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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93)화 (592/1,192)

제593화

그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백천범은 몽롱한 얼굴로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황제의 가슴을 나긋하게 두드렸다.

황제는 백천범의 얼굴을 감싸고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 백천범도 격앙되어 응하려고 하는 찰나, 작은 머리가 어깨 쪽에서 쑥하고 올라왔다. 머리의 주인은 황제를 밀어내고 백천범의 머리를 안고서는 닭이 쌀을 쪼아 먹듯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황제를 노려보았다.

뜨거운 감정이 일던 황제는 묵용린이 노려보니 퍽 난감했다. 자신의 부인인데 어찌 사통을 걸린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백천범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아들을 안았다.

“어찌 깼어?”

묵용린은 여전히 식식거렸다.

“나 몰래 입을 맞추다니!”

황제는 부끄러운 마음에 엉덩이를 때려주려 했다.

“조그만 것이 누구한테 배운 것이냐? 아비의 일을 그르치는 것은 네가 제일 잘할 것이다.”

백천범은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버지가 하는 말 좀 보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녀가 묵용린을 달랬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더 자렴. 어머니가 옆에 있을게.”

묵용린은 백천범의 품에 안기면서 황제를 힐끔힐끔 보았다.

황제는 치가 떨렸다. 어릴 때도 빚쟁이처럼 굴더니 지금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더 크면 어찌 될지 걱정이 앞섰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일단 묵용린부터 해결해야지 계속 참다가는 그가 먼저 탈이 날 듯했다.

바보 같은 가동과 묵용린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영 못마땅했지만 이제 방도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꾀가 많은 묵용린이 순수한 가동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리하여 황제는 가동을 태자 묵용린의 측근 시위이자 사부로 임명했다. 가동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아이를 좋아했고 특히 묵용린을 아꼈다. 묵용린 역시 가동을 좋아했기에 둘은 매일같이 놀기 바빴다. 가끔 가동은 대담하게 태자를 집으로 데리고 갔고 황제는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묵용린이 그의 일을 그르치지만 않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편한 나날이 이어졌지만 백천범은 남모를 근심거리를 품고 있었다. 여옥이 수원상의 손에 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황제가 알면 그가 수원상을 죽일까 싶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또 궁지에 몰린 수원상이 여옥에게 해를 입힐까 두렵기도 했다.

수원상이 사람을 바꿔치기한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황제와 백천범의 사이가 다시 좋아질 것이 두려워 가짜로 바꾸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수원상은 그녀가 데려온 가짜가 실은 진짜 백천범임을 꿈에도 모르리라. 때마침 기홍이 방금 쪄 낸 자색 토란 만두를 가지고 왔다.

“드셔 보세요. 자색 토란이 달고 쫀득하니 맛있어요.”

백천범이 손으로 집으려 하자 기홍이 급히 말렸다.

“마마, 방금 찜통에서 꺼낸 것이라 뜨겁습니다. 젓가락으로 드셔요.”

백천범은 웃고 말았다.

“여전히 매사에 세심하네요. 영 대인이 정말 복이 많아요.”

기홍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아니었으면 이런 복을 누릴 수 없었을 거예요. 예친왕의 서비庶妃가 되었을 테니까요.”

만두가 뜨겁긴 했다. 한 입 베어 물자 김이 나는 만두소가 흘러나왔다. 자색의 만두는 정말로 맛있었다. 백천범은 만두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영 대인이 그날 데리고 가지 않았으면 정말로 예친왕에게 시집가려고 했어요?”

기홍은 조용히 웃었다.

“제가 시집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면 저도 포기했겠죠. 절 잘 아시잖아요. 제 주관보단 상황에 맞게 살아왔는걸요. 녹하와 월규와는 다르게 말이에요. 가동은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일편단심이고, 월규는 시집을 가지 않는 한이 있어도 아무나와 만나지 않는 성격이잖아요.

그러나 전 둘과는 달리 집에서 재촉을 하니 어서 시집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못 간다면 절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시집가려고 했어요. 예전부터 저에게 호감을 보여 준 예친왕이라면 시집을 가도 크게 힘들지 않을 것 같았어요. 영구가 아니어도 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겼죠.”

“은애하지 않는데 행복할까요?”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행복은 사치죠.”

기홍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다행히 하늘이 절 가엾이 여겨 주어 은애하는 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죠.”

백천범은 별안간 남문우를 떠올렸다. 자신을 놓아 주던 남문우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하지만 감정 앞에서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잘못된 시기에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결과는 뻔했다. 백천범은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또 있어요? 찬합에 담아 폐하께 갖다 드려야겠어요.”

기홍은 살포시 웃었다.

“폐하가 보고 싶으세요?”

백천범은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폐하가 저를 보고 싶어 해서요.”

찬합을 들고 남서방에 도착하니 학평관이 예를 갖추려고 했다. 그때 백천범이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쉿, 폐하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거예요.”

학평관은 조용히 몸을 움직이며 황후의 장난에 협조했다.

백천범은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때 안에서 영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장군이 폐하의 밀령을 받들었습니다. 곧 군대를 정비해서 출발할 것입니다. 남원의 군대와 맞서는데 경험이 있기…….”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소리치며 뛰쳐나왔다.

