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2화
그 말에 비빈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일 년 동안 현비의 패를 뒤집었던 황제지만 그마저도 태자가 돌아온 뒤로 없지 않았던가. 자연스레 황제가 무욕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이리 대놓고 합방을 얘기하다니! 머릿속에 저절로 야릇한 그림이 떠오른 비빈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흠흠, 부부 사이가 좋은 건 애가도 알지만 궁에도 규율이 있어요. 황후가 어찌 황제의 침실에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황후도 후궁의 주인으로 자신의 궁전을 가지고 있어야지요.”
“짐의 말이 규율입니다.”
황후가 돌아온 후, 황제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구족을 멸할 것입니다.”
서 태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를 내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자신의 구족을 멸하면 황제도 포함되는 것인데, 이리 어리석어서야!
황제가 된 묵용감은 초왕 시절 괴팍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태후는 그 모습이 흡족했다. 그러나 백천범이 돌아오자마자 사랑에 빠진 바보로 돌아가 버렸다. 위엄 넘치던 황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백천범이 급히 수습하려 나섰다.
“제 궁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좋긴 뭐가 좋소?”
백천범과 따로 지내는 것만큼, 황제에게 두려운 일은 없었다. 그녀가 곁에 없으면 불안했다. 낮에는 정사를 돌보느라 만나기 어려운데, 밤에도 떨어져 있으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그녀를 안고 있어야만 마음에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황제는 소매 밑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에 백천범이 황제의 손을 꼬집었다. 황제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았다.
“이 일은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묵용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께 궁전을 주셔요. 저는 어머니랑 같이 살래요.”
“너는 이제 많이 컸으니 동궁에서 살도록 해라. 장영전을 치워 둘 테니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 그리고 내일부터 상서방에 가서 책을 읽고 학문을 익히도록 하거라.”
서 태후가 경악했다.
“폐하, 린아는 아직 세 돌도 지나지 않았는데 책이라니요.”
“일찍도 아니지요.”
황제는 묵용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영리한 아이니 때가 되었습니다.”
묵용린은 서 태후의 품에서 나와 백천범에게 달려가 보챘다.
“어머니, 린아는 아직 어려요.”
백천범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고 아들을 안았다.
“아버지께서 린아에 대한 기대가 커서 그런 것이란다. 하지만 책은 아직 무리이니 두 해 정도 더 지나고 보도록 하자.”
“천범, 너무 오냐오냐 기르면 안 되오. 인자한 어머니가 자식을 망친다고 하지 않소. 린아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할 아이이오.”
“제 아들은 제가 잘 알아요. 당신은 조정 일로 바쁘니 린아는 저에게 맡기세요.”
“…….”
묵용린은 기뻐하며 백천범을 껴안았다.
“린아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비빈들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황제의 가정사이니 그냥 구경이나 하는 게 좋을 듯했다.
황제와 황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떴고, 비빈들도 하나둘 처소로 돌아갔다. 수원상은 숙비를 따로 불러 산책을 했다.
“그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숙비는 코를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촌 오라버니에게 물어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아요.”
“황제 곁을 지키는 시위니 입이 무겁겠지요. 그래도 계속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혼례 당일 밤의 일을 알아낸다면 황후를 해치울 수 있나요?”
수원상은 잎이 다 떨어진 길가의 나무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지요, 하지만 기회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날아가 버리는 게 기회이지요.”
숙비는 수원상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좋아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알아내겠어요. 제가 곧 좋은 소식을 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수원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한동안 내 궁에는 오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뭔가 알아내거든 그때 오시지요.”
“그야 당연하죠.”
갈림길에서 숙비는 궁녀를 데리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고 수원상은 길에 서서 한참 넋을 놓았다. 추문이 수원상을 여러 번 불러도 꼼짝도 하지 않자 앞으로 다가갔다.
“마마, 그만 돌아가시지요. 밖이 춥습니다.”
수원상은 생각에 잠긴 채 승덕전을 바라보았다.
“오늘 황후가 여대쌍처럼 보였느냐?”
추문은 대차게 콧방귀를 꼈다.
“여대쌍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똑같더라고요. 황상과 전하를 아주 꽉 잡고 있던걸요. 무양 공주보다 더 백천범 같았습니다. 황상께서도 저리 깜빡 속으실 정도니까요. 마마, 가마에 오르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어쩌시려고요.”
수원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안궁에서 본 황후는 계속해서 수원상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말투, 웃는 모습 등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닮았다. 추문의 말처럼 무양 공주보다 여대쌍이 더 백천범처럼 보였다. 그러니 황제가 의심하지 않는 거겠지. 어찌 이리 닮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수원상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커다란 걸 놓친 채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여대쌍과 함께 무슨 보답을 드리러 황각사에 간 것일까? 부부 상봉을 감사하는 의미로 간 것인가? 우스운 일이었다. 일개 궁녀가 황제와 부부가 되다니.
