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95)화 (594/1,192)

제595화

“신첩이 궁에서 달렸던 것은 린아와 달리기 시합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무에 오른 것은요?”

“나무에 오르는 기술을 린아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신첩은 어렸을 때부터 나무를 잘 탔거든요. 린아도 지금 나무를 아주 잘 타게 되었습니다.”

서 태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백성이라 해도 어머니가 아들에게 나무 오르는 법을 가르치진 않지요. 린아가 다치면 어쩌려고요.”

“가 대인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떨어지면 가 대인이 받을 것이니까요.”

“…….”

이렇게 천하 태평하다니, 정녕 친모가 맞단 말인가?

비빈들은 조용히 속삭였다. 황후가 고분고분 훈계를 들을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서 태후의 말에 토를 달고 있었다. 비빈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수원상만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겉모습만 백천범을 닮은 게 아니었다. 행동과 성격까지 백천범과 판박이였다. 서 태후는 헛기침을 하며 냉정해지려 노력했다.

“그리고 또, 가 대인이 태자를 집에 데려간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폐하께서는 한 번 믿은 자는 의심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자는 애당초 믿지 말라 하셨습니다. 린아를 가 대인에게 맡긴 이상, 그를 믿어야 하지요. 가 대인은 제 스승이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해도 무공이 뛰어나고 중요한 일에는 일 처리가 확실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오랜 시간 동안 폐하께서 가 대인을 옆에 두시지 않았을 겁니다.”

서 태후는 할 말을 잃었다. 친부모가 이리 나오는데 할미인 자신이 괜히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 쓰는 자신만 괴롭지. 서 태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은 정무로 바쁘셔서 다른 일은 돌보기가 어려워요. 그러니 황후께서 린아를 각별하게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됐든 린아는 태자이니 향후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이 아닙니까? 다른 아이들과 달리 궁의 규율로 살아야 합니다.

우선 호칭부터 바꿔야겠어요. 백성들처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 될 일이지요. 부황, 모후라고 부르게 하세요.”

서 태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클수록 더 제멋대로이니.”

백천범은 공손히 알겠다고 답했다. 피곤했던 서 태후는 영 마마를 잡고 일어섰다.

“모두 돌아가세요. 애가는 쉬어야겠어요. 나이가 드니 조금만 말을 해도 피곤하군요.”

비빈들은 서 태후가 침전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밖으로 나갔다.

자안궁에서 나온 백천범이 가마를 타려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황후 마마, 잠시만요.”

돌아보니 수원상이었다. 그녀는 백천범 곁의 궁녀를 쳐다보았다.

“소첩, 황후 마마와 둘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백천범 역시 할 얘기가 있었기에 주위를 물렸다. 월규는 불안한 마음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백천범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아. 싸운다 한들 내 적수도 안 되니까.”

월규도 백천범이 무탈할 것은 알았다. 황제가 은밀히 보낸 호위 무사만 몇 명인가. 수원상이 이상한 낌새만 보여도 호위 무사들의 칼이 번뜩일 터였다. 그렇게 단둘이 남게 되자 백천범이 수원상을 마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수원상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완의국浣衣局의 여대쌍인가?”

“제가 누구인지 아실 텐데요.”

백천범은 태연하게 웃었다.

“저에게 황후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대쌍이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사는 거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언제든 황후를 바꾸세요.”

수원상은 혼란스러웠다.

“돌아가고 싶은 건가?”

“돌아가도 상관은 없어요. 황후가 되어 보니 별로더라고요. 방금 들으셨잖아요. 태후는 절 못마땅하게 여기시고요. 이곳은 지켜야 할 규율도 많아 힘드네요.”

“하지만 폐하께서…….”

“황후를 바꿔도 모르실걸요.”

수원상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정말 돌아가고 싶은 것이냐?”

“상관없어요. 안 바꿔 주시면 계속 황후로 지내야죠. 폐하께서 총애하시고 태자도 절 좋아하죠. 곁에서 시중드는 이도 있고, 나름 괜찮아요.”

수원상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 보고 알려 주겠다.”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다만 빨리 결정하셔야 할 거예요. 폐하께서 너무 잘해 주셔서 제 욕심이 더 커질지도 모르니까요.”

수원상은 거들먹거리는 그녀를 무섭게 쏘아본 후 걸음을 옮겼다.

수원상이 궁으로 돌아오자 숙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숙비는 그녀를 보더니 급히 일어나 말했다.

“알아냈습니다.”

수원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눈짓을 보내자 추문이 급히 다른 이들을 물렸다.

“어서 말해 보세요. 어찌 된 일입니까?”

숙비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수원상의 얼굴은 창백하게 물들었다. 마지막엔 입을 닫지 못한 채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었다. 진짜 황후를 가짜 황후와 바꿔치기하고 말았다. 자신이 진짜 백천범을 황제의 곁에 보내다니! 분노에 못 이긴 수원상이 탁자 위의 물건들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추문과 숙비가 놀라 몸을 웅크렸다.

