 황제는 백천범이 어떤 상황에 직면할지 예상치 못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경악할 소문이 궁에 번지며, 백천범을 사면초가로 몰아갔다.

소문의 내용은 이랬다. 남원의 첩자인 황후는 혼례 날 황제를 시해하려 했지만 실패하여 서화궁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미인계로 황제를 유혹해 곁에 머물게 되었고, 첩자에게 푹 빠진 황제는 궁의 규율까지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 태후는 소문을 듣자마자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쳤다.

“역시나 그랬었군요.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혼례 다음 날 어찌 황후에게 금족령을 내리나 했더니만. 무양 공주는 무슨, 남원의 첩자로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니, 어찌 이런 사달이! 여봐라, 대리시에 말해 당장 황후를 잡아들이라 이르거라!”

수원상이 차분하게 태후를 말렸다.

“노불야, 화를 가라앉히세요. 그러다 옥체가 상하십니다. 폐하가 오시면 그때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 될 말이에요.”

다른 것은 몰라도 아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서 태후가 황유도에게 일렀다.

“애가의 명이니 황후를 잡아 가둬라. 황제가 어리석게 굴어도 애가는 그럴 수 없지. 첩자가 매일 황제 곁에 머물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숙비가 옆에서 화를 돋우었다.

“노불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더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폐하께서 황후를 얼마나 은애하시는지는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황후가 목숨을 노려도 폐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니 황제께서 돌아오시면 황후는 믿는 구석이 있어 더 날뛸 것입니다. 노불야께서 어서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서 태후는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온 적이 없었다. 황제의 안위가 직결되니 절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대리시를 통해 황후를 잡으려는 것도 태후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궁 내 시위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태후의 말을 거역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새로 부임한 대리시경은 태후의 조카이니 그녀의 뜻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우선 사람을 잡아들이고 종친을 통해 속전속결로 해결하면 황제가 왔을 때는 이미 늦을 터였다. 격노한 황제가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아니라 후대를 위해 살기로 했다. 그들이 평안할 수 있다면 악역을 자처할 수 있었다.

폭우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굵은 물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승덕전 앞에서는 백천범을 지키는 시위와 대리시의 위사尉士가 대치 중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되자, 서 태후의 가마가 도착하였다. 그녀는 황제가 이렇게 많은 병사를 비밀스레 배치해 놓았을지는 정말 예상치 못했다. 언뜻 보아도 대리시가 열세에 처해 있었다.

서 태후는 태감이 든 우산 아래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시위들은 감히 막지 못하고 길을 터주었다. 다가오는 서 태후를 향해, 백천범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황후.”

서 태후가 그녀의 앞에 섰다.

“애가가 하나만 묻고 싶어 이리 왔어요. 남원의 첩자가 맞나요?”

“아니요.”

“어찌하여 혼례 당일 밤 황제를 시해하려 한 것이지요?”

“그건 제가 아닙니다.”

“황제와 혼례를 올린 사람은 황후뿐인데, 황후가 아니라면 누가 있단 말입니까?”

“천면인입니다.”

서 태후는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천면인이요? 천면인이 누굽니까?”

“누군가가 저로 변장해서 황제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그자가 천면입니다.”

“그래요? 그 천면인은 지금 어디 있지요?”

“양비에게 잡혀 있습니다.”

“갑자기 양비는 왜 끌어들이는 겁니까? 양비가 사람을 시켜 황제를 시해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아니요. 양비는 저와 서화궁의 천면인을 바꿔치기했습니다. 그 바람에 천면인은 지금 양비의 수중에 있습니다.”

“양비가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단 말입니까?”

백천범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건 양비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서 태후는 격노했다.

“헛소리 집어치우세요. 양비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것 다 알고 있으니. 둘 사이에 원한이 있음을 애가가 모를 줄 알고? 이번 일은 남원이 동월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한 게 아닙니까. 양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어쩐지, 그래서 그간 린아를 방임하고, 승덕전에서 지냈던 것이군요. 그래야 기회가 많아질 테니까?”

“제 말은 다 사실입니다. 태후 마마께서 못 믿으신다면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죄를 시인하지 않겠다면 애가도 방법이 있어요. 감옥에 가면 입을 열게 되겠지요.”

“제가 왜 감옥에 가야 하나요? 잘못한 일도 없는데.”

백천범은 빗속에서 대치 중인 병사들의 형세를 힐끗 살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불리하시니 싸움이 나더라도 태후 마마 쪽이 피해를 볼 것 같군요.”

“정말 뻔뻔하군. 이렇게 오만방자하다니!”

그녀를 가리키는 서 태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가 적다면, 기다리거라. 애가가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도록 하지. 이 승덕전을 피로 물들이는 한이 있어도 애가가……!”