“남원을 공격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이 장군을 보내다니. 이 사기꾼!”

놀란 황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아무 소리 없이 들어온 것이오?”

백천범은 그에게 달려갔고 영구는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급히 치웠다. 그러나 백천범이 지도를 뺏어 펼쳐 보니 동월국과 남원 국경에 주홍색으로 표시한 진격 노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찬합을 황제에게 던졌다. 황제는 가볍게 찬합을 받더니 겸연쩍게 웃었다.

“부인, 노여워 마시오. 지금은 그저 논의를 하는 것이지 아직 공격도 하지 않았잖소.”

단단히 화가 난 백천범이 가슴을 들썩였다. 황제의 눈짓에 영구가 황급히 나갔다. 황제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지만 그녀가 몸을 틀며 소리쳤다.

“만지지 마세요!”

황제는 찬합을 열어 만두 하나를 집어 먹었다.

“음, 맛있구려.”

그러고는 한 입 베어 문 만두를 백천범에게 먹여 주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결국 황제는 만두를 입에 다 집어넣었다.

“나에게 시집왔으니 당신은 이제 묵용 집안사람이오. 당신은 이제 친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남원 역시 마찬가지요.”

“그렇지 않아요.”

백천범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다 모황이 계획한 것이지, 남원의 백성들과는 무관하다고요. 남원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모르시잖아요. 도처에 기이한 풀과 꽃이 자라고 진기한 금수들이 살고 있어요. 백성들은 한가로운 삶을 즐기고 춤과 노래에 능할 뿐만 아니라 친절해요.

조각루吊脚樓(산간 지대의 원두막처럼 생긴,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든 집)에 살면서 담장 없이 개방된 채로 살아요. 신과 권선징악을 믿고 싸움을 즐기지 않아요. 그래서 정규 군대도 없다고요. 남원 인구도 매년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선량한 민족을 죽일 수 있어요? 모황이 잘못한 일을 왜 백성들이 책임져야 하죠?”

그녀의 매서운 발언 앞에서 황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원한은 꼭 갚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와 그녀를 떨어트려 놓은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하여 조용히 일을 벌였건만, 결국 그녀가 알고 말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지도만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황제의 다리 위에 머리를 기댔다.

“폐하,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요. 남원이든 동월국이든 고통을 받는 것은 백성들이에요. 모황에 맞선다면 반대하지 않을게요. 살려만 주세요. 목숨만 연명해도 괜찮아요. 그저 모황이 조금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자존심이 강한 분이기에 권력이 사라지면 수족이 잘린 것과 같아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거예요.”

황제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몇 년간의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소. 그자를 단칼에 베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이기에 그자가 죽는 걸 원치 않지. 그러나 천범, 그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 원한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알아요. 모황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죠. 화가 가라앉지 않거든 날 때려요.”

안 될 말이었다. 황제가 그녀를 일으켜 와락 껴안았다.

“바보같이 그게 무슨 말이오. 그녀는 그녀고 당신은 당신이거늘, 아무 관련도 없는데.”

곧이어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좋소, 약속하리다. 전쟁은 하지 않겠소. 당신의 모황을 죽이지도 않을 것이오. 이 일은 이렇게 끝냅시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응어리는 당신이 풀어 주어야 하오.”

“알겠어요. 말해 보세요. 어떻게 보상해 드릴까요?”

백천범은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흠, 그렇게 보니 내가 손을 쓸 수가 없구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를 덮었다.

* * *

남서방에서 상주서를 보고 있는 황제에게 학평관이 조용히 다가왔다.

“폐하, 가동이 또 태자 전하를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 알겠네.”

학평관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폐하, 고귀하신 태자 전하가 가동의 집에서 밤을 보내시는 건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황제는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괜찮네, 녹하가 잘 돌봐 줄 것이야.”

황제도 숨 돌릴 틈이 필요했다. 학평관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폐하, 오늘 내무부에서 아뢰길 서오소 동쪽 곁채 네다섯 곳의 창호지에 줄줄이 구멍이 났다고 합니다.”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짐이 그런 일까지 관여해야 한단 말이냐?”

“태자 전하께서 새총을 쏘아서 그리된 것이라 합니다.”

글을 쓰던 황제의 손이 멎었다.

“구멍을 메우라고 하라.”

“벽복궁 앞 백학들이 먹물을 뒤집어써 죽어 가고 있다 합니다.”

황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또 태자가 한 짓인가?”

학평관은 머뭇거렸다.

“가동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확신했다.

“아니, 태자가 한 것이네.”

“폐하, 소신이 보기에 태자 전하를 가동에게 맡기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태자 전하를 망쳐 놓을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황후도 아이는 방목하듯 길러야 한다고 했으니.”

“하지만 폐하, 태자 전하는 고귀한 신분으로 향후 이 나라를 이끌고 가실 분이십니다.”

붓을 내려놓은 황제가 고요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도 안다. 평생 이 궁에서 갇혀 살아야 할 걸 아니 지금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것이지. 짐처럼 재미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태자의 놀이 동무로 가동만 한 사람이 없네.”

학평관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황제가 저리 말하는데 그가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옆에서 보는 사람만 답답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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