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4화
가동은 묵용린을 데리고 궁을 나섰다. 가마에 타려고 하는데 묵용린이 발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탈래요.”
“말을 타면 춥습니다. 가마가 따뜻하지요.”
그러나 묵용린은 고집을 부렸다.
“말을 탈래요.”
태자의 고집을 꺾을 수 없기에 가동은 백기를 들었다. 결국 자신의 피풍으로 태자를 감싸고 말을 채찍질을 하며 달렸다.
묵용린은 피풍 밖으로 눈을 내놓고 임안성의 길거리를 구경했다. 연말이라 길가에는 새해를 준비하는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호객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오색 빛깔 등이 걸려 있어 전체적으로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다리를 건너자 대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묵용린은 잠시 구경하고 가자며 가동을 졸랐다. 가동은 묵용린이 추울까 싶어 따뜻한 군고구마를 사서 먹여 주었다.
묵용린의 눈에 비친 길거리는 재미난 것들로 가득했다.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살 수 있고, 곡예도 볼 수 있으며 군고구마도 먹을 수 있었다. 군고구마를 아주 맛있게 먹은 묵용린은 입맛을 다시며 더 먹고 싶다고 보챘다.
가동은 묵용린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따랐기 때문에 군고구마를 한 아름 사 왔다. 그는 종이로 포장한 군고구마를 손에 들고 묵용린에게 목마를 태워 줬다. 군고구마를 먹으며 곡예를 보자 묵용린은 몸을 흔들며 좋아했다. 가동은 묵용린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밖에서는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도련님, 고구마를 많이 드시면 배가 더부룩할 수 있으니 조금만 드세요.”
“배가 더부룩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용린은 방귀를 연달아 뀌었다. 가동은 울상을 지으며 묵용린을 땅에 내려놓았다.
“제 목에다가 방귀를 계속 뀌시면 어떻게 합니까.”
묵용린은 배를 잡고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사부님, 제 방귀가 싫으세요? 다른 사람들은 좋아할 텐데, 사부님은 어찌 싫어하십니까?”
가동은 콧방귀를 뀌며 묵용린을 안고 다시 말에 올랐다.
“됐습니다. 집에 가시지요.”
가동은 사부라는 호칭을 듣자 즉각 바로잡았다.
“호칭이 맞지 않습니다. 저는 황후 마마의 스승이니, 태자 전하는 저를 사공师公이라 부르셔야 합니다.”
“부황께 여쭤보니 어머니께서 사부님께 배우신 것이 별로 없대요. 진짜 사부라고 할 수 없으니 제 사부님이 맞다고 하셨어요.”
가동은 입을 삐죽거렸다. 태자가 저를 사공이라 부르면 황제의 서열도 애매해질까 봐 저리 말한 게 아닌가. 두 사람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하인이 대문을 열며 소리쳤다.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동은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빠른지 하인들이 놀라 비켜섰고, 묵용린은 재미있다는 듯 웃어 댔다.
말발굽 소리를 듣고 마중을 나온 녹하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태자를 또 몰래 집으로 데려오다니! 그녀는 가동의 귀를 잡아당기며 낮게 질책했다.
“죽고 싶어? 왜 또 전하를 데리고 온 거야?”
가동은 비명을 지르며 묵용린에게 눈짓을 보냈다. 묵용린은 바로 태자의 위엄을 보이며 말했다.
“사모师娘(스승의 부인)님, 제 사부님께 예를 갖추세요.”
녹하는 가동의 귀를 놓고 묵용린을 안아 방으로 들어갔다.
“전하께서 궁을 나오시는 것을 폐하와 마마께서도 아세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왜요?”
묵용린은 어떻게 핑계를 댈지 고심했으나 딱히 떠오르지 않아 가동을 바라보았다. 가동이 대신 답했다.
“폐하께서는 알면서도 눈감아 주시는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지면 되니까.”
“폐하의 의도를 알면서도 이러면 어떻게 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려고.”
가동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이도 제대로 못 보면 정말 무능한 거지. 내가 모를 줄 알고? 궁을 나올 때마다 영구가 몰래 호위 무사를 붙인다고. 못 믿겠으면 사람을 시켜 밤에 몰래 우리 집을 찾아오라 해 봐. 바로 붙잡힐걸.”
녹하는 묵용린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도성 안에 황제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그녀는 가동이 묵용린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따뜻하게 덥혀 놓은 침대에 묵용린을 앉히자마자 방귀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녹하는 묵용린을 제 자식처럼 아꼈던 터라, 태자의 배 속이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민감히 반응했다.
“전하께서 뭘 드신 거야? 배탈이 난 거 아니야?”
“군고구마 몇 개 드셨어. 배가 더부룩하신가 봐. 방귀를 뀌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가동은 묵용린에게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저희 이불에 냄새가 다 뱄으니 나중에 물어내세요.”
녹하가 먼지떨이를 집어 들어 가동을 때리기 시작했다.
“누가 전하께 군고구마를 드리래? 귀하신 분한테 거친 음식을 드리다니, 그것도 몇 개씩이나!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가동은 녹하를 피해 방 안을 뛰어다녔다.
“군고구마 몇 개 가지고 왜 이래!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아야, 아파! 맛있게 드시고 방귀를 뀌는 건 전하이신데 왜 스승인 제가 맞아야 하는 겁니까, 보상을 좀 해 주셔야……!”