“마마.”

추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말렸다.

“우리 수중에 있는 자가 천면인이라 하여도 여대쌍은 진짜 황후가 될 수 없어요.”

숙비는 바꿔치기한 일을 모르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황후라니, 무슨 말이에요?”

같은 배를 탔으니 수원상도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수원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본궁의 잘못입니다. 그저 태자만 원한 것인데, 진짜 황후를 부자에게 보냈으니.”

추문이 화들짝 놀랐다.

“마마의 말씀은 여대쌍이 진짜 백천범이라는 거예요?”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수원상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백천범이 아니면 폐하께서 그리 대하시겠느냐?”

추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것이 어찌 된… 백천범이 어찌 완의국에서 여대쌍으로…….”

증오가 절로 일었다. 수원상의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여대쌍이 백천범인 줄 알았다면 본궁은…….”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을 터였다. 다 이겨 놓은 바둑판을 스스로 엎은 꼴이었다. 스스로를 명석하다 여겼건만, 백천범에게 놀아났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까! 모든 정황을 이해한 숙비는 수원상이 원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수원상은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며 이를 갈았다.

“천면인을 원한다면 본궁이 영원히 천면인을 못 만나게 해 주어야지요.”

“하지만 천면인이 사라지면 쓸 수 있는 패가 없습니다.”

문득 수원상이 시선을 돌려 숙비를 바라보았다.

“숙비가 한 말, 믿어도 되는 것이지요? 틀림없겠지요?”

숙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셔도 됩니다.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제 오라버니도 말해 주지 않으려 했지만, 제가 머리를 써 겨우 얻어낸 정보입니다.”

“어떻게 알아낸 것입니까?”

별안간 숙비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우물쭈물했다.

“그건, 묻지 마셔요. 아무튼 오라버니가 맹세한 것이니 거짓일 리 없습니다.”

“좋아요.”

수원상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 일을 궁뿐만 아니라 궁 밖까지 다 퍼뜨려야 해요. 하지만 천면인은 없고 무양 공주만 존재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숙비는 머리가 그런대로 잘 돌아갔기에 눈을 반짝였다.

“알겠어요. 천면인의 존재가 없다면, 혼례 당일 황제를 시해하려 한 사람은 황후뿐이겠군요. 황후는 남원에서 보낸 첩자이고요.”

추문이 수원상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마마,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렇게 되면 황제도 백천범을 감싸긴 힘들 것이에요.”

“어서 실행에 옮기도록 해요. 질질 끌다가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잖아요.”

수원상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급할 것 없어요. 기회를 기다려야 하죠. 백천범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말이에요.”

* * *

조회를 마치고 승덕전으로 돌아온 황제에게는 황당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천범이 자안궁에 갔다는 게 아닌가. 그는 학평관에게 급히 명했다.

“어서, 자안궁으로 가자.”

그때 백천범은 이미 승덕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는 가마에 탄 그녀를 안고 처소로 들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내려 주세요.”

백천범이 발버둥을 쳤다.

“저도 다리가 있어요.”

황제가 폭신한 의자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태후께서 무슨 일로 부르신 것이오? 꾸짖으셨소?”

“아니에요. 제가 혼자 적적해할까 봐 얘기라도 나누시려고 부르신 거예요.”

황제는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짐이 있는데 외롭소?”

“외롭지 않아요.”

백천범은 일부러 장난을 쳤다.

“기홍, 녹하, 월규가 있는데 외롭기는요.”

황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짐을 원망하는 소리로 들리는구려. 짐이 너무 바빠 당신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함을 탓하는 것이오?”

그는 백천범을 다리 위에 올리고 그녀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조정 일이 너무 많아 힘드오. 다 버리고 강남에 가서 사는 건 어떻소?”

“그게 황제가 할 소리예요?”

백천범이 눈을 흘겼다.

“스스로 천하를 군림한 것이니 책임을 져야죠.”

“당신을 위해서였소.”

황제의 머리가 그녀의 품 깊숙이 파고들었다. 백천범은 간지러움에 그의 머리를 껴안고 웃었다.

“아이도 아니면서 젖이 먹고 싶은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말에 뭔가 깨우친 듯 고개를 들더니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아이를 하나 더 낳읍시다. 첫째보다 둘째를 낳는 게 더 수월하다고 하더이다.”

그는 행동파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천범의 옷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어서, 빚쟁이 같은 녀석이 없을 때 빨리 끝냅시다. 그래야 수확도 빨리 할 수 있을 것이오.”

백천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결론은 하나가 아닌가. 그러나 마냥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는 너무 바쁘니, 한 궁전에 산다고 해도 며칠 내내 못 보는 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틈만 나면 백천범의 옆에 딱 붙어 있으려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