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1화
다음 날 아침, 백천범은 자안궁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생각이었다. 황후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황후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혼정신성昏定晨省(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안부를 여쭈어봄)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일반 백성들도 매일 웃어른께 문안인사를 드렸으니 궁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궁 내 규율은 놀랄 정도로 많아, 규율로 궁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때는 백천범이 규율을 익힐 수 있도록 서 태후가 강제로 머무르게 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때를 떠올린 듯, 황제가 그녀를 막으며 낮게 말했다.
“아직 이르니 편히 자도록 하시오. 문안 인사는 급한 것 아니니 조회가 끝나면 같이 갑시다.”
황제는 괜스레 그녀 혼자 찾아갔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할까 봐 걱정이었다. 백천범도 그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조회에 가고 저는 문안을 드리러 가면 돼요. 매번 당신 뒤에 숨을 순 없잖아요.”
그러나 황제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나도 요 며칠 가지 못했으니 같이 갑시다. 우리 가족이 모인 걸 보면 태후께서도 기뻐하실 거요.”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백천범도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황제는 아쉬운 듯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문득 곁눈질로 보니 묵용린이 실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백천범 몰래 눈을 한번 부라리고 몸을 일으켜 나갔다. 학평관은 황제의 시중을 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인이 돌아오니 아비와 아들이 원수지간이 되었군.’
* * *
자안궁의 아침은 늘 북적거렸다. 비빈들이 모두 와서 문안 인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치장한 아리따운 여인들을 보고 있자면 서 태후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언변에 능한 여인들을 서 태후를 즐겁게 하였다. 다들 모인 가운데, 숙비가 소매 끝을 매만지며 무심하게 말했다.
“황후 마마의 금족령이 풀리셨으니 태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잊어버리셨나 봅니다.”
황후 얘기를 꺼내는 순간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숙비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황후가 서 태후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닌가. 서 태후는 그저 담담히 웃었다.
“어제 황제와 황후가 함께 황각사에 예불을 드리러 갔어요. 몸이 고단했을 터이니 늦게까지 잠이 든 거겠지요.”
서 태후가 황후를 감싸자 숙비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드러냈다. 수원상의 말로는 예전에 서 태후가 백천범을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일로 황제와 사이가 틀어졌는데, 이제 와 백천범의 편을 들다니. 숙비는 수원상을 힐끗 보았지만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숙비는 눈을 한 번 흘기고 입을 꾹 다물었다.
조회가 끝난 후 황제, 황후, 태자가 함께 자안궁으로 향했다. 세 사람을 본 황유도가 즉시 태후에게 가 보고를 올렸다.
“마마, 폐하와 황후, 태자가 오고 계십니다.”
서 태후는 눈웃음을 지으며 지시를 내렸다.
“어서, 차를 내오거라. 황후를 위해 맛있는 간식도 챙겨오거라.”
예전, 그녀는 백천범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아들은 백천범을 제 목숨보다 중요시했고, 두 사람 사이엔 묵용린도 있었다. 백천범에게 미안한 감정도 남아있던 터라 그녀에게 마음을 열기로 한 것이다.
다른 비빈들은 서 태후의 지시를 듣고 생각에 빠졌다.
‘황후는 황후다. 언제 우리를 정성스럽게 대접한 적이 있던가.’
평소대로라면 비빈들은 각자의 궁으로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황후를 기다리는 게 빤히 보였다.
과연,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황후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온 것이다. 비빈들이 황제를 만나기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웠다. 황제는 예고 없이 올 때가 많아 그와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바쁠 때는 학평관이나 소복자를 보내는 일도 잦았다.
처음에는 비빈들도 황제의 눈에 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황제가 그들을 보는 시선은 장식품을 보는 듯했다. 방 안에 있는 가구보다 못한 존재들처럼 대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황제가 황후와 같이 나타나자 모두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황제가 황후를 그렇게 아낀다고 하던데, 황후 앞에서 황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비빈들을 본 순간, 황제의 눈에 얼핏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황후가 비빈들과 마주칠 일 없게 일부러 조회를 마치고 온 것인데, 와 보니 다들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백천범은 비빈들을 보자 황제의 손을 놓았다. 머쓱해진 황제는 태후 앞으로 가 먼저 예를 갖췄다.
서 태후는 일어나 왼손으로 황제를, 다른 손으로 황후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태자를 안으며 웃었다.
“가족끼리 이리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어서 앉으세요. 늦가을 계화로 특별히 계화떡을 만들어 봤어요. 황후가 단 간식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먹어 보세요.”
백천범은 감사 인사를 올린 후 서 태후 옆에 가 앉으려 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제 옆으로 끌어와 앉혔다. 그는 넓은 소매 뒤로 백천범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백천범은 황후가 아니라 총애를 받는 비처럼 보였다.