묵용린은 난장판이 된 광경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그리고는 녹하의 속을 더 뒤집을 생각인지 방귀를 연달아 뀌었다. 녹하가 씩씩거리며 발을 멈추자 가동은 침대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묵용린은 그의 몸에 올라타더니 얼굴을 찰싹 치며 말했다.
“양아버지라 부를래요.”
놀란 가동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라고요?”
“저를 위해 맞았으니 양아버지라고 부를게요.”
녹하가 급히 말렸다.
“안 됩니다. 안 돼요.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가동이 뭐라고 전하의 양아버지가 된단 말입니까?”
“사람이 없을 때만 그렇게 부르면 되잖아요.”
가동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라는 말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진짜 아버지든 양아버지든 다 상관없었다.
“그럼 한번 불러 보세요.”
묵용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양아버지!”
가동도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답했다.
“오냐!”
순간 녹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어차피 창이 굳게 닫혀 있어 들을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럼 저는요?”
“양어머니!”
“그래!”
녹하는 붉어진 눈을 감추며 묵용린을 안았다. 가동이 그러했듯, 그녀도 어머니라는 말을 오랫동안 동경해 왔다.
* * *
서 태후는 골치가 아팠다. 최근 자신을 찾아와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완곡하게 말했지만 고자질과 다를 바 없었다. 황후가 궁 안을 뛰어다니고 나무를 타는 걸 고자질하는 사람도 있었고, 태자가 궁에서 사고를 치고 가 대인의 집에서 몰래 자고 온다는 걸 고자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황후는 체통을 지키지 않고 어머니로서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황제는 조정에서 온갖 정사를 돌보아야 하니 이런 일까지 관리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다들 태후를 찾았다. 태후는 충분히 관여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 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황후가 제멋대로 구는 건 모두 황제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황제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너그러워도 백천범과 관련되면 양보를 몰랐다. 그녀를 봉명궁으로 옮기는 것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황제가 얼마나 은애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련의 일들이 서 태후의 눈에도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가동이 태자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절대 아니 될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짚고 넘어가야 했다.
사람을 보내 황후를 모셔오라 하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황후를 만나기는커녕 승덕전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황제가 동행하지 않으면 황후 혼자서는 자안궁에 올 수 없다고 했다.
자연히 서 태후의 기분은 언짢았다. 자안궁이 호랑이 굴이라도 된단 말인가? 자신이 백천범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다른 비빈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황후가 와야 재밌는 볼거리가 생기지 않겠는가. 체면이 서지 않아 서 태후가 화를 내려는데, 마침 황후가 방문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서 태후가 자신을 찾았다는 말을 듣자 백천범이 급히 자안궁을 찾은 것이다. 백천범은 황제의 걱정을 알고 있었지만, 늘 황제의 그늘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언제나 피하는 일만이 최선책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으면 당당히 직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황후가 왔다는 말에 서 태후의 표정이 밝아지며 미소가 떠올랐다. 안으로 들어선 백천범은 서 태후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신첩, 문안 인사 드리옵니다.”
“어서 앉으세요. 여봐라, 차를 내오거라.”
백천범은 서 태후 바로 다음 상석에 앉았다.
“태후 마마께서 급히 신첩을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지요?”
“급한 일은 아닙니다. 황후가 돌아온 후로 애가가 황후와 얘기 한 번 제대로 못 나눠 본 것 같아, 비빈들도 함께하는 자리에 불렀습니다.”
백천범은 비빈들을 한 번 훑어보다 수원상과 눈이 마주쳤다. 수원상은 백천범을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태후 마마가 계신 곳이 즐거워 보이네요. 하지만 소첩 승덕전에서 외롭지 않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린아가…….”
서 태후는 황후가 묵용린을 언급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 가 대인을 태자의 사부로 명했다지요. 가 대인의 무술 실력은 뛰어나긴 하지만 태자를 가르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백천범은 그 말을 듣고 차분히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린아의 놀이 동무로 가 대인을 임명하신 겁니다. 지금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건 원치 않는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가 대인은 린아와 함께 사고만 치고 다니고 있어요. 서오소 곁채 창호지에 구멍을 내었으니, 겨울에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내무부에서 밤새 구멍을 메웠다고 하더이다. 벽복궁 앞 백학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죽어 가야 합니까?”
백천범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누군가가 서 태후에게 고자질하여 자신을 찾은 것이었다.
“태후 마마, 노여워 마세요. 소첩이 알아보니 린아는 시력을 높이기 위해 새총을 쐈다고 합니다. 먼저 방에 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고, 다들 응원해 줬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잘못은 잘못이기에, 신첩이 이미 꾸짖었습니다.
백학 사건은 백학에게 알록달록한 색을 입혀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신첩이 알아듣게 얘기했고 린아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조하였습니다.”
“그러면 황후가 체통도 지키지 않고 뛰어다녔다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나무에도 올랐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만백성의 어머니인 황후는 모든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황후도 당시에 다 배운 걸로 아는데요.”
예전 일을 언급하자 백천범이 웃었다.
“그렇죠. 규율을 배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서 태후는 얼굴이 붉어졌다. 백천범이 대놓고 비꼴 줄이야. 괜히 제 발이 저렸던 서 태후는 지금의 백천범이 예전의 고분고분했던 그녀가 아님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