흥분한 서 태후가 마구 말을 쏟아냈다. 옆에 있던 노친왕이 급히 그녀를 말렸다.

“태후 마마, 진정하십시오. 우선 오해가 없도록 진상을 정확히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서 태후가 백천범을 노려보았다.

“내 하나만 묻지. 대혼 당일 밤, 누군가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게 사실인가?”

“네.”

“보시게, 제 입으로 시인을 하지 않는가?”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니니 제가 시인했다고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하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천면인이요.”

“천면인이 어디에 있는데?”

“양비에게 잡혀 있습니다.”

옆에 있던 대리시경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백천범에게 물었다.

“감히 마마께 여쭙습니다. 천면인이 양비에게 잡혀 있다는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서화궁의 여주가 증명해 줄 거예요. 내막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서화궁의 여주를 불러오지요.”

이 시간에 백천범을 잡으려고 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녹하, 기홍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고, 가동은 태자를 데리고 출궁했다. 영구와 학평관은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백천범의 곁에는 월규만이 있었다. 더욱이 궁 문은 이미 닫혔으니, 황제에게 소식을 전할 이는 없었다.

원래는 황제가 돌아오기 전에 해결하려고 했다. 대리시와 종인부에 태후까지 합세하면, 황제가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모두를 죽이려 들지는 않을 테니.

다만 황제가 이렇게 많은 호위 무사를 남겨놓고 갔을 줄은 몰랐다. 그들만 아니었다면 백천범과 이리 대치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서 태후는 한 가지 사실을 놓쳤다. 새로 온 소태감, 사희가 아주 영민하다는 점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는 황제의 요패를 들고 궁문을 빠져나와 동쪽 교외로 소식을 전하러 갔다.

사희는 파란 덮개를 씌운 작은 마차를 타고 폭풍우 속을 내달렸다. 비에 쫄딱 젖은 사희가 나타나자 황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난 것이냐?”

사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정황을 얘기했다. 그 보고를 듣자마자 황제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가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젠장, 짐이 자리만 비우면 사달이 나는구나. 짐에게 대항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정녕 짐이 잘사는 꼴을 못 보겠단 말인가!”

제방은 현재 가장 위험한 상태였다. 때를 놓쳐 무너지면 논밭을 뒤덮을 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가 막심할 터였다. 다급해진 황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보다 차분한 영구가 넌지시 말했다.

“폐하, 마마 곁을 지키는 호위 부대는 신이 엄선한 정예 부대입니다. 대리시의 위사들은 적수가 되지 못하지요. 폐하께서 자리를 뜨지 못하시면 신이 가보겠습니다.”

황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호위 부대가 백천범을 안전하게 지켜 주겠지만, 그녀를 직접 봐야만 마음이 놓이리라. 그녀 홀로 싸워야 하는 이 상황이, 그는 미안할 따름이었다.

“가서 짐의 명을 전하거라.”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구족을 멸하겠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거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전하거라.”

“네. 그럼 신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도롱이를 입은 영구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황제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질 않아 막사에서 성지圣旨(황제의 뜻을 담은 문서)를 써 학평관에게 건넸다.

“사희는 여기에 남도록 하고 소복자를 데리고 궁으로 가거라. 성지를 짐과 동일시해라. 짐도 속히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학평관은 지체할 겨를 없이 소복자를 데리고 급히 가마에 올랐다.

* * *

승덕전에서는 백천범, 서 태후, 몇 명의 친왕과 대리시경이 조용히 앉아 여주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화궁에 보냈던 위사는 홀로 돌아왔다. 막상 가 보니 여주는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을 거둔 상태였다는 것이다. 놀란 백천범이 벌떡 일어났다.

“죽었다고요? 대체 언제 그리되었단 말입니까?”

서 태후는 냉소를 지었다.

“네가 한 짓이 아니더냐? 남원 사람들은 멀리서도 사람을 죽이는 술수를 쓴다고 하던데.”

백천범이 그녀를 보더니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서 태후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하는 짓이냐?”

“그런 능력이 있는지 해 보려 합니다.”

월규는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었다. 서 태후를 놀라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정말 노망이라도 들었는지, 어디서 중상모략을 듣고 와서는 황후를 죽이려 하니 말이다. 황제가 없어도 황후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건만. 노친왕이 얼굴을 굳혔다.

“궁에서 살인이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상을 파헤쳐야지요.”

대리시경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어찌 됐든 황후 마마께서는 이번 일과 관련이 있으시니 신과 함께 가시지요.”

그러나 백천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는 폐하를 시해하려 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수적으로 불리하시니 저의 무례를 용서하셔야죠.”

백천범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어리석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다들 바보 천치란 말입니까? 매일 폐하와 함께 지냈는데, 시해할 생각이었으면 이미 여러 번 시도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무엇 하러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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