그녀의 잘못이었다. 늑대를 끌어들여 이 지경으로 이끌었다. 절에 다녀온 후로 여대쌍은 승덕전에서 지냈고 황제의 말대로라면 계속 승덕전에서 살게 될 터였다. 승덕전이 어디인가, 그녀조차 함부로 갈 수 없는 곳 아닌가. 자연히 여대쌍을 만나기도 힘들어질 터였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계속 생각에 잠겼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가장 최악의 방법은 대쌍의 신분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피해를 입을 테니 이건 최악의 순간에 내리는 마지막 선택이 되어야 했다. 현재로서는 숙비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가 새로운 희망을 물고 오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 * *
황제가 고집을 부린 끝에, 황후의 처소는 승덕전이 되었다. 또한 황후의 반대로 태자는 장영전에 가지 않았다. 이리하여 셋은 승덕전에서 시끌벅적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황제는 갈수록 태자가 눈에 거슬렸다. 어느새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엄격한 아버지만 남아 있었다. 이제는 묵용린에게 아버지 대신 부황이라 칭하라 지시했다. 황가에서 태어난 이상, 일반 백성들처럼 자유롭게 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평생 고귀한 신분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대가는 크다는 것 또한.
묵용린은 제법 누울 자리를 봐 가며 발을 뻗었다. 황제에게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앞에서는 황제의 말에 따르는 척하고, 뒤에서는 반대로 행동했다. 이도 안 될 때는 백천범을 찾았다. 황제조차 그녀를 당해 내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묵용린을 끔찍이 아끼는 그녀는 묵용린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었다. 결국 묵용린이 천하제일이 된 셈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함께 지내니 난처해진 건 학평관이었다. 황궁에는 엄연히 황궁의 규율이 있는 법이건만, 어느새 구분이 없어져 버렸다. 더불어 승덕전에서 두 사람을 모두 모시려니 일손이 부족했다. 즉각 적임자를 찾기가 힘들었던 탓에 학평관은 골치가 아팠다.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자, 녹하가 황후의 시중을 들기로 했다. 그녀가 침수감을 떠날 때 다들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고고에서 궁녀로 신분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하만큼은 기쁨에 겨웠다. 그녀는 예전부터 침수감을 떠나고 싶었다. 매일 상전들을 위해 옷을 만들면서 누구의 무늬가 예쁜지, 누구의 자수가 세밀한지 비교하는 게 일이었다. 또 괜한 트집을 잡아 욕을 먹는 일도 많았다.
상전들은 녹하에게 대놓고 질책하지 못하니 아랫것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녹하의 성격상 자신의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꼴을 보지 못했고, 자연히 심신이 지쳐 괴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제는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 백천범의 시중을 들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간 듯했다.
기홍은 여전히 어선방에서 황제 가족의 어선을 책임졌고, 월규는 백천범의 사람이니 자연히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월규 대신 소육小六과 사희四喜라 불리는 태감 둘을 발탁해 장부를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학평관이 특별히 영리한 이들로 엄선해 뽑은 태감이었다. 차를 준비하는 것을 포함해 나머지 허드렛일은 소복자가 맡았다.
금란전에서 황제가 미소를 보이자 신하들은 속으로 기뻐했다. 황제는 역시나 황후를 끔찍이 아꼈던 것이다. 둘의 관계가 좋아진 후로 황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난폭하고 음울한 기운은 사라지고 이따금 신하들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오직 수민만이 무거운 마음을 감추어야 했다. 그는 수원상을 떠올릴 때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딸아이 한 명은 영항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소식조차 없었다. 다른 한 명은 사비로 후궁을 관리하고 있었다지만, 별안간 나타난 황후 때문에 재앙을 맞게 된 격이었다. 수민은 적당한 때에 수원상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이전보다 백천범을 더 그리워했다. 몸은 조회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몇 번이고 승덕전을 향해 날아갔다. 남서방에서 신하들과 의논을 할 때에도 밖에서 백천범의 소리가 들리면 넋을 놓곤 했다. 신하들은 그런 황제의 모습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황제는 더 많은 시간을 백천범과 보내고 싶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도 모자랐다. 그러나 황제가 해야 할 일은 끝이 없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 올라오는 안건이 더 늘어났다. 분신술을 써도 모자랄 판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백천범과 묵용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황제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잠든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충만한 나날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부인과 아들이 그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 그를 든든히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들이 있으면 어떤 역경이 온다고 한들 두렵지 않았다.
황제는 늦게 잠이 들었지만 일찍 눈을 떴다. 장막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햇빛에 시야가 적응이 되자 바로 백천범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볼수록 감동이 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왔을 때가 고작 열세 살이었다. 그땐 이목구비도 뚜렷하지 않아 설익은 과일과 같았다. 지금은 아이도 낳은 데다 그림처럼 아리따운 여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녀는 먹음직스럽게 무르익은 과일과 같은 모습으로 고혹적인 향기를 내뿜었다. 보면 볼수록 손이 이끌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몸이 반응했다. 황제의 손이 그녀의 침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가볍게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그는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백천범은 본능적으로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녀도 묵용감의 품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