서 태후는 태자를 웃게 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황제는 백천범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백천범은 아직 비빈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보고 황제에게 알려주었다. 황제는 그제야 낮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하지만 앉으라는 명은 없었기에 비빈들은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서서 몰래 그들을 훔쳐보았다. 황제가 황후의 손을 잡은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다들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황제가 저토록 자상할 줄이야. 기껏해야 웃음을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했건만, 손까지 잡아 줄 줄은 몰랐다. 비빈들의 소리 없는 경악을 뒤로하고, 황제가 서 태후에게 말했다.
“짐과 황후는 어제 황각사에 가서 예불을 드리고 태후 마마를 위해 무병장수를 빌고 왔습니다. 황후는 아침 일찍 문안 인사를 오려고 했지만 제가 반대했습니다. 혹여 황후가 넓은 궁에서 길이라도 잃을까 동행한 것이니 태후께선 양해해 주십시오.”
서 태후가 대답도 하기 전에 묵용린이 말했다.
“어머니는 길을 잃지 않아요. 얼마나 기억을 잘하는데요. 아버지는 어머니랑 술래잡기를 했을 때도 어머니를 못 찾았었잖아요.”
“…….”
백천범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가끔 길을 잃을 때도 있어요.”
서 태후도 무미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계속 지내다 보면 길을 잃을 일은 없겠지요.”
“저희 부부는 함께하는 것이 익숙하기에 앞으로도 이리 오겠습니다. 다만 이 시간대에 오는 것이…….”
“상관없습니다. 그저 찾아 주면 그만인 것을요.”
묵용린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저도요. 할마마마, 저도 어머니랑 같이 올 거예요.”
그 말은 비빈들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돌처럼 굳은 황제라도, 은애하는 사람에게는 녹아내리는 모양이었다. 저리 애틋한 부부 사이에 그들이 낄 틈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백천범은 계화떡을 입에 넣었다. 짙은 꽃향기에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져,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늦가을 꽃으로 만든 것이라 그런지 아주 맛있습니다.”
그녀는 비빈들에게도 계화떡을 권했다.
“먹어 보세요. 맛있어요.”
황후의 말에 비빈들은 예를 갖추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들은 계화떡을 먹으면서도 황제를 몰래 바라보았다. 황제는 황후의 입에 묻은 가루를 털어 주고 있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언제나 저리 자상하게 챙겨 주는 듯했다. 황후는 황제의 입에도 하나 넣어 주었다.
“먹어 봐요.”
서 태후는 황제의 식성을 알기에 좋은 말로 일렀다.
“황제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태후 마마, 아닙니다. 실은 황상도 단 걸 좋아하십니다.”
백천범은 황제를 보며 물었다.
“달죠?”
황제는 백천범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달고 맛있구려.”
서 태후는 입을 씰룩였다. 자신이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저리 보니 백천범이 쓰디쓴 황련을 줘도 황제는 달다 할 모양새였다.
비빈들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나으리라. 비교하지 않으면 상처도 안 받는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숙비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 제 뺨을 때려놓고 백천범은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사비 중 한 명으로, 황제가 그녀를 때린다 한들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마침 황제가 화두를 꺼냈다.
“어제 누가 황후를 화나게 했는지, 일어나시오.”
숙비는 깜짝 놀랐다. 제가 언제 황후를 화나게 했단 말인가. 황후가 이유도 없이 제 뺨을 때렸건만, 황제는 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일까? 하지만 황제의 말에 덜컥 겁부터 밀려왔다. 숙비는 안절부절못하며 얼른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첩을 대신해 해결해 주시어요. 황후 마마께서 소첩을 때리신 겁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가여운 모습을 자아냈다. 그러나 황제는 기도 안 찬다는 듯 소리쳤다.
“하, 사리 분별을 잘하는 우리 황후가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릴 리 없소. 황후를 화나게 했으니 맞은 것일 뿐! 이제부터 황후의 눈에 띄지 마시오. 또 한 번 황후를 화나게 하거든 짐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단호한 황제의 말에 비빈들은 두려움에 떨며 눈을 내리깔았다.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황후에게 다가간 건 잘 보이려 했을 뿐 화를 돋우려 한 게 아니었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감싸고 돌며 입만 열면 ‘우리 황후’라고 말하다니.
이는 서 태후마저 듣기 거북했다. 그녀가 웃으며 타일렀다.
“황후는 후궁의 주인입니다. 모두 황후를 존경하는데 어찌 언짢게 하겠습니까? 다같이 화목하게 지내야 황제도 근심을 덜 수 있는걸요.”
황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황후와 짐이 화목해야 근심 걱정이 없어집니다.”
“…….”
서 태후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황제의 의도를 백천범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비빈들과 마주치지 않으면 언짢은 일도 없을 터였다. 그녀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세심히 그녀를 챙기는 황제의 모습에 새삼 감동이 밀려왔다. 이때 서 태후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새로운 화제를 꺼내놓았다.
“봉명궁은 이미 다 정리해 놓았어요. 황후는 언제 봉명궁으로 옮길 예정이지요? 애가가 최상등 팔면투조병풍을 선물로 주고 싶…….”
“황후는 봉명궁으로 옮기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저희는 각방을 쓴 적이 없으니 황후는 앞으로 승덕전에서 지낼 것입니다.”